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 믿음 (롬1:17)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아멘.
이 ‘믿음’이라는 말은, 얼마나 우리에게 친숙한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이라는 말을, 우리는 굉장히 오해하고 있다고요. 그래서 많은 엉터리 같은 일을, ‘믿음’이라는 말을 오해함으로 해서, 우리가 저지르고 마는데…, 자, 오늘은 그 믿음에 대해서 명확히 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여러분은 언제 예수를 믿게 됐습니까? 사실은 이게 나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은! 언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당신은 언제 구원을 받았습니까? 당신은 언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런 질문이, 우리 6-70년대 80년대까지 한국기독교를 병들게 한, 그러한 질문이라고요. 당신은 언제 믿게 되었습니까? 언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고요. ‘언제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명확히 자기가 구원받은 날을 기억하고 있는데, 나는 그날이 없는 거야? 그런 막 안에서 사이다가 튀는 그런 경험이, 왜 나에게는 없지?’ 그래서 불안해하기 시작한다고요. 사람들이! 그래서 자꾸 자기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돌아간다고요.
‘아! 언제일까? 나에게는 그게 언제이지? 내가 인식하지 못한 그 순간이 있었을 텐데…. 아! 그때 뜨레스 떼아스 가서, 세 번 거품 물고 쓰러졌을 때 그땐가? 아! 아니면, 모 부흥사가 왔을 때, 그 집회에서 내 온몸이 전기가 오르는 듯한 그런 체험을 했는데, 그땐가? 아니면, 어떤 예배에서 정말 내 눈알이 빠질 만큼 울었을 때,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데, 그렇게 울었을 때, 그땐가?’ 막 이렇게 자기의 체험과 경험을 찾아 올라가기 시작했다고요. ‘아! 그 때가 내가 믿은 순간일 거야!’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믿음이 오는데, 그 성령은 언제 오는지, 어디서 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고 그런다고요. 저도 언제 제가 믿게 되었는지, 언제 제가 구원을 받았는지 저도 몰라요. 그 날짜를! 물론 지금은 제가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 믿음이 저에게 왔는지는 저는 몰라요.
그래서 제가 찬송가 중에 제일 부르기 곤란한 찬송가가,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그 십자가 현장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저는 거기 없었거든요. 그런데 자꾸 물어보는 거예요.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아니에요. 저는 거기 없었지만,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리에 있었지만, 저의 이 지금 이 실존은, 거기에 없었다고요. 그런데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확실하단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믿음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엉터리 같은 일을 저질렀습니까? 사람들은 ‘믿음’ 하면, ‘이 믿음만 가지면,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라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아왔어요.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느냐?’라는 그런 말을 우리가 듣고 자랐다고요. 그래서 내가 능하게 모든 일을 하기 위해서, 이 믿음을 키우려고 우리가 스스로 많이 노력을 했다니까요. 뭐 백 일 작정기도! 천 일 새벽기도! 사십 일 금식기도! 뭐 이런 것들을 막 하기 시작했다고요. 믿음을 키우기 위해서! 그 믿음은 왜 키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서! 만약에 그렇게 해서 믿음이 주어진다면, 그게 왜 은혜(恩惠)이며, 선물이겠습니까?
제가 옛날에 고등학교 때, 하도 성경이 안 믿겨져서요. 제가 고등부 회장이었거든요. 교회에서! 하도 그런데 성경이 안 믿겨져서, 전도사님한테, ‘전도사님! 제가 이게 도저히 안 믿겨집니다. 어떻게 해야 이게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그 전도사님이 저한테, ‘그냥 믿어!’ 그러더라고요. ‘아니, 안 믿겨지는데 어떻게 믿어요?’
하도 제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 전도사님이 저한테, ‘불러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거를 그냥 안 믿어질 때마다, 의심이 들 때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것도 그냥 ‘믿습니다!’ 하면 안 되고, 저희 여의도 쪽 발음으로 ‘믿 ~ 습니다!’ 이렇게 하루에, 한 수 백 번 외치면, 믿어진다는 거예요. 그런데 믿어집니까? 그렇게 해서?
