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발해(渤海)의 건국과 발전
1. 발해(渤海)의 건국
가. 당나라의 이민족 분열정책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요동지방을 안동도호부 관할에 놓고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하여 보장왕(寶藏王)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였으나 반란을 꾀하여 소환하고 연이어 손자 보원(寶元), 아들 보덕(報德)과 덕무(德武)를 파견했으나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하여 소고구려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 거란인, 말갈인을 영주(榮州, 朝陽)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뒤 감시하였다.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건국 과정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靺鞨人)은 거란인(契丹人)의 반란을 계기로 대조영(大祚榮)은 영주를 탈출하여 천문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동모산(東牟山, 돈화)을 근거로 자립하여 698년 진국왕(震國王),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후에 발해(渤海)로 고쳤다. 이로서 남부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2원적 민족구성으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국호 “고구려국” 사용하였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寶藏王)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 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 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대조영(大祚榮_) | 대진(大震). 발해(渤海, 698~926) |
류득공의 발해고(渤海考)ᆞ이종휘의 동사(東史)ᆞ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ᆞ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ᆞ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ᆞ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ᆞ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등 조선 후기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적극 인식했다. 특히 발해고와 대동지지는 남북국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발해의 발전
왕 | 연호 | 내용 |
2대 무왕(大武藝. 719~737) | 인안(仁安) | 만주와 대부분의 연해주를 차지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막기 위해 일본과 돌궐과 통교했다. 아우 대문예(大門藝), 사촌동생 대일하(大壹夏), 외숙 임아상(任雅相)을 시켜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라고 불렀던 헤이룽 강(黑龍江)이 동류하여 쑹화 강(松花江)과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을 치는 한편 14년 732년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산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韋俊)를 죽였다. 당은 33대 신라 성덕왕때 733년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門藝, 대조영의 차남)과 김사란(金思蘭)을 시켜 발해 남부를 공격했다.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高仁義)외 24명을 외교문서와 함께 보냈다. |
3대 문왕(大欽茂. 737~793) | 대흥(大興.737), 보력(寶력.744) | 통치체제 3성 6부를 정비했다. 당과 화친을 맺었다. 국립대학격인 주자감(冑子監)을 설치했다.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상경, 동경으로 옮겼다. 신라와 상설교툥로(신라도)를 개통했다. 많은 유학생을 당에 보내 빈공과에 합격했다. 758년 보덕장군 양승경(陽承慶)과 귀덕장군 양태사(陽太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안록산난(安祿山亂756~757. 연국. 연호 성무)을 계기로 소고구려국에도 힘을 뻗어 요동까지 지배하였다. |
6대 성왕(成宗, 大華興 , 793~794) | 중흥(中興) |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
10대 선왕(宣王, 大仁秀. 818~830) | 건흥(建興) | 말갈을 복속시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최대의 판도(동 沿海州, 서 遼河, 남 咸南, 북 黑龍江)를 이룩하여 5경, 15부, 62주 등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게 된 시기이다. |
15대 대인선(大諲譔, 907~926) | | 926년 거란에 멸망함 |
3. 발해의 제도
발해는 중앙에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3성과 충부(忠部. 吏部), 인부(仁部. 戶部), 의부(義部. 禮部), 지부(智部. 兵部), 예부(禮部. 刑部), 신부(信部. 工部) 6부제로 하여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대내상)이 선조성 장관 좌상과 중대성 장관 우상으로 하는 제도였다.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대내상 | 충부(忠部. 吏部) |
인부(仁部. 戶部) |
의부(義部. 禮部) |
지부(智部. 兵部) |
예부(禮部. 刑部) |
신부(信部. 工部) |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좌상 | |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우상 | |
지방은 국도인 상경(東京城, 용천부)을 중심으로 중경(中京),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의 5경이 있었으며 전국을 15부(府), 62주(州). 현(縣)으로 정비하였다.
15府(都督) 62州(刺史) 縣(縣丞) 刺使史
5京
5경 | |
상경용천부(東京城) | 黑龍江城 永安縣 牧丹江 渤海鎭 : 당 장안성 영향 |
동경용원부(琿春) | |
중경현덕부(敦化, 東牟山) | |
서경압록부(臨江) | |
남경남해부(北靑) | |
군사제도는 중앙군으로 10위가 있었으며 각 지방에 지방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4. 발해의 멸망
가. 발해 이질적인 백성 구성
발해인은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력 귀족 가운데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말갈인들의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발해에서 자주 이탈했고 거란의 침입에 전 백성을 동원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나. 내분 격화
900년 무렵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었다.
다. 거란의 침입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보름만에 망했다. 고구려계 지배층은 고려에 귀화하였다. 왕자 대광현(大光顯)은 고려에서 왕계(王繼)라는 성을 주어 동족의식을 심어주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 유민은
라. 부흥운동
발해 유민들은 약 200년간 부흥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처음에는 대씨(大氏)가 압록부(鴨綠府, 臨江) 일대를 중심으로 후발해(後渤海, 926년? ~ 938년?)를 나중에는 열씨(烈氏)가 정안국(定安國, 938~938)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열만화(烈萬華, ?~976년?, 재위: 935년 또는 938년?~976년?)는 발해의 왕족이자 정안국의 첫 번째 왕으로서 935년을 전후로 해서 정변을 일으켜, 대씨 정권이었던 후발해를 무너뜨리고 오씨 정권을 세운 뒤 국호를 정안국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970년에 정안국 국왕 열만화라는 이름으로 송에 서한과 공물을 전했다. 그 뒤는 불명확하며 그 전에 죽었거나 내분으로 자신이 암살을 당해 열씨 정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976년을 전후해서 자신의 찬탈을 도와준 오제현(烏齊顯)의 후손인 오현명(烏玄明, ? ~ 986년 재위: 976년 ~986년)이 정안국에서 정변을 일으켜 두 번째 왕으로 등극했다.
④ 왕권의 전제화
독자적 연호 사용 : 인안, 대흥, 건흥 -중국과 대등함, 왕권의 강대함 표현
관료 조직 정비 : 당의 3성 6부제 도입 독자적 운영, 중정대
왕위 계승의 장자 상속제 확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