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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두지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난 명종을 이어, 선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명종이 공식적으로 지명한 바는 없으나, 실록등 각종 기록에는 평소에 그를 가까이 대하며 내심 후계자감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선조는 선왕의 적자가 아닌 방계(傍系)의 위치에서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적장자 왕위 계승’은 지금까지도 하나의 원칙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조선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이 원칙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는 1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무력을 과시하며 형을 왕위에서 내리고 등극한 태종과 셋째임에도 왕으로 등극한 세종이 이 원칙에 벗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와 반정이라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물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경우도 ‘적장자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는 즉위 초에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첨정과 대신들의 도움으로 받았으나, 인순왕후가 수렴점정을 거두겠다고 공포한 17세부터 친정을 펼칠 수 있었다. 선조의 치세는 이전까지 정치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 양상을 펼쳤다면, 훈구파가 몰락하고 본격적인 사림의 시대가 열렸다고 평가되는 시기이다. 몇 차례의 사화로 인해 억울하게 죄를 입은 사람들을 사면하고, 귀양을 갔거나 고향에 돌아갔던 사림들을 대거 기용함으로써 명실공히 사람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제세력이 없는 권력은 분열을 자초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듯이, 사림들은 이내 동인과 서인 그리고 다시 남인과 북인 등으로 분열하여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당쟁의 폐해는 그대로 우리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귀결되는데, 일본에 의해 무력 침략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던 인진왜란(1592)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풍신수길에 의해 분열되었던 일본 열도가 통일되었고, 일본 국내 세력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중국대룍으로의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조선에 대륙의 명나라로 진출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이른바 ‘정명가도’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에서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눈치 채고 1590년(선조23)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통신사로 파견된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지만, 동인이었던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도 이처럼 당파에 따라 다르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7년 동안 조선의 국토는 전쟁의 현장으로 변했고, 무능하기만 했던 왕과 관리들은 그저 전란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빴다. 하지만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더욱이 일본이 강점으로 여겼던 해전(海戰)에서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해 오랫동안의 전란이 종결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다. 그래서 저자 역시 이 시기의 특징을 ‘조선에 이순신이 있었다’라는 소제목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다. 주지하듯이 중국으로 망명을 불사할 생각을 했던 선조와 달리, 왕자인 광해군은 일본군과 싸워 적지 않은 공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활약을 토대로 후에 선조의 뒤를 이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그 결과 사림들의 당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선조를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조정의 권력 다툼을 이용하는 행태를 보였다고 하겠다. 임진왜란의 와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고 대처하도록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어린 왕비를 들여 태어난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했지만, 당시 영창대군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세자로 삼을 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선조의 움직임은 그대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반영되어 극심한 정국의 혼란으로 나타났고, 결국 광해군 즉위 후 영창대군이 죽음에 처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저자 역시 선조의 치세를 평가하면서 소항목의 제목으로 ‘후안무치 선조’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이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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