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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눈 그림
눈신을 신고 걸어요
외따로 쌓인 눈에 발자국을 찍어요
하얀 눈밭을 한발 한발
눈신에 밟힌 눈이 추억처럼 패었어요
머물다간 상처의 거처처럼 움푹 움츠러들었을까요?
자국에 자국을 더해 길을 내고
길이 길을 반겨 하얘진 하나 된 길을 다지면
눈의 낙서 아니 낚시라 할까
마음의 지도 아니 미로라 할까
걷고 걷다 맥박까지 하얘진다면, 마침내 겨울 끝?
눈에 새긴 쳇바퀴들 새하얗게 다 걸었으니
길을 내느라 패이고 패인 다짐도, 바람 분다 길 넘자, 이제 다시 풀리고 녹을 거예요
눈신을 벗어놓고 내일로 간 눈사람의 알리바이처럼
그럼 또 연한 발가락이 삐죽 튀어나오겠죠?
엄마가 그린 만다라
눈이나 모래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적 나도 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티벳 승려들은 돌을 갈아 그 가루를 물들여 그림을 그린다
갈수록 좁아지는 대롱에 색색이 돌가루를 넣어 대롱 한끝 한끝에 숨을 불어넣는다
가시인 듯 촉수인 듯
대롱 끝에서 피어나는 다반사의 만화경
거기서 누군가 울고 있다 나도 때때로 눈물로 그림을 그린다 죽어가는 엄마를 요양병원에 두고 올 적 엄마 눈에 피었던 만단정회, 자주 와!
몇 명의 승려가 몇 날 며칠의 기도처럼 그려낸 그림은 그대로 쓸어 담겨 강물에 뿌려진다
돌가루에 숨을 실어 없던 꽃을 피워냈으니
단숨에 다시 없던 자리로 되돌려놓을 테니, 그래 엄마!
눈이든 물이든 눈물이든
모래든 돌가루든 뼛가루든
고관절을 잃고 밤낮으로 기저귀에 그리는
오순이라는 오랜 이름의, 엄마가 그린
<대표시>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
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
모래는 몇천 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
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
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
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
그니까 모래는 뭘까?
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
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
모래는 뭣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
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
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
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
설마 모래가 널까?
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이 시는 세 개의 새 시입니다
# 새들은 그림자가 없어요
땅에 붙어서 걷는 그림자는 크고
땅에서 가까이 나는 그림자는 작다
땅을 벗어난 것들의 그림자는? 없다!
꿈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아요 그림자를 놓쳤기 때문이에요 어릴 적 길에도 집에도 잃어버린 신발에도 죽은 아버지에게도 없어요 꿈에는 그림자가 없어요
펼쳐야 날 수 있고 날아야 잊힐 수 있다는데
접힌 기억을 죽지에 묻고 또 묻는다
나는 내게도 보여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어깻죽지를 펴고 빠르게 달릴수록 튀어 올라요, 높이 날수록 허공에서 흩어져요, 그건 새였을까요?
공중부양하는 것들에겐 그림자가 없고
내 그림자엔 새가 없다
# 수평선처럼 흔들렸어요
자세가 바뀌면 지평이 바뀐다 지평 위 그림자의 농도나 온도나 각도나 차도도
어쨌든 새는 게 실패가 아니다
가장 뜨거운 눈물 아래로는 겹겹의 파도가 있고
파도와 파도 너머로는 한 줄 실선이 있다
방파제에 이른 눈물의 실선이 지평이다 새의 시작이다
간절했던 꿈 밖으로 방금 넘쳤거나 곧 넘칠 파도가 벌벌 떨고 있어요, 벌이었어요, 층층의 구름과 가장 먼 하늘이 엎질러졌어요, 그건 수평선이었을까요?