만약에 그렇게 ‘믿습니다!’ 해서, 믿어졌다면, 그거는 곧 흔들려 버릴 모래 위에 쌓은, 사상누각(沙上樓閣) 같은 믿음이에요. 그것은 곧 흔들린다고요. 그건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라고 하는 것이지, 믿음이 아니라 말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믿습니다!’ 해서, 그렇게 해서 믿어진다면, 믿음이 커진다면,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게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이겠습니까?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거저 주어지는 게, 은혜라잖아요? 그 믿음은 은혜라고 배웠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러면 그 믿음은, 우리가 그렇게 노력해서, 우리가 키울 수도 없는 거고, 우리가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익히 배우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그 ‘믿다’라는 말의 명사형이,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자꾸 오해하시는 거예요. 성경의 이 개념은, 국어사전의 개념을 갖고 따라오면, 상당히 오해가 될 만한 소지가 많은 단어들이 많이 있다고요. ‘부흥(復興)’이라는 말이라든지, ‘형통(亨通)’이라는 말이라든지 이런 말들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국어사전이 말하는 바와 다르단 말이에요. 이 믿음도 역시, 국어사전이 말하는 바와,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말은, 다르단 말이죠.
자,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고 문제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거예요. 먼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을 살펴볼 텐데, 마치 믿음이,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그죠? 그러면 앞의 믿음은 뭐며, 이 뒤에 믿음은 뭔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고, 이 ‘하나님의 의(義)’가,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것으로 설명이 되어져 있다 말이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의(義)’가 뭐냐 말이에요? 우리를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이 ‘하나님의 의(義)!’
성경에서 말하는 이 ‘하나님의 의(義)’는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식들에게,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노릇을 해 주시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다우심! 그것을 ‘하나님의 의(義)’라고 그래요. 아버지가 끝까지 자식을 위해서, 아버지 노릇을 해주시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의(義)’라고 그런다고요. 믿음은 거기서 출발하는 거예요.
여기서 벌써 힌트가 가지요? 그 믿음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로부터 그 믿음은 출발이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이 뭡니까? 복음(福音)!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데, 그 복음이 뭐예요? 복음! 영어로 복음이 뭡니까? ‘굳 뉴스(Good News)!’예요. 그죠? 굳 뉴스!
여러분들에게 굳 뉴스가 많죠? 굳 뉴스! 로또에 맞았다. 굳 뉴스!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 들어갔다. 굳 뉴스입니다. 그죠? 아파트 당첨됐다. 굳 뉴스죠? 그런데 로또 맞아서,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 여러분 보셨습니까? 그러면 그 굳 뉴스는 영원한 굳 뉴스는 아니에요. 그죠? 좋은 대학 들어가서, 그 좋은 머리로 사기 치다가 감옥 간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좋은 대학 들어간 게 영원한 굳 뉴스는 안 되는 거예요. 아파트 당첨 되어서, 그걸로 투기하다가 쇠고랑 찬 사람들 많아요. 그거 굳 뉴스 아닙니다.
그러면 영원한 굳 뉴스는 뭘까요? 복음(福音)! 영원한 복음이 뭐예요? 한 가지예요. 성경에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살려 내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품에 안고, 그 하나님의 진노를, 그 아들에게 다 쏟아 부으셔서, 그를 죽이시고, 살리시고, 그 삶을 우리의 삶에 다 전가(轉嫁)해 주신 것!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죄를 짓죠? 그 죄는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여러분! 구원 받았는데, 지금 계속 죄 짓지 않습니까? 그거를 예수님이 아이로 태어나셔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그런 완벽한 삶을 살아내시고, 그거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우리가 이렇게 엉터리 같은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복음(福音)’이란 말이에요. 그게 복음인데, 우리 말고 다른 이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그게 정신 나간 소리죠? 그건!
아니, 어떻게 우리가 보지도 못한, 2,000년 전에, 그것도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살아났다고? 그리고 그가 산 삶이, 우리의 삶이 됐다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손가락질 안 하면, 그게 미친놈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걸 믿고 있단 말이에요.
