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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흘 전의 일이었다.
도선스님은 파주의 고령산에 머물고 있었다.
진성여왕으로부터 국사(國師)의 소임을 부여받았으며, 전국의 명산에 국태민안을 바라는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세워 만백성으로 하여금 신라의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 기도하게 하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풍수에 준하여 국토의 여러 곳에 비보사찰들을 짓고 있었다.
하여 지기가 뛰어난 이곳 파주의 고령산 기슭에 사찰을 창건하기로 하고 지금 절터를 다듬고 목재를 구하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이곳에 사찰이 완성되면 보광사(普光寺)로 명명하기로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도선국사의 명망이 이미 사방으로 널리 퍼져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불사에 앞장서고 있었다.
하루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고령산 정상에 올라 천기를 살피던 중에 천기의 흐름이 예전과 같이 고르지 않고 급격하게 한곳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을 느꼈다. 이는 어떤 대변환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국사는 그 자리에서 참선에 들었다. 바위벼랑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기를 살폈다. 이틀째와 사흘째 되던 밤에 커다란 유성이 남쪽으로 연이여 떨어졌다.
다음날 새벽에 국사는 고령산을 내려왔다.
남쪽을 살피고 온다던 제자 경보(慶甫)가 전날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벽란도에 들렸다가 유성을 보게 되었다는 허월이 국사를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임시 처소에 들른 국사는 한참동안을 두 눈을 감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경보와 허월은 그 앞에 앉아서 국사가 먼저 입을 열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뜨고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던 국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천시를 엿보았다고 해서 남의 인생사에 관여하는 일은 반드시 금해야만 하는 일이거늘.......... 수많은 중생을 염려하자니 결국은 세상사라는 것이............”
말을 끝까지 다 맺지 못하던 국사는 연실 몇 번인가 한숨을 내쉬었다.
“경보야. 그래 종훈이가 그 견훤이 옆에 있더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용곡 사우가 찾아가 직접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 비장은 어떻게 하고 있다고 하더냐?”
“여전히 남해안에서 왜구를 막고 있사온데 종훈 사제가 견훤 비장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큰일을 하라 부추기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종훈이를 더 단단하게 붙잡아 매놓고 경보 너의 허드렛일이나 하게 만들어야만 했어.”
“애초부터 절밥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닌 것은 스승님께서 이미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다시 한 번 남쪽에 다녀와야만 하겠다.”
“남쪽이라 하시면........ 견훤에게 변화가 생긴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된다. 살펴보고 오너라.”
“준비하는 대로 떠나겠습니다.”
“서둘 일은 아니다. 찬찬히 살피고 다음 일정으로는 서라벌로 오너라.”
“스승님께서도 길을 나서시겠습니까?”
“남산에 올라 서라벌을 좀 살펴봐야만 하겠다.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여전히 초췌한 모습의 국사는 이번엔 시선을 돌려 초라한 모습의 허월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낀 것이겠지? 그래서 이리 찾아왔을 것이고.”
“벽란도에 들린 길에 큰스님께 문안이나 여쭈려 들렸습니다.”
“허허허. 허월. 자네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 노인이 다되어도 거짓말엔 여전히 서툴러. 얼굴에 다 표가 나는데............ 허허허허. 그래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선종스님 말씀이십니까? 산문을 뛰쳐나갔습니다. 보름 되었습니다,”
“흐흠. 결국 그렇게 되었군.”
“세달사에서 함께 하던 선승 열 명이 좀 넘게 뒤를 따라 나갔습니다.”
“그랬군........... 언젠가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운명......... 그래 어디로 갔는가?”
“월형산(월악산) 덕주사에 들어간 것을 보고 제가 벽란도로 왔습니다.”
“그랬군. 자네도 뒤따라가 좀 살펴보다가 서라벌로 오도록 하게.”
“선종 스님을 말씀이십니까? 참. 산문을 나서며 궁예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궁예라.......... 그를 만나서 내 당부를 좀 전해 주시게.”
“큰스님께서 일찍부터 선종스님을 지켜보셨다는 말씀이 사실이었군요?”
“자네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구먼?”
“숱한 소문으로만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선종....... 아니지. 이제 궁예라며? 궁예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이제 곧 알게 될 것이야.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그가 누구인지 소상하게 이야기 해줄 터이니, 자네가 그를 만나서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해주게.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이고........ 이젠 그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때가 된 것이야.............”
