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문학기행
박경리 문학관을 관람하며
호정 : 진용호
문인을 꿈꿨음에도 “토지”를 읽지 않은 부끄러운 치부를 들어낸다.
정작 박경리의 대표작 “토지”를 말로만 들었지 독파하지 못한 채 통영 산양읍에 있는 박경리 문학 전시관에 문학기행을 한다는 게 죄스러운 마음부터 가슴을 누른다.
10여년 전에 “토지”의 주 무대였던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 있는 최 참판 댁을 방문 한 적은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익히 박경리 작 “토지”에 대하여는 알고 있었지만 그 방대한 양에 압도되었으며 장강과 같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대하소설이고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한국인의 삶을 규정한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담아 빚은 명품이라는 말씀을 국어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나는 천성적으로 장편보다 단편이 좋았고 역사성을 띤 글은 일부러 외면하였다. 지금도 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은 시청하지 않는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재미위주로 허위와 가장으로 꾸며 진 것 같아서인데 생각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지난해 6월6일엔 거제시 둔덕면에 위치한 청마 유치환 문학관을 찾았는데 만 1년 만에 박경리 문학관을 찾는가 보다.
먼저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742번지에 소재한 김 다솔 시인님이 경영하는 “바다와 시인”이라는 옥호가 붙은 식당에서 오리고기 요리를 맛이 있어 이게 마지막 요리겠지 하고 나오는 대로 먹고 보니 “코-스"요리였다. 배부르게 먹은 후라 포만감으로 몸이 무겁다.
제일 먼저 박경리 문학관으로 발길을 향하였다. 6월의 바다와 산이 생동감이 어우러져 한결 상쾌한데 곳곳의 개발의 징후들이 초목으로 단장되었던 산하가 황토 빛 속살을 들어내는 게 자연의 파괴가 몰고 올 재앙을 미리 짐작해 본다.
큰길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지어진 문학관이 깔끔하게 보였다.
크리스찬 문학교실 지도교수이시고, 인솔자인 양 왕용(시인) 교수님의 박경리 씨의 작품소개와 시대상이며 가족사까지도 자상하게 설명하는바에 따라 전시된 자료들을 통하여 더 많은 감명을 받았다.
박경리는 민족어의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속담이나 사투리를 적절하게 사용하였기에 한국어의 미적 특질을 살린 작품으로 한국 소설사에서 “토지”는 다른 역사소설과 그 성격이 다르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언어의 곳간을 열었을 때 거기서 움터오던 것은 일제치하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향해 햇살 같은 것이었다.
1926년10월28일에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났고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하고 1950년 황해도 연안 여자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50년 한반도에는 폭풍우가 질러간다. 수많은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으며 단란했던 가족공동체는 부스러졌다. 박경리 역시 이 폭풍우에 휩쓸렸다. 그것도 잔혹하게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또 전쟁 직후에 는 아들을 잃었다. 이 잇단 고통은 불합리한 출생으로 생겨난 비극적 인식을 더욱 고착시켜 놓는다. 이 세상엔 선이란 존재하지 않고 결국 악이 승리 한다는 절망을 경험한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을 생각해야 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과 56년 단편 “흑흑백백”을 월간 현대문학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 이래 62년 장편 “김약국의 딸들”을 비롯하여 “시장과 전장”“파시”등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잇달아 발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69년6월부터 집필을 시작해 1995년 5부작으로 완성한 대하소설 “토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전 과정에 걸쳐 여러 계층 인간의 상이한 운명과 역사의 상관성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번역돼 호평을 받았다. “토지”는 방대한 원고지 분량에 걸맞게 700여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시간적으로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 사회의 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격동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토지“라는 민족어의 대 서사시를 끝내고 30여년을 사시던 강원도 원주에서 2008년5월5일 타계하셨는데 통영시장님을 비롯하여 뜻있는 인사들이 원주에 가서 사정사정하여서 고향인 통영으로 모셔 왔다는 말씀도 하셨다.
어릴 때의 가난과 불우했던 결혼 생활 등 고통과 불행을 생각 할 때 생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이해를 하였다.
대하소설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지난 시절 우리 민족의 힘든 삶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문헌을 통하여 대강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경남 하동군 평사리의 만석군 최치수가 마을 건달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외동딸인 서희는 믿었던 먼 친척뻘의 조준구 일당의 계략으로 전 재산을 모두 뺏기고 내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일본인의 감시를 피해 만주 땅 간도의 용정으로 야반도주를 하게 되고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고난과 역경을 견디고 재기하여 다시 예전 땅과 집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이다.
