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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안 보충자료 VI.
현지 문화 적응과 한국인의 인성
Cultural Accommodation and Korean Personality
(2006년 2월, 세계한인선교사회 방콕 지도력개발회의에서 발제)
들어가는 말
필자에게 주어진 주제는 “현지 문화 적응과 한국인의 인성”인데, 이 주제는 두 개의 독립된 인류학적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타문화권 적응이라고 하는 주제는 문화가 무엇이며 문화의 구조는 어떠한가, 그리고 문화적 환경이 바뀔 때에 일어나는 사람들의 마음의 현상들은 어떠한가 하는, 소위 인지 문화인류학(cognitive anthropology)적 통찰력을 요하는 반면, 한국인의 인성에 관한 주제는 “문화와 인성 (culture and personality)”이라고 하는, 서구에서 20세기 중반에 한창 관심을 가졌던 문화인류학계의 관심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1] 이 두 영역을 연관지어 한국인 선교사의 타문화권 적응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하고자하는 것이 주최측의 의도라고 이해가 되어, 필자는 이 두 영역을 한인 선교사의 문화적응이라고 하는 테마에 나름대로 연결지어 한인 선교사의 문화적응의 장단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관련 영역들의 방대함과 시간의 제약으로 인하여 구체적인 민속학지적 조사(ethnographic research)는 가능하지 않기에, 다만 일반론적인 논의를 통하여 본 주제에 관한 통찰력을 가져보고자 한다.
문화(culture), 세계관(worldview), 동질문화화(enculturation), 그리고 인성 (personality)
선교사가 자신의 고향 문화와 다른 선교지에서 주님의 명령을 좇아 현지의 사람들을 진정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culture)라고 하는 실재(reality)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한 사회(society)가 주변의 자연적 환경(natural environments)과 사회적 환경(social environments), 그리고 초자연적 환경(supernatural environments)에 적응하면서 그 사회 구성원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하여 살아온 삶의 모든 결과들을 가리킨다. 즉, 문화는 그 사회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누적되어 온 세상과 우주에 대한 모든 문화적 지식 (cultural knowledge) 및 그 지식에 바탕을 둔 삶의 모든 표현들과 양식들을 포함한다.[2]
여기서 중요한 내용은 “문화적 지식”이다. 문화적 지식이라 함은 어느 한 동질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앎”의 내용들로서, 세상을 이해하는 그 사회의 시각(perspective)을 보여준다.[3] 이러한 문화적 지식은 인류학자들에 따라서는 “세계관 (worldview)”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4] 그러므로 문화를 이해한다 함은 결국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문화적 지식과 그들의 세계관의 구조를 이해함을 뜻한다. 즉, 세계관의 심층구조 안의 내용들이 되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식(이 경우, 영어로는 “assumption”) 및 가치들(values), 그리고 그들이 열심으로 충성하는 대상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복합되어 형성된 그 사회 안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정서(ethos)를 이해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문화권 안의 사람들의 의미체계 (cultural meaning system)를 파악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의미체계 혹은 세계관의 기본 구조는 소위 “동질문화화 (enculturation) 과정”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최초기 단계에서 형성되는데, 이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그 사회의 구성원의 인성(personality) 역시 형성되게 된다. 이 동질문화화 과정이 일어나는 시기를 대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춘기로 접어들기 전까지(0세에서 약 13세까지)로 보는데, 전통교육 과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과정을 통하여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하여 성장한 사회(고향)의 문화적 지식과 가치 체계를 익히게 되고, 어떠한 감정을 어떻게 가지며 어떻게 표현하는가를 배우며, 그의 인식구조와 정서는 그 사회의 어른 구성원들을 닮게 된다. 즉, 그 개인의 문화권의 세계관 형성은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지며, 이 세계관의 구조는 그 개인 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인성의 공통분모가 된다. 따라서, 어느 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보편적인 인성을 이해하는 데에 주요한 열쇠가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 문화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배우고 습득한 지식과 삶의 방식이 그 사회의 문화적 세계관의 내용이 되기 때문에, 세계관의 내용들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의심하지 않고, 또 증명해야 될 필요도 느끼지 않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지식들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화적 지식, 혹은 세계관의 내용들은 나아가서 “문화적 믿음 (cultural belief)”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습득된 문화적 지식들은 성인이 되어서 얻게 된 종교적 믿음보다도 대부분 심리적으로 더 강하게 작용되기 때문에 그것은 문화적 지식 이상의 신념이며 믿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5]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자신의 문화적 지식과 다른 세계관을 만나게 되면 소위 말하는 “문화충격 (culture shock)”을 경험하게 된다.