복음은 우리와 관계가 있어야지, 그게 복음이 되는 거예요. 딴 사람들한테, 그게 복음이 아니란 말이죠. 그렇잖아요? 저기 강원도 삼척의 이씨 아저씨 아들이, 사법고시 합격한 것이, 구파발에 사는 강씨 아저씨하고 무슨 상관있냐고요? 그거는 이 이씨 아저씨한테는 복음이지만, 이 강씨 아저씨한테는 아무 의미가 없는 소리라고요. 복음 아니란 말이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우리에게 진짜 굳 뉴스! 복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 그 믿음이 이 굳 뉴스! 복음을, 우리와 훅업(hook up) 시켜줘서, 우리를 살려낸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믿음을 정확히 정의하고 있지 못하면, 그 복음이 여러분 것이 못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는 방법이, ‘믿음이다!’ 그래요.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이다! 그래요. ‘믿음이 너희를 믿게 한다.’ 그런다고요. ‘믿음으로 너희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단 말이에요. 무슨 말장난 같아요. 그죠? ‘믿음으로 너희들은 믿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단 말이에요. 이 앞의 믿음은 뭐고? 뒤의 믿음은 뭔가?
우리가 믿음을 공부하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먼저,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9절에, 아브라함을 이렇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8-9)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분명,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나갔다. 그런다고요. 믿음으로! 이 믿음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과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갔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믿음으로 나갔는지, 창세기 11장 31절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11:31-32)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32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누가 아브라함과 롯과 사래를 데리고 나왔습니까? 데라가 데리고 나왔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떠난 게 아니라, 성경은 데라가, 그 아들 아브라함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났다. 그런다고요.
아브라함이 그 식솔들을 데리고 떠난 게 아니라, 데라가,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자기의 명령권 아래에 있는, 그 식솔들을 다 데리고 떠난 거예요.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에서 나타나셨다고요.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셨단 말이에요. 사도행전 7장 2절로 가겠습니다.
(사도행전 7:2-3)
2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나타나셨어요.)
3 가라사대 네 고향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그랬단 말이에요.)
분명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그랬는데, 데라가 그 식솔들을 데리고 나온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성경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로 가면,
(여호수아 24:2)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 팔던 집안이었어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어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니었다고요.
정리를 해보면요, 갈대아 우르에 사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데라의 집안! 그 아들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너 지금부터 내가 지시할 땅으로 떠나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복을 내려 줄게!’ 그랬다고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그랬다고요.
우상을 섬기는 그 집에, 어떤 분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희들에게 복줄 테니까, 떠나라!’ 그렇게 꼬셨단 말이에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가장 바라는 게 뭐죠? 복이에요. 그 우상을 통해서 얻어내려고 하는 게 뭐예요? 복이라니까요! 하나님이 ‘그 복 줄게!’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했더니, 아브라함이 아버지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랬더니 데라가 ‘복 준다고? 떠나자!’ 그만큼 귀에 솔깃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왜 믿음의 조상을, 그런 우상을 섬기는 갈대아 우르에서 건져 내셨을까요? 당시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들 중에, 아주 괜찮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욥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동시대를 살아갔던 사람 중에, 아주 괜찮았던 사람! 욥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됐다면, 우리가 수긍할만한데, 하필 우상을 섬기던 그 집안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끄집어내신다고요. 왜 그랬을까요?
그 믿음이라는 거!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불가능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소나무뿌리 열두 개 뽑고, 삼각산에 가서 4박 5일 철야하고, 30일 금식기도하고 해서,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불가능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리에서, 건져 올리시는 것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데라와 그 식솔들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갑니다. 하란은 아직까지 갈대아 문명권이에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는요, 이미 4천 년 전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던 곳이었어요. 그런 문명의 도시였는데, 거기에서 건져내다가,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는데, 거기는 먹을 물도 없는 곳이에요.
당시 고대 사회 사람들은요, 자기 문명권을 떠나면, 누가 와서 해코지를 하거나, 심지어 죽인다 할지라도, 어디다가 하소연 못하는 그런 사회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친척들을 못 버리고, 식솔을 다 데리고 떠나는 거예요. 거기다가 무서우니까! 데라는 끝끝내 가나안까지 못 들어가고, 하란에서 머물다가 죽어요.
