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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오전 맑음, 오후 간간이 비
어제 밤 올릭픽 중계 채널에서 여자핸드볼 동메달 결정전 보느라 늦게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쉽기만 합니다. 신장의 열세에도 악착같이 따라갔건만 스페인 골키퍼가 너무 잘하는 바람에 막판에 골을 넣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스톡캉그리 등정을 떠나는 날입니다. 트레킹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므로 느긋하게 떠나기로 했습니다. 9시 경 게스트하우스 바깥 길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현지인들이 깨끗하게 차려입고 서있습니다. 무언가 행사가 있는 듯하여 얼른 방으로 가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오는데 벌써 싸이렌 소리와 함께 몇 대의 차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달라이라마의 차량행렬이 지나간 것이랍니다. 순식간의 일이라 차량행렬의 사진은 못담았지만 꽃을 들고 서있는 사람들을 담아봅니다. 정말 존경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자세로 조용히 서 있습니다. 종교가 생활에 배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길에도 어제부터 하얀 횟가루를 뿌려놓았습니다. 아마 부정한 기운을 없앤다는 것 아닐까 혼자 추측해 봅니다.
11시에 뜬둡이 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출발합니다. 산행기점인 Stok까지는 Leh에서 차로 약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스톡마을 외곽의 산행기점에는 큰 파라슈트 텐트가 쳐있고 내려오는 등산객, 올라가는 등산객들로 붐빕니다. 방금 내려온 중년의 유럽인 한 팀에게 등정여부를 물으니 자기네 3명 중 남자들은 못 올라갔고 여자 한사람만 성공했다고 합니다.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다른 젊은 팀이 별로 어렵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줍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팀들입니다)
11시 48분 출발합니다. 산행기점의 고도는 3609미터입니다. 길은 넓은 계곡의 오른쪽 가장자리로 계곡을 따라 들어갑니다. 내려오는 팀들이 많습니다. 삼십분쯤 올라가다 길 가 돌무더기에 앉아 점심도시락을 먹고 다시 출발합니다. 평탄한 길이 끝나고 급경사 언덕이 나타납니다. 스톡캉그리 가는 접근로는 마카벨리트레킹 루트보다 더 돌이 많고 울퉁불퉁하며 경사가 있는 언덕을 여러 개 넘어야 합니다. 고르지 않은 발밑의 감촉으로 피로도가 높은 길입니다. 게다가 오늘 루트 길이는 비교적 짧지만 고도를 3600에서 4300이상으로 높이는 루트인지라 고소적응없이 바로 붙었다가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겠습니다.
14시 10분경 파라슈트 텐트 쉼터가 나옵니다. 오른쪽으로는 Rumbak, 왼쪽으로는 Stok Kangri로 가는 갈림길의 쉼터입니다. 여기 고도는 4033미터이니 두 시간에 약 400 정도 고도를 올렸습니다. 다시 전진. 갈수록 주변경치가 좋아집니다. 또 힘을 빼앗는 언덕구간이 나옵니다. 그러나 다 올라서니 펼쳐지는 경치가 장관입니다. 마침 룽다와 타르초로 감겨있는 돌무더기도 있고 주변에 쉴 곳도 있습니다. 티벳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입니다. 돌무더기를 감고있는 룽다에 이마를 대고 산행의 성공을 빕니다. 스톡캉그리 정상에 서있는 내 모습을 그려봅니다. 돌무더기 앞 돌 판에 “Turn your wounds into wisdom!”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금 내게 딱 필요한 말입니다.
언덕을 내려서니 다시 계곡과 만납니다. 계곡이 갈라지는 곳에 아주 어린 당나귀 새끼 한 마리가 서 있습니다. 주변에 어미도 없고 사람도 없고 풀 한포기 없는 황량한 곳인데 이상합니다. 계곡 위쪽을 향해 가만히 서있기만 하고 도무지 움직이지 않습니다. 힘든 길에 지쳐 저러고 있나? 주인은 데려갈 방법이 없어 여기에 버려둔 것일까? 이대로 두면 죽을텐데.. 걱정이 되는데 나도 방법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나쳐 가지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15시 48분 저 앞으로 여러 동의 텐트가 보입니다. 오늘의 목적지 Monkyarmo에 다 왔습니다. 여기는 두 계곡이 만나는 합수지역으로 집은 한 채도 없는 맨 땅이며 여름 시즌에만 장사하는 파라슈트 텐트가 한 동 쳐지고 그 주변으로 등정 텐트들이 자리하는 곳입니다. 해발고도는 4373미터이고 오늘 여기까지 9.29 킬로미터 걸은 것으로 나옵니다.