선교사들의 문화충격과 문화적응
이러한 문화의 개념과 세계관 형성의 과정을 이해할 때에, 우리는 선교사들이 타문화권에서 겪는 문화충격과 이에 따른 여러가지 애로사항 및 그 원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종종 타문화권 선교사들의 임기 초년에서 문화충격의 증상이 다른이들보다 더 뚜렷이 나타나는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사명의식 내지 목적의식에는 충실한 반면, 다른 문화권에서 겪을 수 있는 문화적 스트레스의 힘에 대해서는 무지하거나 그것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앙적인 자세를 잃지 않기 위하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새로운 환경들이나 사람들을 인내하고자 노력하는 선교사들에게 문화충격은 심한 경우에는 병리학적 증세로 나타나는 것도 볼 수 있다.[6]
혹자들은 문화충격이라는 것이 비신앙적이라고 오해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매우 자연스런 문화적응의 초기단계일 뿐이다.[7] 신앙으로 문화의 다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다고 무조건 스트레스를 부인하거나, 또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문화충격을 오히려 더 악화시킬 수 있다. 문화충격이라 함은 신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잘 다루지 않으면 신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간의 심리적 혹은 생리학적인 반작용으로서, 이 말 자체가 인류학 및 심리학에서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문용어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선교사가 사역하는 타문화권에서 정신적 스트레스를 덜 받고 효과적으로 사역하기 위해서는 우선 모든 사람이 자민족중심주의적 (ethnocentric)인 성향을 갖고 있으며 그러기에 인간이란 다른 문화권에서 스트레스를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연약한 문화적 존재임을 겸허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감기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듯이,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가치관과, 다른 언어, 다른 풍속 가운데 살아야 하는 선교사 가운데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문화충격은 비단 선교사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선교를 받는 현지의 사람들 역시 문화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이민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이 만나서 삶의 거리를 좁혀 갈 때에, 자신들의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에서 습득된 가치들이 새롭게 만난 타문화권의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하면서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 적응이라 함은 문화충격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 본인의 세계관 내용을 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화적응 과정은 매우 기술적인 영역인데, 본고에서는 한국인의 인성이 문화적응에 있어서 어떠한 장단점을 갖고 있는가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우선 다음 항에서는 한국인의 인성 이해에 대한 논의를 개진해 본다.
한국인의 인성과 그 특질
일반적으로 인성의 형성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동질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8]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에 의하면, 인성의 형성은 세계관 형성의 가장 기초가 되는 관계개념(relationship concept)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보인다. 어린 아기는 태어나서 자기(Self) 인식과 타자(Other)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자신과 타인들을 구분하고, 성장하면서 어떻게 그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배우게 된다. 이렇게 형성되는 관계개념은 사실상 매우 복잡한 구조와 내용을 갖는다. 이 개념 안에는 문화적으로 인식된 심상(images)과 앎(assumptions), 그리고 이로 인하여 형성된 공동체적 인격 내지는 인성(personality), 혹은 정서(ethos), 그리고 구체적인 감정(emotion)들이 포함된다.[9] 이러한 동질문화화 과정에서 타자, 곧 자기 외의 사람들과 자기 밖의 세계에 대한 인식 및 관계개념을 갖게 되면서, 인성의 특질들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성에 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들을 살펴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즉, 동질문화화 과정은 기본적으로 친족구조(kinship structure) 내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므로, 동질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인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친족 구조와 내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Hsu에 의하면 사회의 기본단위가 되는 핵가족은 예외 없이 여덟 개의 기본적인 친족짝(kinship dyad)을 갖게 된다.[10] 즉, 부부, 부자, 모자, 모녀, 부녀, 자매, 형제, 남매 관계의 여덟의 기본 짝을 말한다. Hsu는 이러한 여덟 개의 짝 가운데서 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짝이 무엇인가에 따라 네 개의 친족 유형이 구분된다고 하였다.[11] 그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친족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의존적인 유형”에 속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다른 짝 관계들보다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이다. Hsu의 이러한 사회유형 분류에 따라서 한국 사회, 특별히 전통적인 한국 사회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발견된다.[12]