신라의 하대에 접어들면서 사방에서 왕조의 말기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치와 향락에 심취한 상류층무리에게는 국정이나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치는 문란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만 갔다.
그 와중에 궁성에서는 연일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왕족들 간에 끊임없이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왕위쟁탈전의 피바람이 연일 끊이지 않는 이면에는 삼한 중에서 유일하게 신라에만 지속되어온 골품제도에서 모든 것이 기인하고 있었다.
골품제도는 사람의 출생에서부터 이미 그 사람의 신분과 삶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결정되어지는 제도였다. 태어난 출신 성분에서부터 신분이 정해지고, 오를 수 있는 관직의 허용 범위가 구분되고, 의복에서 조차 색깔을 구분하여 신분의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게 하였다. 이 모든 제도의 속내는 왕족들이 왕의 자리와 중요한 관직과 그에 따른 부를 독차지해서 세습하며 영원히 누리기 위한 속내가 감추어져 있었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 있었으나 성골은 이미 오래전에 단절되었고, 궁궐 안에 있는 수많은 고위관료들은 모두가 진골들이었다. 17계급의 관등 중에서 관료로 출세할 수 있는 등급은 최고가 6두품이었다. 그 위의 관직은 모두 진골들 몫이었다. 그들은 이 같은 부와 명예를 대대로 세습하기 위하여 귀족들에게만 근친혼을 허락하였다. 남매가 혼인을 하였고, 조카가 이모를 데리고 살았다. 그런가 하면 숙부가 친조카를 왕비로 맞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자매를 모두 아내로 맞이하기도 하였다. 저희들끼리만 모든 것을 차지하면서 그런대로 오랜 세월을 그럭저럭 유지하며 내려 오기는 하였으나,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서 살아온 시절이 누적되면서 점차 부작용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국정은 문란해 졌으며 국방의 중요성마저도 뒷전으로 밀려나자 여기저기서 피폐해진 백성들의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고는 바닥을 들어 낸지 오래이며 왕권은 미약해 졌다. 그런 위기를 직시한 귀족들은 한편으로는 더욱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란을 두려워하여 저마다 사병을 늘리기에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나날이 지속되자 마침내 왕은 저마다 막강한 사병들을 거느리고 위세를 떨고 있는 귀족들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저렇게 혈연으로 얽혀있는 궁궐 안의 그 많은 귀족들이 모두 언제든 왕이 될 수 있는 왕족의 피를 나누어 가진 진골출신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왕의 자리는 지극히 존엄하지도, 특별하게 하늘이 점지해 내리지도 않은, 아무 때고 맘만 먹고 칼을 휘두르면 차지할 수도 있는 만만한 자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여 어느 때인가부터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저들끼리 골육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연일 그 같은 왕위쟁탈전이 끊이지를 않았다.
신라의 42대 임금인 흥덕왕(興德王. 826~836)이 죽자 서라벌의 궁성은 또다시 들썩거렸다.
죽은 흥덕왕의 동생인 균정과 원성왕(38대)의 손자인 헌정의 아들 제륭(원성왕의 증손자) 사이에 또다시 왕위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 쟁탈전은 시중인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의 지원을 받은 제륭이 승리하였으며 그가 곧 희강왕(836~838)이다. 이 싸움에서 상대였던 균정이 참혹하게 살해되었고 진압되면서 왕위쟁탈전은 끝을 맺었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참혹하게 살해되는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아버지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달아나야만 했던 아들 우징(祐徵)은 복수를 다짐하면서 청해진으로 달아났다. 당시 청해진에는 당나라와의 교역을 바탕으로 거대한 해상세력을 수립하고 있는 장보고(張保皐)가 있었다. 우징은 장보고를 만나 부패한 신라조정을 규탄하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예로 들면서 올곧은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자신의 개혁정책을 피력하면서 장보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쟁탈전에서 패하여 도망쳐온 처지로 한동안 장보고에게 의탁하면서 재기를 모색해보기 위함이었다. 장보고의 입장에서도 우징이 썩 내키지 않았던 것만도 아니었다. 패장이긴 하였어도 그래도 그는 여전히 서라벌 도성에 막강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진골이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왕위쟁탈전에서 자고나면 또 왕위가 바뀌는 세상이고 보니 아무도 앞으로의 일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우징을 청해진에 머물게 허락하고 한동안 서라벌의 동향을 더 지켜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강왕이 왕위에 올라 3년 째 되던 해에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서라벌의 궁성을 내습하였다. 궁지에 몰린 희강왕이 스스로 자결을 하였으니 반란은 일단 성공하였던 것이다. 또다시 벌어진 쟁탈전에서 승리한 김명(金明)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는 원성왕의 증손이며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로 바로 민애왕(閔哀王)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보며 김명의 등극에 불만을 품은 김양이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청해진으로 도망쳐 우징에게 김명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김우징은 분노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선 우징은 장보고를 찾아가 김명이 부당하게 왕위를 찬탈했음을 알리고, 자신이 김명을 징벌해야겠으니 군사력을 모아 자신을 도와달라고 강력하게 호소하였다.