아브라함도 75세까지, 바로 그 하란에서 머문다고요. 본토! 친척! 아비 집! 떠나라 했는데, 아브라함이 뭘 한 가지 떠났습니까? 본토! 갈대아 우르 떠났어요? 여태 갈대아문명인 하란에 있었다고요. 친척? 롯을 데리고 가죠. 아비 집? 아비 집을 떠나요? 아비가 데리고 나갔어요. 이게 무슨 믿음입니까? 여러분! 믿음으로 출발했다라고 하는데, 이게 믿음이냐 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창세기 12장 1절 보세요.
(창세기 12:1-2, 5)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5절이요.)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하나님이 또 나타났어요. 하란에서! 그 아비 데라가 죽자,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또 나타나서, 그 이야기를 똑같이 또 하셨다고요. ‘떠나라! 왜 안 떠나냐?’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떠났어요.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갔어요. 들어가자마자 딱 보니까, 그 땅은 사람 살 땅이 아니에요. 거기다가 기근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금방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갈대아 우르까지는 너무 멀어 못가고, 애굽으로 자기 살길을 찾아서 떠나요. 하나님이 가라는 그 땅에서! 이게 믿음입니까? 창세기 12장 10절 보십시오.
(창세기 12:10-13)
10 그 땅이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다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애굽으로 갈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팔아먹어요. 왜요?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이런 남자 만나면 큰일 나는 거예요. 자기 살자고 자기 아내를 바로에게 준다니까요. 그리고 많은 선물을 받아요. 또! 이런 웬수가 있어요? 세상에! 이게 믿음이에요? 여러분?
아니, 이때가 아브라함이 75세 이후란 말이에요. 그러면 사라도 60세가 훨씬 넘었을 땐데, 얼마나 예뻤기에 그랬는지 몰라도, 사라를 왕에게 팔아먹는데, 한 번이 아니라, 나중에는 그랄 왕에게 그 이삭이 뱃속에 있었는데도 팔아먹어요. 참 취향도 독특하죠? 임신한 할머니를 얼마나 예뻤기에 말이죠? 그랄 왕이 또 취해요. 가서! 아브라함이 저지른 일이에요. 그게!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때리지 않고요, 바로를 때린다고요. 그러니까 바로가 아브라함을 불러서, ‘너 왜 나 속였냐? 다 가져가라! 니 와이프까지 다 데리고 가라!’
이렇게 약하고 겁쟁이이며, 믿음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이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이시기에, 이 애굽 왕! 바로가 당시 세계 최고의 통치자였던, 애굽 왕 바로가 벌벌 떨며, ‘나에게 이렇게 대접을 해줄까? 그분이 뭔가 대단한 분인가 보다!’라고 조금씩, 조금씩 알아간단 말이에요.
이 아브라함의 삶이 바로, 신앙인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여러분들의 삶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바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계속 실패하고 쓰러진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가르쳐 가신다니깐요.
그러면서 가끔 믿음을 보이기도 해요. 어떻게요? 그때 소돔과 고모라 왕을 비롯해서, 아홉 개 나라의 왕들이 연합해서, 막 싸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조카 롯이 잡혀간다고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분연히 일어나서, 자기네 집에 있던 하인들 있죠? 그 하인들 318명을 데리고, 거기 그 전쟁터가 어디라고, 거기를 가요? 호미 뭐 부지깽이 이런 거 갖고 가서, 싸워서 이겨요. 그리고 롯을 데리고 온다 말이에요. 그리고는 그 탈취한 재물들! 아브라함이 다 뺏어서 다시 갖고 오거든요.
그러니까 소돔 왕이 ‘그거 당신 다 가지시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유하게 하시는 것이지, 네가 나를 혹시 부자로 만들었다고 할까봐 나는 못 갖겠다.’ 그리고 재물에 대한 의연함까지 보여준다고요. 그리고 조카 롯에게, ‘네가 원하는 땅은 네가 가져라! 네가 남겨놓은 땅 내가 가질게.’ 이렇게 가끔 믿음에 승리한 모습도 보여준다고요.
그러면서 또 계속 실패해요. 또 와이프 팔아먹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에게 자손 준다 그러는데, 씩 웃으면서, ‘에이구! 웃기고 있네. 내 나이가 지금 몇인데…’ 이러면서, 또 불신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고요. 그리고 하녀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또 낳는다고요.