1. 첫째, 이러한 사회는 가부장적인 친족제도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 관계는 우선 가문의 남자어른 및 가족 내의 남자어른을 중심으로 시작된다.[13] 모든 가옥 구조 및 사회의 주요한 정치, 경제, 교육, 기타 사회관계들은 “(남자)어른”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아들이 중요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모든 아들이 아버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의 관계는 그 사회를 버텨주는 축과도 같다. 아버지는 아들, 특별히 맏아들에게 가족의 책임을 물려주며, 따라서 가족 혹은 가문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준어른으로 보고 요구하는 것이 많다.[14]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요구하지만 아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물려준다. 그러므로 Hsu는 이러한 관계를 일방적인 수직적 관계로 보기보다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았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의존적으로 되며 아들들은 아버지(그리고 어머니 역시)의 노후를 책임지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이렇게 수직적으로 보이지만 상호의존적인 구조를 갖는 사회에서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를 갖지만, 리더의 권위를 제한하는 요소들이 부부 짝 우선의 서구사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리더는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권위주의적인 입장에 쉽게 빠지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번째 특질에서 좀더 다루기로 한다.
2. 이러한 사회는 사회의 결속력과 관계적 책임을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애정을 될 수 있는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덕목이 책임감을 느슨하게 할 수 있다는 문화적 믿음, 혹은 인성의 내용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책임이 주어지지 않은 자녀들, 예를 들면, 막내 아들이나 막내 딸에게는, 책임을 지고 있는 맏이들과는 달리, 쉽게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애정의 감정을 쉽게 표출하지 않는 것이, 부부 짝 중심의 사회에서 온 서구인들의 눈에는 애정 결핍 혹은 권위주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 보면 남성어른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의 결속력과 이를 지키고자 하는 남성들의 책임의식이 세계관의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3.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조직은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이끌어주기를 원하며, 본인도 그 리더십에 언젠가는 혼자 서기를 원한다. 부부 짝을 다른 어떤 짝들보다 위에 두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에서는 책임을 분할하여 분담하지만, 본 유형에 속하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리더십에게 대부분의 책임을 전가하고, 리더와 추종자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사실 상, Hsu가 지적한대로 친족구조의 투사이므로 (Hsu 1972:520), 사회의 구조나 관계개념은 친족의 결속이라고 하는 개념의 연장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리더의 권위는 생각보다 그렇게 절대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 이유는 부부짝 중심의 서구 사회에서는 리더가 독립적이며 자기 개인의 리더십에 오직 자신만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지만, 상호의존적 유형의 동양 사회에서는-대표적으로 한국과 중국—리더의 리더십 내용은 친족의 간섭과 직간접적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4. 이러한 사회는 과거지향적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성구가 말해주듯이, 과거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기타 문화적 유산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 사회는 일반적으로 친족의 확대이기 때문에 민족 개념이 강하고 과거의 의미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보수적이며, 변화에 그렇게 민감하기보다는 신중한 편이다. 새로운 것들을 만나게 되면, 그 용도 면에서 쉽게 수용하기보다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의미체계에 근거하여 재해석하고 내면화하는 경향이 강하다.
5.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에서의 리더는 진취적이기보다는 현상을 유지하고 이미 기존의 성취된 것들을 지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15] 기존의 가치나 신념을 바꾸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욱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추진하지만 친족들이 갖고 있는 기존 개념을 거스르지 않고자 하는 보수주의적인 성향을 일반적으로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리더는 이끌어 나가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경우에는 사실상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깊이 의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사회는 상호의존성이 강하고, 혼자서 무엇을 결정하지 않는다. 리더 역시 혼자만의 독립적인 판단에 의해서 결정하기보다는 “친족의 눈”을 의식하여 일들을 결정하고,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친족”의 지지를 기대하게 된다.