우징의 청을 받은 장보고는 심각하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미 청해진을 거점으로 한 국가에 버금 갈만큼 막강한 해상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장보고였으나 그의 출신은 어디까지나 노비에서 출발한 미천한 해도인(海島人)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평상시 신분상승의 꿈을 꾸어 온 장보고였다.
적어도 우징의 싸움은 서라벌의 궁궐에서 벌어지고 있는 왕위쟁탈전이 아닌가. 우징을 도와 김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당연히 우징은 왕이 될 것이고, 그 다음은..........
장보고는 이것을 자신에게 있어서 신분상승의 기회이자, 청해진을 보다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으로 구축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었던 것이다.
우징과 장보고 사이에 서로에게 필요한 요청과 차후보장에 대해 여러 가지 약조가 맺어졌다. 둘은 천지신명께 제를 올리며 두 사람간의 약조를 맹세했다.
우징과 장보고는 청해진의 군사들을 이끌고 서라벌로 공격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싸움은 너무도 싱겁게 끝났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잘 훈련되고 사기가 충천한 청해진의 용맹한 군대를 상대하려고 나서는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숨에 서라벌 궁성까지 쳐들어간 우징은 장보고가 쳐다보는 자리에서 민애왕(김명)의 목을 베었다. 또다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고, 이번엔 청해진에서 근 3년여를 절치부심해온 우징이 승리하였으니 그가 바로 신무왕(神武王)이 되었다. 839년 음력 4월에 벌어진 일이었다.
신무왕이 된 우징은 왕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로 봉했다.
그런데, 같은 해 음력 7월 23일에 갑자기 신무왕이 사망했다. 왕위에 오른 지 불과 석 달 만에 갑자기 돌연사 한 것이다.
하여, 서둘러 태자 경응(慶膺)으로 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으니 그가 바로 문성왕(文聖王)이었다.
왕위에 오른 문성왕은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임명했다. 840년(문성왕 2)에는 김예징(金禮徵)을 상대등으로, 김의종(金義琮)을 시중으로, 김양순(金良順)을 이찬(伊湌)으로 삼았으며, 843년(문성왕 5)에는 김의종이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김양순을 시중으로 삼았고, 844년(문성왕 6)에는 자리에서 물러난 김양순을 대신해 대아찬(大阿湌) 김여(金茹)를 시중으로 임명했다. 이 해에 혈구진(穴口鎭, 지금의 강화도)을 설치하고, 아찬(阿湌) 계홍(啓弘)을 진두(鎭頭)로 임명했다. 847년(문성왕 9)에는 김여가 죽자 왕비의 아버지인 이찬 위흔을 시중으로 삼았고, 848년(문성왕 10)에는 위흔이 자리에서 물러나자 파진찬(波珍湌) 김계명(金啓明)을 시중으로 임명했다. 849년(문성왕 11)에는 김예징이 죽자 이찬 의정(義正)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이렇게 국정의 안정을 위해 갖은 노력하였으나, 문성왕의 재위 기간에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841년(문성왕 3)에는 일길찬(一吉湌) 홍필(弘弼)이 모반을 하다가 발각되자 섬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문성왕의 입장에서도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었으나 아직도 왕권이 완전하게 확립되지 못한 가시방석 같은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청해진의 장보고로부터 ‘선왕대로부터의 약조를 지켜 달라’는 청원서가 서라벌에 도착했다. 우징과 장보고 사이에 오고 간 여러 가지 약속이 우징의 아들인 문성왕에게 요구된 것이다. 그 약속중의 하나가 바로 우징의 아들인 경응(慶膺)과 장보고의 외동딸인 옥란(玉蘭)을 혼례 시키기로 약조하였던 것이다. 문성왕이 된 경응의 입장에서 결코 마다하고 싶지 않은 요구였다. 그는 선친과 장보고 사이의 약조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며, 근 3년여를 청해진에 머물면서 항상 지척에서 옥란을 지켜보았었기 때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성왕은 그 혼사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자 온 서라벌 조정이 나서서 이들의 혼례를 극구 만류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것은 분명하게 왕실의 혼사인데, 두 사람사이에 너무 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진골들의 명분일 뿐, 그들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청해진이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장보고의 군사력만도 다분히 위협적인데, 이제 그의 딸이 혼사를 치러 명실상부하게 왕의 장인이 되어 장보고가 청해진의 그 막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당당하게 서라벌에 자유롭게 입성하게 되는 것이 몹시 두려웠던 것이다. 장보고가 그 같은 신분상승의 명분까지 얻게 된다면 신라의 유사 이래 좀처럼 보기 드문 막강한 세력이 서라벌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신분과 파벌을 막론하고 똘똘 뭉쳐서 이번의 국혼을 적극 만류하였다. 그만큼 이제 장보고는 서라벌의 진골출신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공포였던 것이다.