꿈에서 흘러나온 바다가 지문처럼 일렁이며 이랑을 새긴다
꿈도 아니었는데 바닥이 바다처럼 출렁인다
웅크리면 길은 홈이 되고 홀이 되어 나를 삼키고
지평을 바꾸다 보면 언젠가 탈출할 수 있으니
무엇이든 돼! 돼! 돼! 무엇이어도 괜찮아, 괜찮아,
엎질러진 그림자라면 더욱
# 그림자가 날 일으켜 세워요
하나의 빛을 향하면 그림자도 하나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그림자는 깊고 뜨겁고
깨면 잊히는 꿈처럼 그림자는 있고 없다
뒷배인 듯 제 그림자를 끌고 가는 날엔 태양에 이마가 타들어 가고, 앞 배인 듯 제 그림자를 안고 가는 날엔 태양에 뒤통수가 다 다 타들어 간다, 길에 새긴 문신처럼
실선을 넘어선 것들에게도 없다
옥 규 숙 영, 악보를 벗어난 음표처럼 휘리릭
어디로 갔을까 모으고 모았던 우표나 종이학처럼 소식조차 잊고 이름마저 그림자를 잃었지만
아직 내겐 두 발로 써야 할 길의 역사가 있고 타들어 가면서도 마주해야 할 빛의 역사가 있어요, 바닥이 없으면 길이 없고 그림자라는 빛의 뒷배가 없으면 하, 나도 없는 거예요
나와 하나인 것들과 내게 하나인 것들과 나를 하나이게 한 것들이 있으니 내 그림자도 하나
저녁 무렵일 때 새는 가장 낮고 가장 향기롭다
밤이 오면 크나큰 그림자를 가진 날개가 날 덮어줄 것이다
정끝별(鄭끝별)
1988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부문에 「칼레의 바다」외 6편의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서늘한 패러디스트의 절망과 모색」이 당선되어 시쓰기와 평론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은는이가』,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등
서정과 토포스
―정끝별 시인의 시 세계
박동억
1. 이웃한 존재
“패러디 텍스트가 갖는 이러한 다성성(多聲性)과 복합성은, 하나의 텍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텍스트와 다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정끝별 선생의 연구서 패러디 시학(문학세계사, 1997)의 한 문장이다. 본래 그의 박사논문이었던 이 저서는 한국시사를 아울러 ‘패러디’라는 관점으로 서술하는 역작이다. 연구의 전제는 다음과 같이 축약될 수 있다. 자립한 텍스트는 없다. 모든 글쓰기는 상호텍스트적이다. 바로 이러한 전제를 치열하게 논증하기 위해서 정끝별 선생은 일제강점기부터 현대를 아울러 시 작품과 다양한 예술 사이의 영향 관계를 밝히고 있다.
그의 학문적 탐구는 수사학, 즉 작품의 내적 형식에 대한 논증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수사학적 탐구가 그의 시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추측하는 것은 문학사적으로 유의미한 질문이 될지도 모른다. 정끝별 선생은 학자로서 최근까지도 시론(문학동네, 2021)과 같은 학술서를 간행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첫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을 비롯하여 올해 간행한 모래는 뭐래(창비, 2023)에 이르기까지 총 일곱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패러디이다. 바로 이러한 전제를 그의 시 쓰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언뜻 이러한 전제는 다음과 같은 서정적 믿음으로 번역해도 좋을지 모른다. 고독한 존재는 없다. 모든 존재는 상호관련한다. 수사학적 패러디와 별개로 ‘존재의 패러디’라고 명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가설을 느슨하게 입안해 보자. 그리고 이에 기대어 정끝별 시인의 시가 전개해온 상상력의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자. 수사학적 패러디가 유사한 표현에 의해 두 개의 텍스트의 관련을 파악한다면, 존재의 패러디는 무엇에 의해 두 존재를 연관시키는 것일까.
유난히도 하얗던 자작나무를 보면서도 가을 겨우내 심신충(心身蟲)에 나무 몸안이 파먹히고 있었음을 못 보았다 온통 속 비어버린 몸이었기에 봄이 오고 여름이 왔어도 새잎 돋지 않았음을 못 보았다 무성했던 잎이 잡목들의 잎이었음을 못 보았다 그토록 오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자작나무의 불운을 못 본 것이다 간밤 비에 젖은 몇 개의 밑동 혹은 등걸을 보고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 앞에서 몸 숨겨버린 자작나무 몇 그루를, 이미 두엄의 색을 닮아가고 있는 생톱밥 더미를 보았을 때에야 알았다 베어진 가지 사이의 햇빛이 숲 전체를 밝아 보이게 한다는 것을, 그 빈터로 낯선 길 하나 새로이 놓이고
낯선 등걸에 잠시 앉아본다 아직 축축하다 햇빛을 따라 성글게 놓인 길에 들어선다 자작나무 숲은 또 이대로 자연스럽고 나도 익숙하게 걸어나온다 불운한 기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전문(제1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이 작품에서 ‘나’와 ‘자작나무’를 연관하는 매개는 무엇인가. 우선 자작나무는 내게 위안을 되었던 풍경이다. 다만 지난 가을부터 여름까지 ‘나’는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내게 위안을 주었던 자작나무의 불운을” 보지 못했다. 자작나무가 귀한 것이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고 상냥한 어조로 말한다. 그래서 자작나무 몇 그루가 잘려 나갔고 쓰는 대신 “내 앞에서 몸 숨겨버린 자작나무 몇 그루”라고 쓴다. 생톱밥 더미가 썩어간다고 쓰는 대신 “두엄의 색을 닮아가고” 있다고 쓴다.