6. 끝으로, 이러한 유형의 사회들은—대부분 동양에서도 특별히 중국, 일본, 한국 등에서 쉽게 발견되는데—종교면에 있어서 샤머니즘이 발달되어 있다. 샤머니즘이라 함은 그 세계관 측면에서 간략히 언급하자면, 이 땅의 일들을 영들의 세계에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는 관점을 가리킨다.[16] 그러나 샤머니즘의 관심은 저 하늘이 아니다. 샤머니즘은 이 땅에서의 현실적 삶에 집착한다. 비록 조상신을 숭배하고 여러 신들을 숭배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의 안전과 복락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 기저 속에는 이 땅에 대한 깊은 집착들이 세계관의 내용으로 깔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 선교사의 문화적응과 그 장단점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 성장한 한국 선교사의 인성은 타문화권 문화적응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볼 때에 다음과 같은 장단점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말하는 “장단점”의 기준은 물론 기독교 복음주의적인 선교학과 선교적 문화인류학적인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 단점은 바람직하지 못한 한국 선교사의 문화적 인성 부분이고, 장점은 한국 선교사들이 다른 문화권에서 온 선교사들과 비교해 볼 때에 우수하게 드러나는 인성 부분들이다. 단점들은 물론 우리가 겸손하고도 진지하게 검토하여 수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고, 장점 부분들은 더욱 발전시켜서 한국 선교사의 좋은 특질이라는 전통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본항에서는 먼저 단점 부분들부터 언급하고자 한다.
1. 가부장적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경험된 친밀감과 사회결속력은 오히려 배타적인 성향을 보여줄 때가 많다. 자민족중심적(ethnocentric) 경향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만, 특별히 위에서 언급한 가부장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인 유형의 사회에서 온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더욱 발견될 수 있다. 이들의 어려운 점은, 본인의 친족 관계의 개념들을 그대로 사역지 사회에 투사함으로써 자민족중심적인 문화해석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역지 사회의 친족관계와 그 관계의 종류 및 내용들을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선교사는 자신의 몸속에 피같이 흐르고 있는 자신의 관계개념과 문화적 의미들을 사용함으로써 현지의 사람들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판단하기 쉽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실재이해(realism)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을 경우에 자신의 관계개념으로써 현지인들의 그것을 평가하고 어떤 결론을 내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2.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 온 선교사들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그 리더십이 중앙집권적이며 또 자기를 따르는 이들로부터 지원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만일 자신의 기대치만큼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친족관계를 통하여 리더십을 강화하고자 하는 고향의 문화처럼, 선교지에서도 친족을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거나 세움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중앙집권적인 리더십을 확보하고, 본국 문화에서처럼 “가상의 친족구조(virtual kinship structure)”를 형성하여 일들을 추진하게 된다.[17] 이러한 상호의존적이며 중앙집권적인 리더십은 때때로 정의롭고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3. 부자 짝 중심 사회에서 온 선교사들에게서 또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성향은 리더십이 남성 중심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고향에서 동질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의 내용들 가운데, 남성과 여성에 대한 개념 혹은 전제(assumption), 그리고 그 역할들에 대한 이해와 이미지들을 살펴보면, 부부짝 중심 사회의 그것들과 상당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부자 짝 중심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들의 리더십과 외부 활동이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녀가 그 존재 가치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믿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이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에 대한 문화적 믿음과 충돌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의 충돌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채 현장에서 갈등구조로 나타날 확율이 높다.
4. 본 유형의 사회에서 온 선교사들은 일의 추진력은 있지만 새로운 개념과 변혁적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가상의 친족구조가 형성될 경우 왠만해서는 변화를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인이 추구하는 아이디어와 선교지의 문화적인 개념들이 상치하거나 충돌할 경우, 선교사는 쉽게 좌절하거나 혹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가상의 친족구조를 활용하여 본인의 아이디어를 관철시키고자 노력하기도 한다.
