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이래, 몇 해 전 처음으로 만 1년여를 쉬면서 연구와 교육의 압박에서 놓여나 재충전의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보낸 이 기간 동안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 과정에서 비로소 내가 지나왔던 삶의 흔적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서, 가족들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여유롭지 못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년 동안의 밴쿠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한국에 있을 때 지치고 힘들었던 나의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이 채워졌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넉넉하고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서 지냈던 당시의 소중한 경험을 아직도 깊이 간직하고 있다.
그 이후 여유를 가지고 ‘느리게 사는 법’에 익숙해지고, 아울러 가끔이라도 주위를 돌아보며 살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이제 ‘지천명(知天命)’을 넘어선 나이가 된 만큼, 앞으로는 편리함을 추구하기보다 차라리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동안의 학문적 의욕을 정리해보자는 의미에서, 다양한 지면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모아 새롭게 책을 엮어 내기로 하였다. 이 책은 지난 2005년 이래 약 10여 년간 여러 학술지에 발표했던 성과들 중에서, 가집을 중심으로 주로 조선 후기 시조문학을 다룬 12편의 논문들을 뽑아서 엮은 것이다. 여기에 연구자로서 내가 느꼈던 고민들이 담긴 두 편을 글을 ‘보론’으로 말미에 첨부했다.
수록된 글들을 일별해 보니, 이 기간 동안 내 연구의 주된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 나의 학문적 관심과 연구 분야는 주로 조선 후기 시조문학에 집중되었고, 이러한 성과를 기반으로 언젠가는 시조문학사를 정리해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내 계획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조선 후기 시조사와 가집’이라는 주제 아래 4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4종의 가집들을 다루고 있는데, 시조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구자들의 관심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던 가집들에 대한 탐색의 결과이다. <가곡원류>의 부록으로 여겨졌던 <여창가요록>에 대한 이본을 집중적으로 고찰하고, 사대부 작가였던 신헌조를 다룬 일련의 논문들은 19세기 시조사의 특징적인 한 국면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온전한 시조사의 지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새로운 자료에 대한 연구는 지속되어야만 할 것이라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제2부와 제3부에 수록된 나머지 글들 역시 이러한 주제와 무관치 않다고 할 수 있다. 제2부는 <금옥총부>를 중심으로 안민영과 19세기 예술사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4편의 글들이며, 제3부는 사설시조와 기녀시조를 비롯하여 시조 작품에 담겨있는 몇몇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과들이다. 특히 3부에서 ‘기녀시조’와 ‘대청 의식’을 다룬 글들은 조선 전기 작가들의 작품까지 다루고 있으나, 그러한 흐름이 조선 후기의 문학사에 접맥되어 있기도 하다. 아울러 기녀시조나 가족을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는 사설시조에 대한 연구는 여성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논문들이라 하겠다. 이들은 모두 조선후기 시조사를 탐색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 시도된 성과물이며, 가집을 토대로 한 분석적 결과를 정리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여기에 책의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동안 발표했던 글들 중 2편을 ‘보론’으로 책을 말미에 덧붙였다. 그 중에서 ‘고전시가 논쟁의 복원을 위하여’는 민족문학사연구소의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글이고, ‘고전시가 연구자로서의 자세와 계획’은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40주년을 기념하는 책자에 싣기 위해 청탁을 받고 썼던 글이다. 굳이 이 두 편의 글을 이 책에 수록한 것은 앞의 글이 나 자신을 포함한 국문학 연구자들에게 던지는 제언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뒤의 글은 작성된 후 10년이 지났음에도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로 여전히 유효함을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두 편의 글을 이 책에 수록함으로써, 연구자로서 이 글들에 담긴 문제의식만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실상 여기에 수록된 많은 논문들은 그동안 지도교수이신 김흥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동학들과 함께 과제를 수행하면서, 가집을 비롯한 다양한 시조 문헌을 탐구했던 결과의 결실이기도 하다. 가집과 각종 시조 수록 문헌들을 수집‧정리하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자료들을 직접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자로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또한 문학 연구에서 자료의 실상을 확인하는 것 못지않게, 연구자의 시각에 의해 그것이 적극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과제는 고시조대전이라는 성과물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과제를 수행하면서 얻어낸 다양한 성과들이 앞으로도 당분간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학계에 보고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새롭게 책을 내기로 하고 흩어져 있던 원고들을 정리하고 검토하면서, 잠시나마 이 논문들을 쓰는 동안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항상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왔던 과거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이제는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현실의 모순에 눈감지 않고 곳곳을 다니면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아내 심명선은, 언제나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금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해,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대학입시의 치열함을 몸소 느끼고 있는 아들 가은이에게도 깊은 사랑과 함께 아낌없는 격려를 보낸다. 팔순을 넘어서 비로소 아들과 함께 지내는 어머님께도 오랫동안 같이 지내실 수 있기를 빌어본다. 가족들은 언제나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뿐만 아니라, 내가 학문을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수고해 준 태학사의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첨단의 기기들과 빠른 것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이제부터 나만이라도 조금은 느리고 불편한 삶을 감수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2016년 5월 초순에
남도의 끝자락 순천에서 김용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