이렇게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또 한 번, 한 발짝 나가서 성공하고, 또 실패하고, 이게 우리의 신앙의 여정이라고요.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같이 계신다고요. 그러면서 아브라함을 가르쳐가세요. 가르쳐 가신다고요. 보세요. 창세기 17장 17절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줄께 그랬더니,
(창세기 17:17)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의 그 믿음이냐 말이에요? 하나님을 믿은 거예요. 이게? 사라는요? 사라도 ‘믿음으로 잉태치 못했는데, 잉태했다’ 그러죠? 히브리서 11장에서! 사라는 창세기 18장 10절 보시면,
(창세기 18:10-12)
10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도 웃어요. 비웃는 거예요. 하나님을! ‘하나님! 내가 지금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이렇게 나이가 늙어서, 마른 나무토막 같은데, 어찌 나에게 후사가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까?’라고 웃었다고요. 그래서 아들 이름이 ‘이삭’ 아닙니까? 웃음! ‘너 웃었다!’ 이삭 부를 때마다, 웃었다! 이삭! 웃었다! 얼마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믿음이, 지금 이들의 삶에서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척 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그 믿음의 소유자가 되더라니까요. 볼까요? 창세기 22장 16절로 갑니다.
(창세기 22:16-18)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하나님 앞에 드린 거예요. 독자를!)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드리니까, 하나님이, ‘됐다. 죽이지 말아라! 내가 네 마음 알았다.’ 그래 놓고 축복하시는데, 그 축복의 말이, 창세기 12장에 하란에서 아브라함에게 했던 이야기!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했던 그 이야기! 그 똑같은 언약이라고요.
여기에서는, ‘아브라함 네가 나에게 네 아들을 바쳤으니까 내가 너에게 축복해줄게.’ 그 약속은요, 그 축복은, 이미 창세기 12장하고 15장에서 약속이 되어졌던 거예요. 그러면 뭐예요? 어떻게 추론해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그 복을 주려고 작정하신 거예요. 그래놓고 이 형편없는 아브라함이, 그 복을 받을 만한 인간이 못되니까, 이 복을 주긴 줘야 되겠는데, 얘가 그런 자격이 안 되니까, 얘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인생을 통해서! 이 복을 주려고!
절대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수준으로 자라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칭찬해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작정하셨고, 그 작정되어 있는,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어 있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이 인생을 허락하신 우리를 끌고 가시는 거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삶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까지 똑같은, 그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다고요. 창세기 15장 5절에서도 똑같은, 그 축복을 하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게 뭐냐?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 창세기 22장에서, 자기의 100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 앞에 척 드릴 수 있게 되었느냐? 그 믿음이 도대체 뭐냐? 믿음이라는 게 뭐냐 하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의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건져내셔서,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히 순종하고 항복하고 그 믿는, 그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그 전체를 믿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 그런다고요.
그것은 우리에게 한 번에 주어져요. 우리가 차츰 차츰 차츰 믿음을 키워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주어진다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은 의인(義人)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의인은, 믿음이 없으면, 의인이 되지 못하잖아요? 성경의 논리상!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믿음이 있어야, 의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믿음을 갖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 전체가 우리 안에 다 들어와 있는데, 우리는 아직 내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객관적인 믿음만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주어진 이 믿음을, 나를 패고, 때로는 어르고, 때로는 달래고 하면서, 이게 나에게 이해되어지고, 인식되어지는 그 믿음으로, ‘아! 맞아!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구나! 나는 그런 지경에 있었는데, 내가 이렇게 건져내어짐을 받았구나!’라고, 내가, ‘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주관적인 믿음으로 바꿔 가시는 걸,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믿음은,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끝내시는 거예요.
우리는 ‘already not yet’이라는 교리를 들었죠? 우리는 이미 의인(義人)입니다. 그죠?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의인으로 완성되어질 거예요. 우리는 이미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한 그 믿음! ‘나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항복합니다!’라는 그 완전한 믿음의 완성의 소유자가 될 거라고요. 그러니까 이미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는 것이에요. 다!
