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단
탁란/최길하
배롱나무 가지 가득
눈 녹아 맺힌 염주
8만 4천 눈동자
알알마다 내가 섰다.
이슬도 한 칸
경포호도 한 칸
천둥오리 붉은 눈
흔들리는 술잔도 한 칸
칸칸마다 내가 섰다.
법석
이 시는 입말과 문자말의 차이. 시의 음악성 그리고 회화성.
화엄경과 법화경(묘법연화경)을 설명하고자 쓴 시다.
유식한 지식의 말과 쉬운 지혜의 말이 있다.
유식한 지식의 말은 글이 우리 고유의 음악적 말을 오염시킨 현대문어체를 말한다.
문자로 인해 우리 말은 격음화로 변하며 문어체로 점점 변하고 있다.
한문도 그 오염원인이 되었지만 한문은 리듬과 음운학을 잊지 않았다.
'운'이니 '율시'니 '절구'가 그것이다. 한문은 운율을 많이 염두에 둔 문장을 구사했다.
그런데 학교와 서양의 인쇄물이 들어오며 문체가 일시에 변한다.
운율 운문은 깡그리 무시된다.
문어체는 무엇을 설명하기엔 적당한데 넓이가 없다.
확장성 영혼이 없는 말이 된 것이다.
설명을 하려니 점점 유식한 말이 첨부되는 것이다.
논문 평론을 보자.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는 것이 그 본분인데 어떤가? 점점 어려워진다.
시나 경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고대소설이나 글의 문체들은
3박 4박, 그러다 휘돌아 감는 늘림박이 들어간다.
더 주요한 것은 모두 은유 비유로 시와 문장의 뜻을 넓혀놓았다.
그런데 서양학문은 일물일어설이라해서 맞춤으로 직설화법 명쾌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개념이 중시되는 학문이다.
개념 속에 숨은 이치인 물리(물질의 이치)는 뛰어넘어 공식이나 법만 외운다.
일본이 그 근본은 멀리하는 교육방법을 택했다. 단기간에 기능만 빼먹고
응용력 생각의 힘은 없게 한 것이다.
해방이 되어도 그 교육방법은 그대로 였고 80년대까지 이어지다. 90년대 이후부터
이치 생각하는 교육으로 비로소 변한다. 수능의 언어능력에 물리의 지문이 간간이
들어가면서다.
개념을 추구하고 이론을 추구하는 글이 인쇄물과 판을 치면서 우리말의 음악성은 오염되었다.
이런 교육이 예술세계 지혜의 언어에서는 큰 오염원이 된 것이다.
시를 '운문'이라 한다. 리듬과 억양에 상호 거슬림이 없이 흘러가도록
물길을 터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외형율과 내재율로 조종한다. 외형율은 글자수의 리듬이다.
숨 호흡, 맥박 리듬에 문장 절구를 싣는다. 몸의 생물학적 동력을 따라가니
노동이나 운동이 훨씬 에너지 소비가 줄어 능율이 오르는 것이다.
논메기소리 모내기소리 땅다지는소리... 노동요가 그것이다.
그게 주로 3박 4박 3글자 4글자다.
그래서 3-4음절 4구를 묶어 한 장 한 문장을 구성한다. 흥이 나고 신명이 나는 것이다.
외형율이 몸의 동력이나 나무의 가지 같은 것이라면 내재율은 속마음 나무의 속살,
무늬 같은 결이다.
외형율은 입말이다. 경전이나 옛날 딱지본 소설 춘향전 장화홍련전 심천전
모두 구어체 4박자다. 그래서 모두 소리내어 읽는다. 율동의 언어이기 때문에.
춤의 언어이기 때문에. 몸을 일렁일렁하면서 리듬에 말을 싣는다.
"하늘 천 따지 가물현 누르황" 하면서. 그랬더니 노래 가사가 쉽게 외워지듯이
어려운 글도 4박자로 입에 붙치니 쉽게 외워지는 것이다.
내재율은 소리를 내면 반감된다. 외형율은 음악이니 노래로 불러야 하는 구조지만
내재율은 속무늬이므로 소리내어 읽으면 미세한 진동이 그만 사라진다.
그래서 외형율은 박자 리듬 글자수로 가고
내재율은 은유와 비유로 간다.
시는 논문이 아니다. 논문은 설명이지만 시는 음악이고 은유다. 음악이고 말이다.
패턴의 흐름이다. 작곡이다. 말은 어렵게 하면 안되듯이 시를 어려운 문자로 하면 안된다.
물론 콘크리트에 자갈를 넣어 구조를 단단하게 한다. 드문드문.
은유가 어려운데요? 시가 은유로 가물가물하여 어려운 것은 시의 생명이다.
단어가 어렵지 않아야 된다는 뜻이다. 단어가 죽은 삭정이처럼 굳으면 안되고 봄에
나오는 새순 같아야 된다는 뜻이다. 죽은 글과 산 글 차이다.
세종시대 때 우리 말과 지금 우리말을 같은 문장으로 비교해보자.
"불휘 깊은 낭 바람에 아니 휠져 곶 좋고 여름 하나니"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져 꽃 좋고 열매 많으니"
격음화가 많이 되었지 않은가? 소주가 쏘주로 자장면이 짜장면으로
예술성과 심성도 격음화 거칠고 '쎄'졌다.
프랑스 말은 입에 커다란 '눈깔사탕'을 굴리면 말을 하듯이 부드럽게 굴린다.
그게 예술이 됐다.
이에 반해 미국식 영어는 서부영화처럼 다이나믹 해졌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 '팝' 예술, 팝 문화가 만들어졌다.
언어, 말의 힘은 이렇게 문명 문화의 물줄기를 틀어간다.
우리 말은 굽이졌던 강물이었다. 이제 점점 곧게 펴져서 급류가 되고있다.
문학이나마 우리말을 잘 살려서 말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우리 문화를 살리자.
화엄경과 법화경(묘법연화경)이란 뜻은
배롱나무 가지에 눈이 녹아 얼음구슬(염주)를 칭칭 감고 있다.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이 보석를 칭칭 감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이멜다'처럼 관세음보살이 사치스럽고 물욕이 있어서 일까?
물방울구슬(삼라만상)에 서로서로 비친 것이 이 세상이란 뜻이다.
나 '아상'이 아니라 서로서로 투영이다. 연기법이다. 네가 있어 내가 일어난 것이다.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서로 비치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연기사상이다.
콩알만한 물방울도 한 칸. 시오리 둘레길 경포호수 물방울도 한 칸이다.
천둥오리 붉은 눈망울도 한 칸, 술잔도 한 칸
당신 눈동자도 한 칸, 내 눈동자도 한 칸
탑(나) 한 채씩 비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가 아니다. '아상'을 지우자. 당신에게 나를 슬어놓으면(탁란)
내가 당신을 나처럼 사랑 하지 않겠는가?
낱낱(법화경)이 하나의 오케스트라(화엄경)를 이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