5. 이러한 리더십은 또한 리더 개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갖고 있기 때문에 타문화권에서 미처 “책임” 개념에 대한 현지인들과의 상호이해가 형성되기도 전에 탈진할 수도 있다. 또한 애정 표현이 수줍은 문화권에서 왔기 때문에 격려하는 것이 인색하게 보일 수도 있으며, 그리하여 리더십에 대한 현지의 시각이나 해석이 선교사 본인이 의도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가 있다.
6. 이러한 리더십은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자신의 사역을 나누기보다는 수직적으로 시혜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기대하듯이 사역을 물려받은 현지의 제자들이나 동역자들로부터 본국적인 충성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현지의 친족관계가 부자 짝 중심이 아니라 형제 짝이나(아프리카에서처럼) 혹은 부부 짝(서구 사회에서처럼) 중심이라면 선교사는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며, 때로는 선교사의 의도가 곡해될 수 있다.
7. 이러한 친족공통체 내에서의 상호의존적인 사회 유형을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한국 사회는 최근 들어 많은 변화를 경험하였고, 그리하여 전통적인 세계관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근현대 한국사회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경제성장에 매진한 결과, 현대화를 가속하였고, 따라서 전통적인 사고에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사회의 결속력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우선되었고, 대가족적 구조보다는 핵가족의 구조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기심이 더욱 조장되었고, 서구 사회에서 보이는 물질만능주의와 개인 및 집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쟁심리의 극심한 발달로 인하여 쉽게 그리고 빨리 성취하고자 하는 조급함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의 변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가부장적인 친족구조와 그 개념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통적인 친족개념이 사회 전체에 확대되고 투사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해 보인다. 예를 들면, 유교적인 전통에서 온 신분차별의 개념이 그대로 한국인의 세계관 속에 존속하면서, 신분의 상승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수단이 현대 물질주의로 대치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극복”을 위한 열심, “조급”한 심성, “성취”를 통한 신분의 상승 등의 인성 특질들은 한국인 선교사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부분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들이 자신의 무의식 부분들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적 사회의 인성 유형은 선교 사역에 유리하게 작용되는 요소들도 많이 갖고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부자 중심의 친족구조에 속한 구성원들은 일반적으로 책임감과 소속감이 강하다. 배타적이며 애정표현이 부족한 반면에 맡겨진 일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충성하는 경향이 있다. 특별히 애정표현이 부족한 문화권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조금만 격려를 받아도 자신이 하는 일들에 대한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2. 중앙집권적인 리더십 유형은 대부분의 비서구 사회에서는 호소력이 강하며 일의 추진력이 높다. 다만, 선교사가 리더십을 독차지하기보다는 적당한 시기에 적절하게 현지의 리더들과 나누게 될 때에, 그리고 선교사의 리더십을 통하여 리더십 독점과 부패의 가능성을 줄여줄 때에, 선교사의 강력한 리더십은 오히려 서구 선교사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모델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인다. 서구 선교사들의 리더십을 그동안 관찰해보면, 수직적 이양 혹은 종속적 참여의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를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이 리더십을 독점하다가 완전히 이양해준다든지,[18] 아니면 이러한 폐단에 대한 반작용으로, 현지 리더십에 진정으로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으로만 종속되어 일한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면서도 현지의 리더십과 공존하는 친족개념을 갖고 친밀하게 리더십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3. 과거지향적인 성향은 한국 선교사들이 대부분의 비서구 사회의 현지문화를 이해하고 적응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러한 성향은 한인 선교사가 현지 사회의 전통과 가치를 존중해주고, 선교사 본국의 문화적 가치를 함께 나눔으로써, 선교사만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도 선교사의 문화를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4. 한국 선교사들은 비록 서구적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인성 면에서 종교성을 이미 많이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많은 비서구 사회의 종교성과 그들의 우주관을 이해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심성 면에서도 서구인들과는 달리 쉽게 감정이입이 되며, 현지인들의 희노애락에 빨리 동참할 수 있다. 특별히, 친족구조가 친밀하며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가상적 친족구조가 현지인들과 형성될 경우, 그들의 문화 속에, 그리고 그들의 감성 속에 별 저항 없이 깊이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보인다.