난처해 진 것은 문성왕이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월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846년 청해진의 장보고가 서라벌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한 국가를 상대하고도 남을 청해진의 막강한 군사력이 이제 곧 서라벌을 향해 들이닥칠 판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던 문성왕은 무주 사람인 염장(閻長)을 보내 그를 살해해 버렸다. 너무도 허망한 결말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851년 문성왕은 장보고의 근거지였던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모두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으로 이주시켰다. 이제 청해진은 그 번성했던 영화를 어디에서도 찾아 볼 흔적조차도 남지 않고 역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너무도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것이다.
문성왕은 청해진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장보고도 지웠고 그의 딸 옥란도 지웠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치 않았음인가?
그 이후로 천재지변이 끊임없이 문성왕과 서라벌을 괴롭혔다.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가혹하리만치 심했으며, 그 여파로 농사가 되지 않아 겨울에 들어 기근이 무척이나 심했는가 하면, 느닷없이 금성에 전염병이 창궐했다. 신궁(神宮)의 정원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들어왔으며, 이듬해 음력 3월에는 금성에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이듬해에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고, 큰 나무가 뽑혀나갈 정도로 강한 태풍이 세 차례나 온 신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이듬해 음력 4월에 서리가 내렸으며, 여름에는 유사이래 최대의 홍수가 났고 가을에는 서남 지방에 메뚜기 떼가 창궐해 곡식에 큰 피해를 입었다.
852년, 문성왕이 즉위한지도 14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초여름이 다가도록 이른 봄부터 시작된 가혹한 가뭄은 멈출 줄을 몰랐다. 식수마저 말라붙는 상황이고 보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은 여전히 비를 내려 줄 낌새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문성왕은 자신이 직접 명산을 찾아 전지신명께 비를 내려주기를 비는 기우제를 지내기로 하였다. 비가 가장 잘 내리는 적기로 7월7석에 맞춰 남악산(南岳山)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몸소 먼 거리를 출타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남악산이 오래전부터 영험한 신성한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매년 반복되는 가혹한 가뭄이 유독 심한 서남지역의 백성을 위로하고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혹시나 하고 왕권의 취약함을 염려한 문성왕은 이만에 이르는 정규군을 데리고 서라벌의 모든 고위 관료와 가족들을 인질로 대동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하였으니 당연히 이들의 행로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마지못해 끌려가는 관료와 가족들의 불만은 커져가고 행로의 인근에 사는 백성들은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더는 어찌할 수 없어서 다소 무리수임을 감수하고 궁궐을 비우면서까지 기우제를 지내려 출타한 임금의 염원을 하늘이 알아차렸음인지 왕의 행렬이 남원(南原)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왕과 행렬은 서둘러 남원의 관아를 임시 행궁으로 삼고 몰려 들어갔다. 모처럼 쏟아지기 시작한 비는 사흘이 지나도록 좀체 그칠 기미를 보이지지 않았다. 그제까지 그토록 괴롭히던 가뭄이 해갈되었음을 기뻐하기도 전에 이번엔 넘쳐나는 홍수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남원의 관사 안에 임시 조정이 들어섰고 온 나라의 치수에 대하여 논의가 오고 갔다. 안건이 의결되고 왕의 수락이 떨어지면 쏟아지는 비를 뚫고 관리들이 말을 달려 나갔다. 파견되어 달려 나가는 관리들의 행렬 또한 날이 저물 때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정도의 비가 계속된다면 대제지(大堤池) 세 곳의 제방도 사람을 파견하여 살피고, 허술한 곳은 미리 보완을 하라 사람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전하께 주청 드려서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사람을 파견하시지요?”
