색채의 변증법
-서승현, 『분홍, 서러운 빨강』(시와 사람, 2019)
국원호
1. 비트겐슈타인과 더불어 색맹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민족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우리와 같은 색채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며, 색채를 우리와 다르게 사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의 시인들은 색채에 가장 민감한 존재들이 아닐까? 시인은 누구보다 감각에 예민한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감각이란 현상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세상에 있음’이다. 세상의 감각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 되고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알랭 바디우)는 테제를 내세우는 이도 있지만, 화가와 마찬가지로 시인들은 세상에 있는 색채들을 감각적으로 구분하고, 색채를 사용하여 자신이 느낀 감각들을 전달했다. 일찍이 호메로스가 다섯 가지 근원 색을 나누어 문학작품에 사용했고, 괴테는 색채에 관한 자신의 글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므로 시인들이란 감각적으로 색을 사용하는 동물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인류의 문명은 색채마저 위계화, 서열화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색채가 독점적 위상으로 중심화되고, 특정한 색채들은 배제된 역사가 문명의 보편사이다. 이를 서양중심적인 ‘에크리튀르(ecriture)’의 역사라고 하자. 서구적 근대화를 추수했던 우리의 역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지금-여기’ 서구적 색채의 위계적 질서를 거부하고자 하는 시인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색채 속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게 색맹으로 이루어진 민족들의 사람들인지 아니면 서구적 색채의 질서를 거부하고자 하는 단독자(單獨者)들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걷고 있는 색채의 길을 따라가 보자.
- 중략 -
『분홍, 서러운 빨강』의 시인 서승현은 색채가 사라진 ‘디스토피아(dystopia)’적 세계에서 역설적이게도 색채 속을 걷는 사람이다. 다양한 인종과 이념으로 형성된 혼종과 혼색이 지배적이 된 글로벌 시대는 어쩌면 색채가 사라진 사막과도 같다. 글로벌화된 자본주의 세계의 휘황찬란한 색채는 모든 것들이 인위적으로 조작된 외양에 불과한 ‘시뮬레이션(simulacre)’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상품 시장에 전시된 사물도 인간의 인격도 위선과 조작으로 만들어진 외양들의 세계. 완전함으로 가장된 사물과 인간들로 구성된 모조품들이 만들어낸 세계는 오히려 무채색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 무채색의 세계는 여전히 여성이나 이주민들과 같은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만연해 있다. 그래서 시인은 <탈출기>의 모세처럼 우리를 구원해 줄 ‘부재하는 자(Abesnt)’를 찾아 사막과도 같은 단색조의 색채 속을 걷는다.
무채색이 지배하는 세계는 죽음과 고통이 만연한 세계이다. 그 세계는 끝없는 미로처럼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다른 골목 즉 ‘아포리아(aporia)’와 같은 세계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역설적인 “한계”는 동시에 “우리의 기원이자 종말/한 세계의 탄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지점”(「한계」)이기도 하다.
원색의 빨강에
희고 창백한 서러움의 채도가
초저녁 어스름처럼 슬며시 섞여들면
분홍은 비로소 제 모습 드러낸다
매끄럽던 살갗
시큰둥한 무채색으로 식어가면서도
폭염이 천지를 달구는 이맘때쯤이면
원색의 꽃 피우고 싶은 찰진 마음이
먼 길 떠난 그대를 기어이 불러낸다
(중략)
팔랑이는 잎새들이 검초록으로 자지러질 즈음
뜨거운 바람의 등을 타고
비로소 온 몸 가득 당도하는 그대
기다림에 지친 몸 쓰라리게 휘감으며
숨찬 호흡마다 달디 단 꽃구름 떼 뭉클쿵클 피어난다
-「분홍, 서러운 빨강」 부분
무채색의 세계는 원색이 살아 있는 미학적인 세계도, 혼종과 혼색이 만연하는 현대적 세계도 서러움에 빠뜨리는 폭력성을 숨기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의 죽음과 탄생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가 바로 ‘지금-여기’에 부재하는 절대적 타자다. 고통에 시달리는 ‘지금-여기’에 “멀리 떠난 그대”와 같은 부재하는 자가 요구된다. 부재하는 자는 고통 받고 있는 타자들의 구원자이며, 그리하여 시인에게는 욕망의 대상이다. 욕망의 대상이기에 기다림의 대상이고, 욕망의 크기만큼 시인은 이에 부수되는 고통과 시련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시인이란 그래서 항상 신성한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는 건축학적 명령과 압박에 시달리는 자이다. 부재하는 자와의 만남을 위해서는 신성한 건축적 장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통해 부재하는 자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는 자이다. 시(詩)란 말씀(言)이 머무는 사원(寺)이니까 말이다. 색채 속을 걷는 시인은 소박하게도 자신의 주방에 색채들이 모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고자 한다.