나가는 말: 우리의 계속되는 과제
1. 문화인류학적인 인간 이해의 요청:
선교가 복음 안에서 타문화권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과 사역이라면, 사람을 사랑한다 함은 그를 이해함에서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때때로 우리는 매우 강력한 신학을 갖고 복음에 대한 큰 확신과 신념으로 다른 문화권으로 가지만, 우리의 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함으로 인하여 선교사 자신이 먼저 탈진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탈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현지인들의 삶의 방식과 숨겨진 문화적 의미체계 등에 대한 정확한 파악이 없음으로 인하여 엉뚱한 반응이나 기대치 않았던 결과들을 봄으로써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선교사의 문화적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타문화권에서의 사역하는 선교사는 문화적응 차원에서는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즉, 타문화권 선교사는 자신의 문화와 현지의 문화를 포함하여 문화라고 하는 실재를 분석하고 이해할 줄 아는 심오한 전문성을 가진 전문가라는 것이다. 축구장에서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축구 경기의 규칙을 이해하는 사람들뿐이다. 어떤 다른 문화권에서 효과적으로 문화적응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문화권에서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누리고자 한다면, 그 문화의 표층구조 저변에서 사람들의 삶의 사고와 행위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 문화의 숨겨진 규칙을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2. 리서치를 통한 실제적인 인간 이해
그러나 문화 이해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전문적인 훈련을 요한다. Eugine Nida는 그의 Customs and Cultures: Anthroplogy for Christian Missions의 첫서두에서 “좋은 선교사들은 항상 좋은 문화인류학자였다”라는 진술로 그의 책을 시작한다.[19] 내부인들의 문화와 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위 emic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민속학지적(ethonographic) 현장조사의 기술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필자는 훈련받은대로 현장조사를 통하여 스와힐리 무슬림들의 세계관과 그들의 심성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현장연구의 과정은 가히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필자는 이 어려운 과정들을 통하여 현지인들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도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을 향한 선교적 애정은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현장문화조사 과정을 통하여 현지인들과 깊은 심리적 접착(psychological bonding)을 경험함으로써,[20] 이전 첫 임기 때에 경험하였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화적응의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선교문화인류학자들이 추천하듯이 필자 역시 선교사의 문화적응 과정으로서 문화인류학의 민속학지 연구(ethnography, 혹은 현장문화연구)를 강력하게 추천하고자 한다. 이 민속학지 연구는 피선교지의 문화만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 본인의 문화도 객관적으로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문화충격이나 문화적 스트레스에 대한 내용과 대응방식을 선교사가 미리 예견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
[1] “문화와 인성 (Culture and Personality)”은 문화인류학 가운데서도 오늘날 가장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심리인류학 (Psychological Anthropology)의 주요한 주제였었다. 문화와 인성이라는 주제가 특별히 미국의 인류학계에서 크게 각광을 받은 것은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였다. Ruth Benedict 여사의 Patters of Culture(1934)와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Patters of Japanese(1946),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Margaret Mead 여사의 Sex and Temperament in Three Primitive Societies(1935) 등의 작품들은 문화와 인성이라는 주제를 부상시킨 걸작들이다. 특히 Benedict의 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는 (“국화와 칼”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음) 조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함에 있어서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이해하도록 조력한 애국적인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몰론 후에 다른 인류학자들로부터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본 주제의 시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와 인성” 학파에 대한 요약으로는 전경수의 문화의 이해 (일지사 1999: 231-254 (제 8장)) 참조 바람.