우리는 의인이고,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믿음이 주어져 있는 자들인데,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것을 우리는 확인하고, 우리 것으로 만드는 바로, 내 이성으로 고백할 수 있는, 내 이성으로 항복할 수 있는, 내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이 땅에서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믿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어떤 믿음의 소유자였는지, 한번 보시라고요. 히브리서 11장 18절 보십시오. 그 겁쟁이인 아브라함이, 어떠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셨는지, 여러분이 여기까지 갈 거란 말이에요.
(히브리서 11:18-19)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하나님이 이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알고, 그 가슴에 칼을 꽂으려고 했다는 거예요. 분명히 죽은 자도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그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배웠다는 거예요. 그 인생은, 거의 실패가 대부분인 인생이었어요.
여러분은 그러니까 낙담하고 실망하지 마시라고요. 여러분은 그렇게 실패하고 실망해야, 여러분이 누군지 알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것을 살리셨으니, 그 큰 사랑이 얼마나 큰 건지, 알게 되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끼리 서로 ‘예수 믿는 자가 어떻게 저렇게 사냐?’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란 말이에요. 집에 가면 자기도 똑같잖아요?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 보고, ‘야! 예수 믿는 자가 어떻게 저렇게 사냐?’ 우리는 그 과정에 있는 거예요.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그 죄악과, 여러분의 그 실패와 좌절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요, 때로는 축복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저기만 소망하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로 실패와 좌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을 잘 믿다가, 돈 좀 벌었다고 해서, 오히려 세상 속으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아요?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빨리 찢어버려야 된다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는 첩경이 될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로마서 4장 1절을 보시면,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로마서 4:1-2)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개뿔도! 아무것도 안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우리의 삶이,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구원이, 바로 그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 그 대열에, 기드온! 입다! 바락! 삼손! 이런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모세! 모세가 무슨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어요? 사람 때려죽이고 도망간 거잖아요? 그런데 무슨 모세가 믿음으로 떠났어요? 바로 그 믿음! 우리가 살펴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그 믿음!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는 건져 내어짐을 받은 거지요.
기드온의 삼백용사요? 하나님은 왜 3만 명이 모였는데, 29,700명을 보내시고, 300명만 남겨놓으시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강제로 다 보내시잖아요? 12만 명의 대적과 싸워야 되는데, 3만 명이 그래도 싸우겠다고 모였는데, 막 인커리지(encourage) 해서 싸우게 하지 않으시고, 29,700명을 보낸다니까요. 300명만 딱 남기세요.
그리고 기드온보고 나와서 싸우라 그래요. 뭘루요? 항아리하고 횃불하고 나팔! 이게 무슨 무기예요? 이게? 그것은 ‘전쟁은 하나님이 한다.’라는 걸 가르쳐 주는 거예요. 기드온 같은 그 겁쟁이! 혼자 먹고 살겠다고 포도주 틀에서 밀 요만큼 가져다가, 혼자 까고 먹고 있다가, 하나님 나타나시니까, 놀래서 말이죠? 이런 겁쟁이를, 믿음의 선진으로 만들어 가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거라고요.
삼손은 평생 바람만 피다 갔어요. 뭐했어요. 삼손이? 그런데 믿음의 조상의 명단에 들어가 있다니까요. 바락? 드보라 치맛자락 붙들고, ‘당신 안 가면은 나 안 가요.’ 이런 바보였단 말이에요. 바락은요! 그런데 그들이 떡하니, 믿음의 조상의 대열에 쫙 들어가 있다고요. 얼마나 창피할까요? 그런데 그게 믿음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그들보다는 백배 낫죠? 저는 아무리 목숨에 위협이 와도, 마누라 두 번씩 안 팔아먹어요. 저는! 그런데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믿음은,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끝낸다. 그 모델이 누군지 아니? 아브라함이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거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이 훨씬 낫다니까요. 여러분은 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신약시대의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것은 이제 클리어(clear) 됐어요. 그죠?
그러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이 말을 이제 공부해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그랬냐면,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고 그래요. 그러면 어디에 기록이 되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게 구약 어딘가에 있겠죠? 사도바울이 그거 보고 지금 여기다 기록한 거 아닙니까? 하박국 2장 4절 보세요.
