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때문에 사회생활이 불편하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산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형태가 되든지, 크고 작은 여러부분에서 남들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요소들이 자신을 존중할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 아닌지요.. 동시에 남들이 자신보다 잘났다는 것을 아는 겸손함이 다른 이들을 존중케 하고 이 두가지 요소가 함께 인간관계라는 거래의 기본 틀을 형성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두가지 나르시즘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남들보다 똑똑하다는 것과 도덕적 우월감입니다. 객관적으로도 아이큐가 높고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어릴 적에 형성된 이상적 도덕관에 가디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잣대를 가지고 지금까지 거의 타협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문제는 이런 이유 때문인지 남들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겁니다. 타인의 도덕 불감증에 예민하며, 그런 셩향이 인간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일대일 관계에만 익숙해져 있어서 세명 이상 모이면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불편해 집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 어릴적 부터 평등 의식이 몸에 배어서 사람 간에 상하 관계가 생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졸업후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저의 엘리티즘, 평등주의, 도덕적 결벽증 등이 뒤섞여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경험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런 제게 혹시 조언해 주실 만한 내용이 없을까 싶습니다.
반복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맞추어 나갑니다 .
자신이 옳고 선하고 정당하며 특별하다. 고 느끼는 나르시시즘은 인간 정신의 아주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기는 가만히 누워 무언가를 욕망하기만 하면 그것이 충족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조금 더 큰 아기는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엄마를 전지 전능한 존재로 믿게 되고 그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며서 유아적 전능감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초기에 형성된 미성숙한 인식들은 엄마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체 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정서적 보살핌이 결핍된 아기는 확장되는 환상의 영역에서 그것을 충족시키며 점점 마술적 사고와 전능감을 강화시키게 됩니다. 이런 성향이 정신의 깊은 곳에 뿌리내려 자기 확장증, 자기 비대증이라 불리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을 형성합니다. 엄마의 보살핌이 결핍된 아기는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불필요한 존재라는 생각도 함께 갖게 되는데 그런 까닭에 자기 확장증은 자기 비함감과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질량으로 나란히 형성됩니다.
나르시시즘적인 요소는 성장하면서 대인관계나 사회 조직 속에서 반복적으로 깨집니다. 고대 사회에서 존재했던 혹독한 성인식은 유아적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넘어서게 하는 관문이었을 겁니다. 현대에도 나르시시즘을 깰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많습니다. 군복무를 마친 남성들이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말할 때 그 말의 핵심에는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심리적 성장을 이룬 경험이 있지 않을까 짐작됩니다. 군복무를 하지 않은 남성들은 직장 생활 초기에 남들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데, 그 시점에서 뒤늦게 나르시시즘이 깨지는 경험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들에게는 결혼생활이 나르시시즘을 깨는 경험을 제고하는 것 같습니다. 결혼 후 시댁이라는 새로운 조직속에서 시집살이라는 일종의 사회생활을 경험하면서 심리적 성장을 이룬 여성들은 여자는 결혼해야 어른이 된다.. 는 명제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 경험들의 핵심에 있는 것은 극기의 경험이며, 이때 내가 극복한 또 다른 나라 바로 유아적으로 확장되고 이상화된 자기 일것입니다.
황야 님.,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맞추어 나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황야 님은 그런 행위를 타협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하지만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대접을 수용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도덕이나 정의조차 입장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과 우울려 사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이상적인 자기 이미지, 이상화된 도덕관, 유아기에 만들어진 환상일 뿐입니다. 혹시라도 세상이 나의 논리나 도덕에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곧 병리적 나르시즘 일것입니다.
나르시시즘적 성격뿐 아니라 권위에 복종하기 어려워하는 마음, 일대일 관계에 고착하기, 세상 이상의 관계를 불편해하는 마음 등은 오이디푸스 단계를 자연스럽게 이행하지 못한 심리상태를 반영합니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비단 아버지의 거세 위협이 두려워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넘어선다는 것으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법과 질서에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공동체의 언어를 습득하고, 성 역할을 알아차리며, 그 사회에 수용될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좀 더 안전하게 성취할수 있는 은유와 상징의 역량을 획득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황야 님은 지금 사회 생활 초기에 맞게 되는 나르시시즘이 깨지는 바로 그 경험을 하고 계시는듯합니다. 더불어 뒤늦게 오이디푸스적인 단계를 발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조직속에서 사회적 아버지를 인정하고 아버지와 법과 질서를 수용하면서 그 조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경험을 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소중한 성장의 기회로 삼으시면 좋습니다. 똑같은 경험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한 수준의 성장을 이루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경험을 의식화하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내부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에서 반복해서 실천함으로써 체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동일시를 통해 성장한다고 몇 차례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타인의 선함과 지혜 뿐 아니라 조직의 가치나 질서 역시 재부로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면서 정신을 성숙시킵니다. 자신만이 옳고 선하다 정당하다.. 는 관념에 갇혀 있으면 외부의 지혜나 새롱누 가치관을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불안, 시기심과 함께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성장을 저해하는 고질 삼총사로 분류됩니다. 세가지 감정의 공통점은 동일시를 방해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