저녁은 닭백숙입니다. 토종닭 2마리를 셋이서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저녁먹고 회의를 하는데 일행들이 정상 등정을 내일 밤으로 앞당기자고 합니다. 고산적응은 어느정도 되었는데 이제는 우리 체력 걱정을 해야 할 때이니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하자는 것입니다. 원래는 모레 밤으로 생각했는데 하루를 앞당기자니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걱정이 됩니다. 기상이 제일 우선이라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지난 며칠동안 계속 비가 와서 등정이 미루어진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기상이 좋으면 매일 밤 바로 올라가고 나쁘면 뒷날 하기로 합니다.
8.13. 흐림. 가끔 비.
어제 밤엔 잘 잤습니다. 텐트를 하계용에서 4계절용으로 바꾸니 확실히 더 따뜻합니다. 어제 남은 닭죽으로 아침식사를 합니다. 원정대님은 잠을 못잤다 합니다. 내가 보기엔 고소증세입니다. 오늘은 BC까지 갑니다. 여기서 두시간 반이면 가는 짧은 코스입니다. 8시에 출발. 천천히 걷습니다. 앞에 홍콩에서 온 청년들이 가는데 복장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놀러온 차림인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무모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slow and steady! 가이드 뜬둡이 컨디션이 어떠냐고 묻습니다. 나는 “산에 몸을 맡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발걸음이 가도록 내버려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덧붙입니다. “I don’t think walking. I just feel walking.” 그렇습니다. 고산에 오면 no thinking but feeling입니다. 즉 들리는 것, 보이는 것, 그리고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감촉만 지각할 뿐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산에 오를 때 내 의식으로 들어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팔딱거리는 심장, 그리고 탄력있게 움직이는 허벅지입니다. 경사가 완만할 때는 그저 허벅지에 힘 들어가는 것만 느껴집니다. 그러다 경사가 심해지면 심장의 팔딱임을 느낍니다. 그렇게 느끼며 걷는 것이 참 편합니다. 그리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고산을 찾는지도 모릅니다.
길은 왼쪽 계곡으로 파고듭니다. 울퉁불퉁한 돌길입니다.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걷다보니 9시 56분 저 앞으로 많은 텐트들이 보입니다. 베이스캠프입니다. 여기 고도는 4970미터이고 오늘 아침에 3.4킬로 걸었습니다. 베이스 캠프에는 차, 간단한 음식 등을 파는 흰색 상업용 파라슈트 텐트가 있고 Monkarmo보다 더 많은 숫자의 텐트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정상가는 길이 오른쪽 능선을 향해 지그재그로 나 있는 것이 보입니다. 얼추 짐작해서 능선언덕까지 고도 150미터는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베이스캠프에서 시작되는 능선 오름길)
10시 22분 원정대님과 정찰에 나섭니다. 능선언덕까지 20분 걸렸고 능선마루의 고도는 5139미터로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길은 완만하게 왼쪽 사면길로 길게 뻗어 있습니다. 컨디션이 별로인 원정대님은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가고 나 혼자서 좀 더 진행해 봅니다. 우박이 점점 심해지고 시야가 좋지 않습니다. 아직 사면길은 끝나지 않았지만 5200미터 지점에서 되돌아가기로 합니다. 다시 베이스캠프가 내려다 보이는 능선마루에 와서 쉬는데 11명으로 이루어진 스위스팀이 내려옵니다. 모두 등정에 성공했답니다. 그러나 구름으로 시야는 전혀 없었답니다. 어제 밤 눈이 오고 기상이 나빠 대부분의 등정팀이 쉬었다는데 이 팀은 강행한 것입니다.
(언덕마루에서 내러다 보이는 베이스캠프)
점심 후 각자 텐트에서 쉬다가 다시 모여 장비를 점검합니다. 안전벨트, 피켈, 로프 등은 에이전시에서 준비했고 크램폰은 우리가 가져간 한국 아이젠으로 대체합니다. 얼음이 그렇게 많지 않고 무거운 크램폰이 싫어서입니다. 크램폰으로 갈아신는 크램폰 포인트는 약 5600미터 정도일 것이라고 가이드는 말합니다.
저녁 때가 되자 구름이 조금씩 걷히며 기상이 좋아집니다. 이대로라면 오늘 밤 정상등정을 하기로 합니다. 5시에 이른 저녁을 먹고 6시경 잠자리에 듭니다. 밤 12시 기상해서 출발하기위해서입니다. 원정대님 컨디션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같이 못 갈지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철인경기에 출전하는 강철체력이 저러니 걱정이 됩니다.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옆 텐트의 인도친구가 계속 떠드는 소리가 거슬립니다. 너는 등정 안 할거냐고 한마디 했더니 조용해지네요. 이제 눈 좀 붙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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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경사가 완말할 때와 심할 때의 허벅지와 심장의 느낌에 집중을 하며 걷는 걸 느끼신다는 말씀 공감이 갑니다
베이스 캠프까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걷은 이유가 있는지요?
피켈과 크램폰을 얼마나 사용하셨는지 등등 다음 편을 얼른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