대제지라면 삼한시대에부터 치수를 위하여 사람의 손으로 직접 만든 세 곳의 저수지를 말함이었다. 바로 내제(제천)의 의림지와 밀성(밀양)의 수산제, 그리고 김제의 벽골제을 일컬음이었다. 신하들은 곧바로 주청을 드렸고 왕은 재가를 했다. 그리고 밖으로 쏟아지는 빗속으로 어둠이 내려 깔리자 조정회의는 끝이 나고 왕은 임시로 설치된 내전으로 들었다.
밤은 깊어만 갔건만 귓전 가득 울리는 요란한 빗소리로 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람을 시켜 간단한 주안상을 들여오도록 했다.
서너 잔을 마시고 나니 알싸하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왕은 창가로 가서 살며시 창문을 열고는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쏟아지는 빗줄기 속으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새삼 부정하듯 머리를 가로저으며 지워보려 애썼으나 그럴수록 그 모습은 점점 선명하게만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어쩌면 이미 죽었을 지도 몰라.’
‘분을 참지 못해 벌써 자살을 하였을 거야. 성정이 보통이 아니었잖아...........’
‘그렇게 버려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니 아니야. 이제 와서 새삼스레...........’
‘벽골제. 벽골제라...........’
그렇게 왕이 빗줄기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전하. 왕후마마 듭시옵니다.”
화려한 차림새의 왕후(炤明王后)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침울하였고, 왕후 특유의 표독스러움이 느껴지는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슬쩍 비웃는 듯 슬쩍 비뚤어진 입매는 여전하였다.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지체하실 것입니까?”
“그러게요? 날씨가 이러하니 가라앉을 때까지 좀 더 기다려야만 하겠지요.”
“지저분하고 불편해서 더는 못 참겠습니다. 서둘러 환궁하시지요?”
“모두가 불편하겠지요. 하지만 아무렴 밖에서 번(보초)을 서며 수발을 드는 군사들이나 변변한 집 한 채 없는 백성들에 비하리요?”
“그러기에 뭐 하러 기우제랍시고 기어코 이 먼 곳까지 나와야 했는지 제가 한사코 만류하지 않았습니까? 제 친정 식구들까지 죄 다 끌고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부득불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디까지나 소심한 판단이셨습니다. 온 조정 관리의 가솔들이 모두 끌려 왔습니다.”
“피치 못할 권력의 역학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지나친 기우시라니까요? 내일 중에 돌아가렵니다.”
“이런 빗속에는 운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가야겠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친정 식구들을 데리고 출발할 것이니 그렇게 아시고 계세요. 궁궐은 제가 돌아가 지킬 것이니 온 나라를 다 돌아보시고 나서 오시고 싶은 마음이 생기시걸랑 그때 돌아오셔요.”
한 나라의 왕을 대하는 태도가 마치 아랫것을 대하듯 하고, 제 할 말을 다하고 나자 그대로 횡 하니 돌아서서 매몰차게 나가버리는 여인이 바로 이 나라의 왕후였던 것이다. 싸늘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가득 담은 알싸한 허전함이 왕의 폐부를 뚫고 지나가고 있었다.
선친인 우징을 신무왕으로 옹립하는데 장보고와 더불어 큰 공을 세운 김양(金陽. 자가 위흔)의 딸이 바로 왕후였던 것이다. 승승장구하여 시중을 거친 김양은 여전히 서라벌에서 살아있는 권력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난날 장보고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이는데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자들도 바로 이들의 세력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이다.