(하박국 2:4)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그리스도인에게!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가들의 개혁이념이었단 말이에요. 마틴 루터는 바로 이 구절! 이 말씀으로 거듭났다고요. 그러면 여러분도 이 말씀을 이해하면, 그 수준이 되는 거예요. 마틴 루터 뭐 별거예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바울이 하박국의 이 말씀을 인용했을 때는, 풀리(fully) 이해를 하고 인용을 했을 거라고요. 그러면 이 하박국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배경으로 그들에게, 하박국에게 주어졌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명확히 알거 아니에요?
하박국이라는 선지자는, BC 600년에서 610년 사이에 살던, 활동하던 선지자라고요. 그 하박국! 그러니까 지난주에 살펴봤지만,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망했어요. 남유다는요? BC 586년에 망했다고요. 그러면 BC 600년에서 610년 사이는 바로 고 사이에요. 위에 북 이스라엘과 남유대가 서로 망해가는 고 시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왜 이들을 망하게 했습니까? 우상을 섬기고, 불경건하고, 패역했기 때문에 벌주는 거죠. 바벨론에게 잡혀가게 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를 통해서 완전히 부셔버렸다고요. 그래서 사마리아 인들을 만들어 버렸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하박국이 살던 고 시대는, 가장 패역한 시대였단 말이에요.
그때에 하박국이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자기는 의인이에요. 그것을 전제(前提)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요. ‘하나님! 언제까지 이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저 불경건한 자들이 저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보고 계시겠습니까? 언제까지 나 같은 의인은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됩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대답 안하세요. 그런데 하박국이 악악거리면서, ‘하나님! 왜 대답 안합니까?’ 그런다고요. 하박국 1장 2절 보시면,
[ (하박국 1:2-4)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왜 대답 안합니까? 왜 공의를 베풀지 않습니까?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는데, 왜 공의를 베풀지 않습니까?’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어요? ‘나는 의인(義人)이다!’라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5절부터 대답을 하십니다.
[ (하박국 1:5-11)
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8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10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11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
너희는 민족들을 눈여겨보아라. 놀라고 질겁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너희가 살아있을 동안에, 내가 그 일을 벌이겠다. 너희가 듣고도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을 벌이겠다. 그러면서 ‘내가 바벨론을 들어서 너희들을 치겠다.’ 그래요.
‘아니, 하나님! 내가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 버릇 좀 고쳐달라고 그랬는데, 아니, 갈대아 사람! 그 바벨론 사람들! 야만인을 들어서 우리를 치다니요? 아니, 우리를 훈계하고 징계하려면,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렇게 훈계하는 거지, 저 야만인! 저 약소국을 들어서 우리를 치겠다고요?’
실제로 BC 586년에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쳐서 망하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하박국이 지금 따지는 거예요. ‘아니, 거기다가 저 악한 놈들은, 우리 것을 뺏어다가,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고까지 하고 있네요.’ 이게 우리의 삶이에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런다고요. 아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법대로 하려고 하니까, 가게 매상도 제대로 다 신고하고 하면, 세금 다 내고 하면, 그거 어떻게 장사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한다고요. 그러니까 실패하고, 때로는 망하기도 하고 그래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데 요 사람들은 우리를 이용해서, 우리는 법대로 사는데 망하고, 걔네는 더 잘 살아요. 그런 경우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다니까요. 여러분은 거꾸로 살 생각하고 계시죠? ‘하나님! 저들은 빨리 망하게 해주시고, 예수 믿는 나! 부자 되게 해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너 그거 만들어주러 이 땅에 오지 않았다. 나는 이거를 이용해서, 오히려 하늘의 것을 너에게 알려주고, 그것을 주러 온 것이지, 너 부자 되고,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려고 내가 이 땅에 온 거 아니다.’라고 이야기하신다고요.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우리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살고, 훨씬 더 얼굴도 잘 생겨야 되고, 밥을 많이 먹어도 날씬해지고… 이런 걸 원한다니까요. 기적으로 임해서 말이에요! 우리 기독교는 그런 기독교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그러니까 하박국이 지금 그러는 거예요. 하박국 1장 12절부터 보시면,
[ (하박국 1:12-17)
12 선지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14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15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16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17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륙함이 옳으니이까 ]
‘주께서는 눈이 맑으심으로, 악을 보시고 참지 못하시며, 패역을 보고 그냥 계시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보고만 있습니까? 악한 민족이 착한 백성을 삼키어도 조용히만 계십니까?’ 16절 보면,
‘그러므로 그는 그 그물 덕분에 넉넉하게 살게 되고, 기름진 것을 먹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물에다가 고사를 지냅니다. 우리들 땜에 걔네들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된다 말이에요. 악인들은 오히려!