그러나 서구의 문화인류학계에서 이 “문화와 인성”의 주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인기를 잃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한 민족/사회가 한 가지 특성 혹은 개념으로만 묘사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음을 후세 학자들이 발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개념으로만 묘사할 때에 발생하는 비정확도 내지는 외부인의 편견 등이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되고 비판되면서, 인성보다는 동일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동일하게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이나 그들의 문화적 의미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문화인류학자들과 같은 외부인들이 현지의 문화를 해석해주는 내용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현지인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혹은 자신들이 이해하는 세계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하며 어떤 문화적 지식이나 논리를 갖고 있는가에 더욱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Cornerly Casey and Robert Edgerton이 편집한 A Companion to Psychological Anthropology (Malden, MA: Blackwell Publishing, 2005:3-8) 참조. 이로 인하여 발달된 것이 소위 “Ethno-semantics” 혹은 민속의미론이다. 여기에서 문화적 세계관 개념이 발달하게 되었고, 오늘날 인지문화인류학에서는 현지인/내부인들의 문화적 상징과 은유 등을 이해함으로써 그들의 내면의 가치 체계를 더 깊이 파악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2] 필자의 문화 정의는 Charles Kraft의 문화 정의에 기초하면서,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 매우 중요한 요인인 환경 부분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필자의 “기독교 선교 문화인류학 (Anthropology for Christian Ministry)” (Fuller Theological Seminary, unpublished lecture note, 2006) 및 Kraft의 Anthropology for Christian Witness (NY: Orbis, 1996: Chapter 4) 참조.
[3] 여기서 “동질문화권”이라 함은, 친족중심의 동족 혹은 “ethnic” 사회를 기본적으로 가리킨다.
[4] 이러한 문화적 세계관은 철학이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세계관과는 다른 개념이다. 각주 2에서 언급한 필자의 글(2006) 참조.
[5] 무슬림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어려서부터 모스크의 마다라스(어린이 꾸란 학교)를 통하여 습득된 꾸란과 이슬람 교육은 무슬림들에게는 종교이기보다는 문화, 즉 삶의 총체적 방식 및 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들의 회심은 신학적보다는 심리적 및 사회문화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6] 병리적인 증상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우에 선교사들은 현지인들이 미울 뿐만 아니라 현지 문화 전체를 정죄하며, 또 스스로 깊은 죄책감과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느껴지고 보일 때에 선교사는 위기를 속히 인식하고 이에 따른 적절한 대처를 해야 한다. 선교사들의 위기 관리와 선교사 돌봄에 대해서는 Kelly and Michele O’Donnell이 편집한 Helping Missionaries Grow: Readings in Mental Health and Miss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88)와 Kelly O’Donnell이 편집한 Missionary Care: Counting the Cost for World Evangelization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92) 참조 바람.
[7] 문화충격에 대해서 Paul Hiebert의 저서 Anthropological Insights for Missionar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의 3장 (61-89쪽)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는 자세한 언급은 피한다. Marjory Foyle의 Overcoming Missionary Stress (Wheaton, IL: EMIS, 1987) 역시 참조.
[8] 인성과 문화와의 관계는 한때 북미에서는 심리문화인류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심리문화인류학자들은 문화와 인성이라는 주제보다는 교차문화적인 관점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의 세계인식과 감성을 비교연구하는 쪽으로 더 기우는 경향이 있지만, 인성에 대한 관심은 그치지 않고 있다. 문화와 인성 학파들은 약 네 가지의 이론적 경향으로 발전하였는데, Benedict와 Mead를 중심한 유형론(1920~1940), Kardiner, Linton, Du Bois, Wallace 등의 기본-최빈(最頻) 인성론(1935~1955), Kluckhohn, Hsu 등의 국민성 이론 (1940~ ), 그리고 Whiting, Spiro, Edgerton, D’Andrade 등의 통문화(혹은 교차문화) 이론 등이 그것이다 (전경수 1999:236-250 참조). 이러한 문화인류학의 인성 이론은 오늘날 심리문화인류학의 기저가 되었다.
[9] 본고에서 이 모든 내용들을 지면과 시간의 제약 상 다 다루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10] Francis Hsu 교수는 중국인으로서 런던에서 최종 학위를 마친 뒤 1944년 미국에 도미하여 오랫동안 인성과 문화 영역에서 연구와 강의활동을 한 문화인류학자이다. 그는 인성 혹은 국민성 이론의 기초를 친족구조(kinship structure)에 두고 있다. 이 점이 필자가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기에 본고의 논의에 적합하다고 보고 그의 이론을 사용하여 한국인의 인성을 들여다 보고자 한다.