한편 자작나무는 ‘나’와 마찬가지로 불운을 겪는 서정적 상관물이다. 이때 ‘나’는 자작나무 몇 그루를 베거나 가지를 치는 일이 꼭 불운만은 아니었다고 느낀다. 그 덕에 숲이 보다 환해질 수 있었고 빈터로 길이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사실 이미 조금씩 ‘나’는 불운한 상태를 벗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작나무에 눈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처한 불운을 떨쳐내야 한다고 믿고, 자작나무 또한 자작나무 몫의 불운을 떨쳐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자작나무 숲은 또 이대로 자연스럽고 나도 익숙하게 걸어나온다”라는 문장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자작나무는 ‘나’에게 위안을 주는 풍경이거나 내 감정을 투사하는 매개이다. 자연물에 대한 판단은 실제 자연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나’의 마음 풍경에 대한 표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현실에서 지친 사람의 마음과 등걸만 남은 자작나무의 마음이 ‘같은 것’일리 없다. 또한 두 존재가 체험하는 불운이 동질적일 리는 없다. 그런데도 이 서로 다른 타자를 하나로 묶는 서정적 동일성이야말로 정끝별 시인의 시가 성립하는 방식인 셈이다. 여기서 정끝별 시인의 시선은 불운의 이동이라는 모티프로 옮아간다. “불운한 기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처럼”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마치 ‘나’에게서 ‘자작나무’로, 그리고 ‘자작나무’에서 ‘길’로 떠나가는 불운의 연속을 상상하게끔 한다. 존재는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 다만 흘러가는 불운 속에서 서로 다른 존재는 서로 앞서가거나 뒤처지는 듯하다.
2. 환유와 공간성
이 한 편의 시를 정밀하게 살피는 것에서 우리는 정끝별 시인이 선호하고 있는 두 가지 수사학적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시에서 사람과 자연물의 관계는 제유적이기보다 환유적이다. ‘나’와 자작나무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서로의 불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는 관계의 필연적 구조를 상정하는 제유적 수사법과 거리가 멀다. 흔히 자연서정시를 이루는 제유적 관계는 자연의 질서 속에서 인간과 자연물의 관계를 필연젹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정끝별 시인의 ‘나’와 자작나무는 다만 이웃해 있기 때문에 서로 느슨하게 관계하는 환유적 세계에 속해 있다.
둘째로 그의 시에서는 시간적 차이보다 공간적 차이가 존재의 차이를 변별하고 있다. ‘나’와 자작나무의 고통은 그들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그것을 견뎌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위치에서 그것을 견디고 있느냐에 따라서 구분된다. 새롭게 놓인 길을 향해 얼마나 멀리 발길을 내딛고 있느냐에 따라서 두 존재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특징들을 주목한다면 그의 시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들을 이웃하게 만드는지도 알 수 있다.
세 끼 밥벌이 고단할 때면 이봐
수시로 늘어나는 현 조율이나 하자구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흰 악기에 정박한 두 현
내가 저 위태로운 낙엽들의 잎맥 소리를 내면
어이, 가장 낮은 흙의 소리를 내줘
내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할 테니
어이, 가장 따뜻한 두엄의 속삭임으로 받아줘
「현 위의 인생」 부분(제2시집 흰 책)
구멍을 등에 지고 가는
은빛 눈썹의 낙타야
지친 너에게 구멍은 오아시스였니?
