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
樂民 장달수
약력
1569년(선조2) 함안 검암촌에서 오(旿)의 아들로 태어남
11세(1579년) 남명제자 황곡 이칭에게 소학을 배움
16세(1584년) 수우당 최영경에게 논어를 배움
19세(1587년)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업함
24세(1592년) 창의함.
25세(1593년) 임란 공으로 군자감 판관에 제수됨
30세(1598년) 선무원종 공신 2등에 책봉됨
46세(1614년) 경흥도호부사에 제수됨
56세(1624년)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움
58세(1626년) 병조참판에 제수됨
73세(1641년) 광려산 서재에서 별세
1811년(순조 11) 무숙(武肅) 시호 내림
나라가 어지러울 때 분연히 일어나 적과 맞닥뜨려 싸우는 것은 선비의 임무다. 일찍이 남명선생의 제자들은 임란을 당해 의병장으로 떨쳐 일어서기도 했다. 임진왜란, 정묘·병자호란 등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대를 살다간 많은 선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살신성인의 마음으로 떨쳐 일어섰다.
광서(匡西) 박진영(朴震英). 그도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대를 살며 나라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함안 선비다. 광서는 남명의 제자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힌 함안 선비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이괄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의 별장으로 난을 평정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임금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는 1569년 11월 19일 함안군 동쪽 검암촌에서 아버지 오(旿)와 재령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자는 실재(實載) 본관은 밀양이다. 오(旿)는 호가 동천(桐川)으로 뒤에 형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문장과 덕행으로 명망이 있다. 어머니 재령이씨는 부제학을 지냈던 이중현의 증손이며, 현감을 지냈던 이경성의 딸이다.
광서는 태어나며부터 기개와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달랐다. 재주가 남다르자 부친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가르치며 항상 재주만 믿고 교만해지지 말고 옅은 얼음 위를 걷듯이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8세 때(1576년) 모촌 이정을 뵈었다. 모촌은 남명의 제자로 학식이 높은 함안 선비였다. 이어 11세 때는 역시 함안 선비로 남명의 제자인 황곡 이칭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광서는 이 당시 불과 10여세의 나이로 당시 이 지역 학문을 주도하던 남명의 제자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15세 때는 부친을 모시고 황암 박제인, 수우당 최영경, 죽유 오운, 대소헌 조종도, 황곡 이칭, 각재 하항, 모촌 이정 등이 참석하는 강회(講會)에 갔는데, 모두 광서의 행동을 보고 후일 크게 될 아이라고 칭찬을 하였다 연보에 기록돼 있다. 특히 수우당 최영경에게 논어를 배우기도 했는데, 수우당도 광서의 자질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한다.
19세 때는 당시 함안군 수로 재직하고 있던 한강 정구의 문하에 나아가 정식으로 학문을 배웠다. 24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창의하여 군수 유숭인과 왜적을 무찔렀다. 유숭인 군이 적에게 패하자 다시 망우당 곽재우 장군 진으로 달려가 왜적을 물리치는데 일조를 했다. 이러한 공으로 군자감 참봉에 임명되었고 이어 군자감 직장, 군자감 주부 등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혁혁한 전공을 세우자 당시 진주에 있던 초유사 학봉 김성일이 적을 물리치는 계책을 논의하고자 불렀다. 학봉에게 적을 물리칠 계책을 말하고는 곧 진주를 떠나 도원수 권율이 머물고 있던 삼가로 가서 휘하의 장군으로 있으며 활약하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다시 조정의 명령에 의해 원수부에 나아가 적을 맞아 싸웠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책봉할 때에 광서는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31세 때(1599)에는 용궁 현감에 임명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37세 때 경원 판관(慶源判官)으로 불렀으나 병을 사칭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광서는 고향에 머무는 동안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 등 여러 석학들과 함께 낙동강에서 뱃놀이하며 시문을 짓고 학문을 궁구하기도 했다. 이 모임에는 30여명의 석학들이 모였는데, 그 뒤 기락편방(祈洛編芳)이란 책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
고향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다시 의주 판관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 40세였다. 광해군 9년(1617) 왕이 폐모(廢母)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폐모 반대를 하던 백사 이항복이 북청의 귀향지에서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장례에 참석하였다. 51세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순천 군수 겸 관우수어사가 되어서는 향교를 중수하고 강당을 열어 유생들을 공부하게 하고 상벌을 엄하게 하는 등 풍속을 바르게 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56세 때(1624) 이괄(李适)이 반정 공신 책봉에 불만을 품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나자 광서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진영으로 달려가 우협대장(右脇大將)이 되어 두 아들과 함께 난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난이 진압되자 조정에서는 두 아들과 함께 진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황해도 방어사로 임명하였다. 임지에 부임하여 1년을 지내다가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한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62세 때 창원 광려산(匡廬山) 아래에 집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세상의 일을 잊고자 했다. 광서란 호는 이때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서는 70고령에도 불구하고 관찰사 심연에게 달려가 근왕병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단신으로 남한산성을 향하여 달려갔다. 다음해 정월 광서가 조령(鳥嶺)을 넘어섰을 때 적에게 항복하고 치욕스러운 화의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임금이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우리나라가 금수의 지역이 되었으니 무슨 낯으로 하늘을 우러러 보겠는가”하고 목 놓아 울었다. 이후 광서는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인조 19년(1641) 11월 29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3세였다. 인조 22년(1644)에는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증직되었고 이어 27년(1649)에는 숭정대부판돈녕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의 직이 더해졌다. 영조 35년(1759)에는 지역 사림이 도계서원을 세워 향사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에 있는 사당에는 평소 사용하던 유품과 명나라 제독으로부터 받은 장려, 패문 등 231점이 소장돼 그의 유업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