[11] Hsu의 네가지 유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친족공동체 내에서의 상호의존적 유형: 이러한 사회는 다른 관계를 희생시키면서까지도 부자관계가 중요한 사회이다. (예: 한국, 중국, 일본 등) 2) 개인 입장에서의 자립적 유형: 이것은 다른 관계를 희생시키더라도 부부 관계를 우선하는 사회이다. (서구 사회) 3) 초자연세계 의존의 유형: 다른 짝들보다도 모자 관계가 더 중요한 사회이다. (인도 사회) 4) 경쟁에 의하여 상호의존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유형: 여기서는 형제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경쟁에 의하여 상호의존이 심각하게 제한되는 경우이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사회) Francis Hsu의 “Kinship and Ways of Life” (Psychological Anthropology, Hsu 편집, 509-567쪽, Cambridge, MA: Schenkman, 1972) 참조. 이 네 가지 유형은 사실 상 너무 일반화한 경향이 없지 않지만, 각 사회의 인성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척도 역할을 한다. 본 고에서는 지면의 제한상 각 유형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12] 아래의 내용들이 한국인의 인성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지만, 본고의 논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하나의 시각이므로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인의 인성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13]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서는 남자들의 관계를 중심으로 문화의 하위구조(subsystem)들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 이러한 유형의 사회를 묘사함에 있어서 여성들의 문화에 대한 언급이 부재하게 되는데, 이것은 필자가 의도적으로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자 짝 중심 사회의 문화가 다분히 남성중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특징들만을 간추려서 기술하고 있는 것임을 독자들은 이해하여 주시기 바란다.
[14]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일방적이지만은 않다. 아버지는 아들에게서 많은 것들을 요구하지만 아들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치고 물려준다. 그러므로 Hsu는 이러한 관계를 일방적으로 수직적인 관계로 보기보다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았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중에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의존적으로 되며 아들들은 아버지(그리고 어머니 역시)의 노후를 책임지게 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15]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이들은 항상 더 큰 자본을 만들기 위해서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러므로 보수적이라고 해서 추진력이 없거나 게으르다고 볼 수는 없다.
[16] 샤머니즘(shamanism)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마다 상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샤머니즘이 일종의 종교적 체계(religious system)로서 샤먼(shaman)이라고 하는 특수한 영적 능력을 소유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여기서 “샤먼”은 문화인류학에서 사용하는 기술적 용어로서 한국의 “무당” 혹은 “박수”보다는 상위 개념이 된다. 샤먼과 샤머니즘 논의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Islam among the Swahili in East Africa (Nairobi, Kenya: Acton, 2004)의 7장 참조.
[17] 가상의 친족구조(virtual kinship structure)라 함은 선교사가 고향에서 가졌던 상호의존적 관계를 현지에서 동역하는 사람들에게 투사하거나 혹은 본국에서처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하여 본인의 심상에 관계의 개념으로 늘 갖고 있는 이상적인 관계구조이다. 그리하여 선교사가 위기를 맞이했을 경우 이 가상의 친족구조를 통하여, 마치 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들을 극복해가고자 하는 것이다.
[18] 예를 들자면, 현지인들은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선교부의 어려움이나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이양을 하게 되거나, 혹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양하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또 운영방식이 서구적이었다가 현지인들이 100퍼센트 물려받게 될 경우 많은 어려움이 예상될 수밖에 없다. 후자는, 대부분 서구 선교사들이 그동안 함께 동역하던 현지인들이 자신들처럼 (서구화) 되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경우이다.
[19] Eugine Nida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54)
[20] 선교사, 특히 초임 선교사의 선교지 적응에 있어서의 심리적 소속감과 친밀감 혹은 심리적 접착(bonding)에 대해서는 Thomas and Elizabeth Brewster의 “Bonding and the Missionary Task: Establishing a Sense of Belonging” 참조. (Kelly and Michele O’Donnell이 편집한 Helping Missionaries Grow: Readings in Mental Health and Missions (Pasadena, CA: William Carey Library, 1988)의 308~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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