배 한가운데 구멍을 안고 가는
베두인의 여자야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
「희망」 부분(제2시집 흰 책)
이후의 시집에서도 존재를 범주화하거나 위계화하지 않는 환유적 수사법은 두드러진다. 그렇다면 환유적 수사법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 시 「현 위의 인생」에서 시인은 삶을 홀로 견딜 필요 없다고 말한다. “우린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어차피 흰 악기에 정박한 두 현”일 뿐이니 함께 노래하자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나’와 당신을 대등한 “두 현”으로 상상하는 것과 권유하는 듯한 어조이다. 이처럼 정끝별 시인은 따로 놓인 두 존재를 ‘곁에 놓인’ 위치로 바꾸어 상상해 보려는 태도를 지속한다. 고통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임에도, 누군가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지를 때 누군가 그것에 호응한다면 위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윤리적 지향과 맞물려서 서정을 공간화하는 경향은 두드러진다. 삶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구분하여 생각해보자. 시간은 모든 존재가 각자 견뎌내야 할 것이지 양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공간 속에는 우리는 소유물과 장소를 함께 나눈다. 아마도 정끝별 시인이 줄곧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어떤 장소로 비유하는 이유는 그것이 분유할 수 있는 것이기를 소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시 「희망」에서 삶의 고통은 등에 “구멍”으로 표상화되고 있다. 여기서 “구멍”은 낙타의 등에 짊어진 짐이기도 하고, 베두인 여자의 배 한가운데 뚫린 것이기도 하다. 핵심은 “허기진 너에게 구멍은 집이었니?”라는 물음처럼, 시인이 그러한 구멍이 구멍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존재 회복의 거처로 승화되기를 소망한다는 점이다.
3. 토포스적 상상력
결국 정끝별 시인의 시에서 환유적이고 공간적인 상상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어떤 윤리적 지향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어떤 불행이나 어떤 고통을 각자의 몫이 아닌 ‘나눌 수 있는 것’이 되기를 시인은 바라는 듯 보인다. 곧 그 누구도 삶을 홀로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패러디 시학에서 그가 주장했던 바와도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패러디’라는 학문적 전제 배후에 놓인 것은 사실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와 이웃하기를 바라는’ 어떤 윤리적 지향을 내포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다른 마음에 기대는 것, 바로 그것이 시 「희망」에서 시인이 희망했던 바처럼 보인다.
따라서 정끝별 시인의 시에서 근본적인 서정성은 자신과 타자를 연루시키려는 ‘관계함’ 그 자체라고 보아도 좋다. 그것은 다르게 말해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의지이다. 장소의 어원인 ‘토포스topos’란 본래 고대그리스 사회에서 기억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기억하려면 그가 특정한 장소에 위치해 있다고 연상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끝별 시에서 전개되는 상상력의 구조는 타자와 관계하기 위한 토포스적인 운동인 것처럼 보인다.
반 평도 채 못되는 네 살갗
차라리 빨려들고만 싶던
막막한 나락
영혼에 푸른 불꽃을 불어넣던
불후의 입술
천번을 내리치던 이 생의 벼락
헐거워지는 너의 팔 안에서
너로 가득 찬 나는 텅 빈,
허공을 키질하는
바야흐로 바람 한자락
「와락」 전문(제4시집 와락)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은는이가」 부분(제5시집 은는이가)
시인이 시 「와락」과 「은는이가」와 같은 작품에서 부사어와 조사처럼 문장에서 부차적인 성분을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두 작품의 주제 자체는 특별한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선명하다. 두 작품이 그리는 것은 사랑의 자세이다. 서로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는 순간을 그리고 있다.
다만 「와락」이라는 작품에서 표현한 사랑은 오인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우리가 감지하게 되는 ‘나’는 격정에 사로잡혔으면서도 동시에 운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유를 갖춘 자이기 때문이다. 우선 상대방을 끌어안는 자세는 “막막한 나락”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아찔함과 “천번을 내리치는 이 생의 벼락”에 맞는 충격을 동반하는 순간으로 묘사된다. 한편 ‘와락’과 ‘나락’과 ‘벼락’과 같은 시어의 운율감은 전체적인 시의 맥락을 부드럽게 읽도록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와락」은 일견 격정적 사랑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정뿐만 이성적으로도 충만하고 안정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에 가깝다.
사랑이라는 주제와 문장성분의 관련성은 시 「은는이가」에서 두드러진다. 「은는이가」에서 조사는 흥미롭게도 ‘격’을 지니지 않는다. 본래 ‘은는이가’와 같은 주격조사는 주어, 즉 문장의 주체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를 가리킨 이후에 조사의 존재는 잊어도 좋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할 ‘은는이가’가 오히려 따옴표를 통해 전경화된다. 이로써 ‘은는이가’는 주격조사가 아니라 존재들을 잇는 관계항으로서 기능한다. 바로 이것은 정끝별 시인이 주목하는 제재가 사랑이라는 점과 관련한다. 사랑은 서로 “비문(非文)”인 두 존재를 하나로 잇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기서 주격조사는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일방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이 사랑한다는’ 관계함 자체를 표현하기 위한 매개항으로 역할을 변경하는 것이다.