처음 왕은 김양의 딸과 혼인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발랄함에 청초함마저 갖춘 장보고의 딸에 비하면 김양의 딸은 흔하다 싶을 만큼 너무도 평범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천상의 아름다움도 본시 태어난 핏줄과 복권된 권력의 위세를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여 왕은 김양의 딸과 결혼하였다. 왕후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함께 지내다 보니 없던 정도 생겨났음인지 마침내 둘 사이에 아들을 낳아 태자로 봉하였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게 태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년 정초에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태자의 죽음 이후로 왕후는 무섭게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매사에 불만이 가득하고 그저 짜증스럽기만 한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참고 있던 서러움이 다시 북받친 왕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왕의 자리라는 것이 겨우 이것인가 싶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닷가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스스럼없이 대해주던 마치 선머슴 같았던 계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벌써 14년의 세월이 지난 옛 모습이었다.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자랐을까? 내가 너무 무심했어. 행복하게 살도록 해주었어야 했는데......’
‘옥란아............’
자정이 지나도록 왕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시고 또 마셔도 정신은 점점 맑아질 뿐이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술이 떨어졌다. 더 내오도록 해라.”
“전하. 밤이 깊었고 이미 전하께선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놈. 임금에게 취하다니......... 허허허허.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를 않는구나. 이젠 혼자만 마시는 것도 지겹고.......... 승평(氶坪)이........ 승평이는 어디 있느냐? 승평이를 찾아서 들라 이르고 당장 새로 주안상을 내오도록 하여라. 내 승평이와 한 잔 해야만 하겠다. 알겠느냐? 서둘러라.”
그 시간 중사(中使) 최승평(崔氶坪)은 남원 관아의 헛간을 빌어 사정부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관직 13등급의 나마 배수경(裵水瓊)과 함께 차를 나누고 있었다.
“승평아. 어서 마셔라. 밤이 되니 쌀쌀하구나. 이런 상황에선 힘들게 구해온 차야. 향이 그만이지? 따듯할 때 어서 마셔라.”
“아우를 못된 자리로 내쫓고 형님은 그냥 사정부에 들어앉아 상시 이렇게 향이 좋은 차를 혼자만 즐기시니 그게 어디 형제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놈이 이제 보니 아예 못된 웅심을 가슴속에 심고 있는 것을 몰랐네? 앞으로 각별히 조심해야겠어. 뭐 사정부에 그냥 남아있다고 이렇게 향이 좋은 차를 아무 때고 쉽게 접하는 줄 아느냐? 내 그것도 모르고 동생이 올 줄을 알고 아주 조금 어렵게 구한 것이야. 거기다 내가 동생을 내쫓았다니? 전하께서 사정부에 들르시던 날에 우리형제를 지켜보시다가 불쑥 둘 중에 하나를 중사(中使)로 쓰고 싶다고 하셨던 것이지?”
“형이 나를 떠밀었잖아요?”
“그게 어떻게 떠 밀은 것이냐? 전하께서 덧붙이시는 말씀이 날렵하고 발 빠르면 더 좋겠다고 하시기에 네가 더 남자답다고 말씀 드린 것뿐이지.”
“눈치 빠르게 발뺌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언제 남자답다고 했습니까? 말도 잘 타고 사냥도 잘하고 거기에 싸움질도 잘한다고 보태셨지”
“어허. 이놈이......... 쌈질이라니? 내가 서생인 반면에 동생은 무예까지 익혀 문무에 두루 능하다고 했지..........”
“갖다가 붙이시기는......... 형님이 고자질만 안했어도 지금 형제가 이렇게 사정부에 나란히 앉아서 오순도순 정담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을......... 허구한 날 전하 주위에서 서성대며 보초나 서게 만드시다니.......... 오래오래 형님을 원망 할 것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전하께 가서 고하여 주시게. 내가 중사로 갈 터이니 아우가 사정부로 다시 오면 될 것이 아닌가? 지금 함께 가서 고하기로 하세.”
“끝내 형님이 정말? 자정이 넘어도 한참 넘었는데 지금 전하를 깨우기라도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억울하다 우기니까 그러는 것이 아닌가?”