생과일즙을 만든다
직근의 육질이 주홍으로 단단한 아프가니스탄 당근
바람과 비와 햇살이 빚은 발칸반도 사과
빨강주황노랑색 중앙아메리카 파프리카
푸른 바다 기운 가득 담은 황금빛깔 인도 오렌지
(중략)
사과껍질에 싸여 음식물 쓰레기 속 버려지는
녹두알만한 살점
저 옛날 내 몸들이 사방에서 크다가
오늘 몸속으로 다시 흘러드는지 몰라
천지에 흩날리는 몸들의 미립자
지금 마시는 생과일즙이 키워가는 죽음 속 탄생
다음에는
진초록색 안개기포 보글보글 부풀다 멈춘
지중해 브로콜리 한 송이도 꼭 추가시킬 것
파마머리 속 온 세상 조화롭게 키우고 싶은
푸른 생각 한 움큼 함께 넣어서 ....
-「생과일즙」 부분
새로운 생명을 생산해 내는 가상성의 장소를 그리스인들은 ‘코라(Cora)’라고 불렀다. 어머니의 몸과도 같은 ‘코라’가 만물의 기원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들 곁에 존재하는 색채들도 그곳에서 흘러나왔을 터이다. 하지만 색채 속을 걷는 시인에겐 그런 선험적이고 초월적인 모태 공간이 필요치 않다. 그저 ‘지금-여기’ 우리들 주변에 있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와 같은 공간만 있어도 색채들의 변증법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음은 알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주방은 “빨강주황노랑색” 혹은 “황금빛깔” 다양한 색채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헤테로토피아와 같은 공간이다. 가끔은 손이 베이는 불완전하고 협소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천지에 흩날리는 몸들의 미립자”는 곧 천연색 “생과일즙”으로 되살아나게 된다. 이른바 “생과일즙이 키워가는 죽음 속 탄생”! “온 세상 조화롭게 키우고 싶은/푸른 생각 한 움큼”이 언젠가 시인을 “편백나무 숲”을 지나 “흰뿔순록의 황금빛 구리방울소리가 차고 맑은 공기가 잘강잘랑 가”르는 “순록이 있는 초원”(「순록이 있는 초원」)으로 데려가리라 상상해 본다.
색채 속을 걷는 시인들이 있다. 우리와 다르게. 그들은 백색의 침묵과 색채들의 조화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수도자처럼 색채 속을 무던히 걸어 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힘들 때쯤이면 ‘지금-여기’엔 부재하는 자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나 아버지의 말씀(서승현)으로 목을 축였으면 한다. “단풍이 고운 건 일교차가 크기 때문/네 인생의 걸음에 교차가 크다면/그 인생 꽃빛처럼 다채롭지 않겠느냐/오만 가지 색들 모여 외롭지 않느니”(서승현,「바람의 집」). 이런 기억과 말씀들에 기대어 색채 속을 걷다보면 찬란한 색채들로 피어나는 시들의 향연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