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신의 김성수목사에 대한 결정인 두번째 주제다.
2)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고 있다.
비판 =>김성수의 주장에 의하면 정죄 심판의 원인이 사람의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심판자이시며, 정죄 심판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돌트 신경 Ⅱ.6).
성경은 교훈하기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좌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그는 이해하기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이미 이루신 성도가 이 땅에 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강림이 아직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약속으로 보며, 성령께서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으로 믿지만, 그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구원을 주장함으로 우리의 믿음이나 삶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더 이상 인간은 책임 있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은혜 언약의 특징이 훼손되며 은혜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벌코프는 선택보다 언약을 중요시 했다. 벌코프는, 선택이 마지막에 오는 것이었다.
“선택은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 첫 번째 말이지만, 신자가 고백할 때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지평선을 나타내주며, 언약의 영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돌트회의에서 핵심 이슈중 하나는 선택의 작정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돌트신경은 첫째 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아야 할 인류(제 1항),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아들을 보내심(제 2항),
복음 설교자를 보내심(제 3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음(제 4항),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제 5항), 어떤 사람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며 어떤 이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옴(제 6항), 그리고 나서 제7항에서야 제한된 수의 사람들을 오직 은혜로 선택하심이 나온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가장 먼저 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은밀한 뜻으로서 창조 이전의 오묘한 일에 속해 있으며, 언약은 시간 속에 드러난 일로서
언약 백성에게 속해 있어(신29:29), 선택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앞서게 하고 지배하도록 하면,
언약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어,
거룩한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두번째 주제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다.
김성수의 주장에 의하면 정죄 심판의 원인이 사람의 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원인이 아니라 심판자이시며, 정죄 심판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다(돌트 신경 Ⅱ.6).
성경은 교훈하기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좌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한다.
사실 액면 그대로 보자면 김성수목사의 설명은 틀려보인다.
그런데 이전 포스트에서 예를 든것처럼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저지를 것을 모른체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이후 인간들이
죄로 타락한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며 인간이라는 불량품을 창조하신 것이나 진배없다.
즉 김성수 목사가 이렇게 설명한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과 그 사랑을 피조물들에게 가르치시려는
하나님차원에서의 은혜의 역사를 설명하는 와중에 설교된 이야기인데 이는 죄로 타락되어질 것을 이미 아셨고
그 죄라는 개념이 은혜와 사랑이라는 대척점을 설명하기위한 교보재임을 밝히기에 이 죄라는 것도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것이라는
것을 밝힌것이다.
생명의 의미를 가르치려 사망의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곧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일인데 단지 죄는 인간이 뭔가 잘못해서 타락했다는 선악판단에 그 하나님의 의를
가져다쓰는 해석만하다보니 갑자기 죄의 원인자로써 하나님이 된다하니
쌍수를 들고 이단이라고 하는것 같다.
그는 이해하기를, 언약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이미 이루신 성도가 이 땅에 온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강림이 아직 완전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에게 신앙을 요구하는 약속으로 보며,
성령께서 신앙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으로 믿지만, 그는 창세전에 이미 완료된 구원을 주장함으로 우리의 믿음이나
삶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합신측에서 김성수목사의 설교를 제대로 파악했다.
이것이 이분들의 한계인듯 하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바울의 삼층천의 이야기는 삭제되어야할 구문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역사적, 시간적으로만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면 유대인들과 다르지 않다.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건 재림 예수를 기다리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아직 일어난것은 아니니까 우리에게 요구된 신앙을 계속 영위하게 하신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솔직히 예수가 정말로 오시기를 바라는 것인지 또한 그 신앙생활을 굳건히 지키는 것만이 그 예수가 오셨을때
당당히 구원을 받을만한 삶을 살았다라고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합신의 의도대로 창세전 이미 완료된 구원이 아니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냥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순간을 기다리며 그때에 심판의 날에 우리의 신앙은
평가받아 천국과 지옥행이 결정이 되는 것이 될것이다.
곧 재림하셨을때나 구원의 사역이 완료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직 구원받지 못한것이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되며 바울은 삼층천이라는 개꿈을 꾼것이 된다.
계시록은 당연히 세대주의적으로 시간과 역사속에서 발생할 미래의 이야기로 인지할 것이란 소리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더 이상 인간은 책임 있는 당사자가 아니므로 은혜 언약의 특징이 훼손되며 은혜언약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벌코프는 선택보다 언약을 중요시 했다. 벌코프는, 선택이 마지막에 오는 것이었다.
“선택은 하나님의 행위에 있어서 첫 번째 말이지만, 신자가 고백할 때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것이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지평선을 나타내주며, 언약의 영역을 가능하게 합니다.”
합신의 주장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게된다.
곧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를 훼손시키는 것이 인간의 책임있는 개입이 아닌가.
하나님의 선택에 개입하고픈 것이 오히려 그 은혜의 정의를 침범하는 것이 아니냐말이다.
왜 인간의 전적무력을 주장하는데 은혜언약이 훼손되는 것이라고 보는가.
은혜가 아무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김성수 목사는 줄곧 그 은혜를 강조하기위해 대립적인 인간의 노력과 열심의 무력함을 주장해왔었는데 뭘 비판한지 모르겠다.
돌트회의에서 핵심 이슈중 하나는 선택의 작정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돌트신경은 첫째 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받아야 할 인류(제 1항),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아들을 보내심(제 2항),
복음 설교자를 보내심(제 3항),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음(제 4항), 불신앙의 원인은 사람에게 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제 5항), 어떤 사람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시며 어떤 이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나옴(제 6항), 그리고 나서 제7항에서야 제한된 수의 사람들을 오직 은혜로 선택하심이 나온다.
그러니까 결국 선택은 가장 먼저 말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송영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이 피조물들에게 고백될 타이밍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잣대인 것이며 우리가 인지할 수 있을때가
그때일 뿐이다. 우리는 맨 마지막에 그 선택의 작정을 알게 되겠지만 하나님 차원에서는 이미 알고 계신 것이다.
그 선택과 작정을 하나님이 아직 결정내리시지 못하고 인간들을 관찰하며 기다리고 계신것으로 보는것이 아니라면
김성수 목사의 주장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은밀한 뜻으로서 창조 이전의 오묘한 일에 속해 있으며, 언약은 시간 속에 드러난 일로서
언약 백성에게 속해 있어(신29:29), 선택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앞서게 하고 지배하도록 하면,
언약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이 설 자리를 상실하게 되어,
거룩한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왜 창조전 선택이 역사의 언약의 특징을 훼손시키는가. 그렇다면 계시록의 예수그리스도의 승리하심을 알아서
우리의 은혜의 감동이 훼손된다고 보시는가.
선택이 이 역사에서 앞선다고 해서 우리에게 드러난 정보는 없는 것이다.
곧 누가 구원 받을지 유기될지가 밝혀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합신측의 오지랖일 뿐이다.
은혜의 수혜자들에게 더 부어주실 믿음과 순종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라는 억측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하여 벌써부터 걱정되어 반기를 드는게 아닌가 한다.
굴; 고멜과 호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