생전의 박경리가 “존엄성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가장 숭고한 것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듯 그의 작품에서 이 존엄성을 “토지”의 주인공 서희는 이 존엄성을 지키려는 가장 강한 의지의 인물로 등장한다.
박경리가 문단에 머리를 내밀기까지의 과정을 적어보면 역시 예나 지금이나 밀어주고 당겨주는 사람이 있어야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것이 확연하다.
박경리는 1926.12.28(음)경남 통영에서 태어난다. 작가의 출생은 스스로 털어놓은 바대로 “불합리 했다.”그 불합리한 배경이 숙명처럼 고독을 끌어안게 하며, 그 고독이 문학을 향한 그의 꿈을 영글게 만들었다. 워낙 소심한 성격을 타고난 그는 어릴 적에 공부도 썩 잘한 편은 아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소외감으로 물들어 있다. 아버지는 열네 살 때 혼인한 조강지처 네 살 연상의 어머니를 버린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 사는 소녀에게 소외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온다.
아버지는 이리저리 떠돌다가 새 장가를 가고, 박경리는 홀어미나 다름없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의 사춘기를 지탱해 준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여학교 시절을 평범하게 보낸 편이다. “평범하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던 박경리는 무슨 보상이라도 받기라도 할 양으로 어기차게 독서와 시(詩) 쓰기에 매달린다.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지 않자 분노한 나머지 여학교에 다니다 말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좁은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치게 되면 “목뼈가 부러질 만큼 외면”을 한다. 나중에 임종조차 외면할 만큼 아버지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반항심은 뿌리가 깊은 것이었다.
박경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곧 결혼하지만 남편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그는 다시 세 살짜리 아들을 잃는다. 그는 “악이 승리한다”는 절망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이런 것에 꺾이지 않고 현실과 정면 대응하기 위해 틈틈이 습작을 한다. 박경리에게 문학은 불행과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였다. 나날의 삶은 고투였다. 그는 뒤틀린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진 어떤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는 자존심을 지닌 젊은 전쟁 과부로 세상과 맞선다. “이곳 풍토에 있어선 과부란 인권유린의 대상으로과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한 박경리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존심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김동리 부인이 진주여고 선배여서 박경리는 자신이 써둔 시작(詩作) 원고를 김동리에게 보일 기회가 생긴다. 습작 원고를 읽고 나서 한동안 반응이 없던 김동리는 얼마 뒤 작품을 갖고 “문예살롱”으로 나오라는 전갈을 보낸다. 낮 가림이 심했던 그는 친구를 앞세운 채 “문예살롱”에 드나들며 김동리에게 습작품을 보인다. 김동리는 시를 주로 쓰던 박경리에게 소설을 써 보라고 권유한다. 이미 일본어로 소설을 써본 적이 있던 그는 곧 소설 습작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던 중 “문예살롱”에서 누가 그의 얼굴을 스케치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로 그는 모욕감에 떨며 다시는 “문예살롱”에 나가지 않는다.
그는 김동리에게 넘어가 있던 습작 원고 뭉치도 친구를 통해 돌려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박경리는 김동리의 큰아들로 부터<현대문학>에 작품이 추천되었으니 원고료를 받아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박경리에게 습작품을 돌려줄 때 빼 놓은 작품을 김동리가<현대문학>에 추천한 것이다. 이로써 박경리의 단편 “계산”이 <현대문학>1955년 8월호에 발표된다. 첫 추천을 받고 1년이 지난 뒤 “흑흑백백”이란 작품으로 추천이 완료되어 박경리는 비로소 한국 문단에 얼굴을 내민다.
그 후로 타계할 때까지 장편16, 단편3, 수필6. 시집3, 기행문1, 동화1, 기타3 등 33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넓고 넓은 한국소설의 한봉우리를 쌓으셨다.
박경리의 묘소를 참배하고 달아 공원에서 남녁의 쪽빛 바다와 갯내음을 가슴에 안고 아쉽게도 김춘수 문학관에는 휴관일이 여서 뒤로 한 채 청마 유치환 문학관을 둘러보고 이순신 공원을 경유하여 문학기행의 여정을 마무리 하였다.
(2014.6.7. 통영 문학기행을 마치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