4. 이웃한 우주
정끝별 시인이 부차적인 문장 성분인 부사와 조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그의 시가 관계를 잇기 위한 시도 자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의 시는 관계의 어떤 이상향을 미리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 「현 위의 인생」 「희망」 등에서 표현했듯 시인에게 관계한다는 것은 위안과 평온을 야기하는 사건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와락」에서 표현했듯 정끝별 시인에게 사랑은 두 존재를 위태롭게 만든다기보다 운율적 조화를 이루게 만드는 감정에 가깝다. 그리고 지금까지 설명한 바에 기대어 새 시집 모래는 뭐래를 이해할 수 있다.
# 불과 57광년밖에 떨어지지 않은 내 가장 가까운 별
적색왜성의 이 별은 항성이다
이보다 작으면 별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작고 어두운 별
주위를 도는 큰 별 하나 없는 별
이 별은 어떤 별빛을 사랑해 밤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그 별을 바라보다 그 별의 글썽이는 빛을 훔쳐 와 잠시 빛나기도 했다
작지만 항상성을 잃지 않는 별
그 빛이 자해로 폭발하는 태움의 빛이었는지
큰 별이나 인공위성에 반사된 빛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깜빡, 네가 닿지 못한 길에 내 발길을 덧대고
깜빡, 네가 잇지 못한 시선에 내 눈빛을 잇대고
네 삶의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을 다른 나와 다른 시간과 다른 윤리를 비추며
어쨌든 너와 너와 너로 빚은 빛으로 다시 나의 빛을 빚겠다는 거, 그건 내 전부를 너와 너와 너에게 다 쏟겠다는 거
어둡지만 지지 않는 별
그 빛이 가물가물 시력을 잃어가는 너의
아직도 별이 빛나는 밤을 지켰으면 해
그리하여 네가 잠든 지붕 위가 조금 더 밝았으면 해
가을 자작나무 잎들처럼
겨울 자작나무 껍질처럼
그렇게
흔들리다 너와 함께 빨려들었으면 해
「이 시는 다섯 발톱의 별 시입니다」 부분(제7시집 모래는 뭐래)
정신의 토포스적 운동은 이 작품에서도 중핵을 이룬다. “불과 57광년밖에 떨어지지 않은 내 가장 가까운 별”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정끝별 시인의 시에서 57광년은 시간적 거리가 아니라 공간적 거리로 연역되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주가 존재했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얼마나 가까운가’라는 물음으로 자연스럽게 치환되어서 “내 가장 가까운 별”이라는 대답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답이 가능한 이유는 이 작품이 두 존재의 윤리적 거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깝다’라는 표현은 두 존재의 윤리를 좁힐 수 있다는 믿음, 즉 “네 삶의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을 다른 나와 다른 시간과 다른 윤리를 비추며” 성립한다. 존재의 윤리는 지극함에 기초한다. 여기서 정끝별 시인의 윤리의식은 이러한 지극함이야말로 ‘빛’이라는 화두에 도달한다. 윤리가 곧 빛이라면, ‘빛’을 뿜는다는 것은 별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너에게 지극해질 것이기에 “어쨌든 너와 너와 너로 빚은 빛으로 다시 나의 빛을 빚겠다는 거, 그건 내 전부를 너와 너와 너에게 다 쏟겠다는 거”라는 선언은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정끝별 시인의 시 전체에서 반복하는 표상인 ‘자작나무’가 여기서도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해설했던 첫 시집의 「기억은 자작나무와 같아 2」를 떠올려 보자. ‘나’와 자작나무를 관계하도록 만든 것은 두 존재가 똑같이 ‘불운’을 겪고 있다는 인식에 기초했다. 똑같이 삶의 고통을 짊어진 존재라는 동일성의 논리가 두 존재를 가깝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한 인식 속에서 시인은 환한 빛이 드리운 숲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서 제7시집의 「이 시는 다섯 발톱의 별 시입니다」는 숲길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존재가 따르는 길이란 다른 존재이다. 빛이란 다른 존재를 향한 지극함이다. 물론 당신이 얻어낸 빛이 스스로 빚은 것이 아니라 빌린 것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의 몸이 낡아가며 눈이 멀 수 있다. 하지만 방향은 정확해야 한다. 타자는 환한 장소다. 타자로 향하는 몸이 빛이다. 바로 이것이 정끝별 시인의 시에 그려진 따스한 우주인 셈이다.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됨. 주요 평론으로 「황야는 어떻게 증언하는가: 2010년대 현대시의 동물 표상」 「정확한 리얼리즘: 작가 이산하의 문학에서 답을 청하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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