“우와?”
그때 밖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중사께서 이곳에 계시옵니까? 전언이 있사옵니다.”
“제가 중사 최승평(崔氶坪)입니다. 어디에서 오는 전언인지요?”
“내전에 좀 전에 주안상을 들였습니다. 전하께서 중사 나리를 찾아오시라고, 두 분이서 술잔을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서두르시지요?”
“전하께서 주안상을 들이시고 저를 찾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 시간에요?”
“속히 저를 따르시지요?”
미처 놀라할 사이도 없이 승평이 궁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 그의 등 뒤로 수경의 일침이 날라 왔다.
“이거야 말로 괘씸한 동생이 아닌가? 겨우 차 한 잔을 가지고 호사를 누린다고 형에게 갖은 구박을 늘어놓더니 저는 전하의 주안상을 받는다고 형을 개보듯 내팽개치고 죽어라 쫓아가다니..........”
최승평과 배수경은 실제 너무도 가까운 친형제나 다를 바 없는 사이였다. 승평의 아비는 신라의 무장으로 왕위쟁탈전에 뒤따른 보복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하여 고아가 된 그를 평소 승평아비와 각별하게 정을 나누던 수경의 부친이 승평을 받아들여 아들처럼 키워주었던 것이다. 수경도 승평을 친동생처럼 아꼈고 수경의 여동생 소향(少香)도 친오빠인 수경보다 오히려 승평을 더 따르고 아꼈다. 당시 사정부의 중간 수장이던 수경의 아비는 청해진을 감찰하라는 왕명으로 떠나면서 갓 관직에 나선 수경과 동행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승평으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주기 위하여 함께 데리고 청해진으로 향했으며, 그곳엔 이미 왕위쟁탈전에서 패해 도망쳐온 우징과 그의 아들이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전하. 승평 대령하였사옵니다.”
“오. 승평이가 왔는가? 어서 들어오너라. 어서.”
“전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날이 새면 조정회의와 처리하셔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잠이 오지 않는구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이리 가까이 다가오너라. 내 잔을 받아라. 어서?”
“말씀 못하실 고충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하오시면 잠시 국정을 물리시고 심신을...........”
“승평아.”
“네. 전하.”
“우리가 만난 지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 자네랑 수경이가 청해진으로 찾아오던 날 만났으니까.”
“그렇사옵니다. 청해진을 감찰하러 나가신 양부와 형을 따라나선 길이었는데 그때........ 전하께서 그곳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십 오년 전의 일이옵니다.”
“그랬지. 허허허. 내가 청해진에 의탁하고 있을 때였지. 그때 수경이 사지(舍知)의 벼슬이었지 아마? 관리로 첫걸음을 사정부에 내딛고 첫 업무로 청해진을 따라온 것이었지. 갓 스물이 넘겼었던가?”
“형은 그때 만 스물이었고....... 소신이 열다섯이었습니다.”
“그래. 그래. 그러다가 기어코 그 어렸던 너도 사정부에 들어가 관리가 되었지. 그래 너는 기억하느냐? 지금에야 왕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범인이었으니 나를 잘 따르던 너희를 청해진에 머무르는 동안 내가 친동생들처럼 여겼고 또 실제 그렇게 부르라 하였던 일들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사옵니까? 그때 일들을..........”
“그래. 그래. 이제 사 돌아보자니 그토록 즐겁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던 것을.............”
왕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은 연거푸 두 잔을 더 들이마셨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았다.
왕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날들을 회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승평의 눈에도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창밖으로 몰아치는 빗소리는 여전한데, 무거운 침묵에 짓눌린 시간은 그런대로 또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지나서였을까?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듯 낮은 목소리로 힘없는 왕의 목소리가 느릿느릿 흘러나왔다.
“저녁나절에 혹여 이 비로 제방이 무너질까봐 대제지 세 곳에 서둘러 관리를 파견하였다. 의림지에도 보냈고....... 수산제에도 보냈고........ 벽골제에도 보냈지........... 벽골제에도..........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벽골제.......... 벽골제가 말이다................”
그 순간 승평은 알게 되었다.
왜 왕이 잠을 못 이루고 폭음을 하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가슴이 콱 막혀왔다.
------- 다음으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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