거기에다 대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게 바로 이 말씀이에요. ‘하박국아! 너는 지금 이스라엘이 의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너도 지금 의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바벨론을 들어서 너를 치려고 하는지 생각을 해봐라! 너를 징계하려고 하는데, 이 바벨론을 들어서 너를 징계한다는 것은, 너나 이스라엘이나, 이 바벨론이나 갈대아 사람들이나, 앗수르나 똑 같은 인간들’이라는 거예요. 단지 ’너희들이 의인이 된 것은 믿음이다!‘ 그러는 거예요.
‘너희들이 뭐가 잘나서, 너희들이 남들보다 더 특출 나서, 너희들이 의인이 되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된 것이다.’라는 거예요. 내가 내 사랑으로 나의 아버지 되심 나의 하나님 되심 그 사랑과 은혜와 뜻으로 너를 구원해줘서, 네가 의인이 된 것이지, 그러니까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라!‘ 그러는 것이죠.
그리고서는 그 악인들이 어떻게 저주받아 죽을지를, 하박국 2장에서 다섯 가지로 보여주신다고요. 그러니까 하박국이 3장에서 그래요. ‘오! 하나님! 그런 것이군요. 왜 악인들이 나보다 더 잘 먹고, 잘사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 나를 징계하고 훈계하고 교육시키셔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그들을 들어서 쓰는 것뿐이군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보세요. 여러분!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모압이나, 블레셋이나 이런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위해서 들어서 썼던 그 막대기들이, 지금 존재합니까? 없어요! 여러분들을 아프게 하고, 여러분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그들은, 여러분을 교육하고, 훈계하기 위해서 보낸 사람들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곧 ‘앗 뜨거! 앗 뜨거!’ 하는 데로 갈 거예요. 영원토록 뜨거워서, ‘앗 뜨거! 앗 뜨거!’ 그러는 곳으로! 여러분을 위해서 보낸 자들이란 말이에요
그거를 알고 나니까, 하박국이 그래요. ‘하나님! 그렇다면 수년 내,’ 뭐예요? ‘빨리 부흥케 하옵소서!’ 그래요 부흥(復興)이라는 말은, 성경에 거기 딱 한번 나와요. 부흥! 부흥의 불길 타오르게 하소서. 막 그러잖아요? 여러분 성경에 거기 한 번 나온다니까요. 그런 ‘부흥’이라는 헬라어 원어는요, ‘우리를 깨끗게 하다, 우리의 악을 제하여 버리다’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 빨리 그 일을 이루어 주옵소서! 바벨론이든 어디든 들어서, 빨리 이 이스라엘의 패역을 벗겨주옵소서. 수년 내에 우리를 부흥케하옵소서!’라는 그 말이에요. 빨리 우리교회 부흥하게 해주시옵소서. 그거 아니라니깐요. 국어사전의 그 개념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그리고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그래요. 그렇게 우리가 징계를 받고 있는 그 중에도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생각하게 하옵소서. 그게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소서.’라는 말이라고요. 하박국 3장 1절 2절이 그 말이란 말이에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너희들이 뭐가 잘 나서, 너희들이 남보다 특출 나서, 너희들 살려낸 것이 아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된 것이다. 내가 내 뜻으로 건져낸 것이다.’
그래놓고 하박국이 죽 ~ 회상을 합니다. 뭘 회상하느냐 하면? 홍해가 갈라진 거! 해가 멈췄던 사실! 그런 역사적인 객관적인 그 사실들! 그 역사적인 사실들을 딱 기억하면서, ‘맞아! 그런 하나님이라면,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실 거야!’ 그게 하박국 3장이란 말이에요.
하박국이 그 자기에게 떨어질 그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딱 보고는, 어떻게 합니까? 내 뼈가 썩어들어 가는 것 같았대요. 너무 무서워서! 내 살이 떨렸대요. 하박국이! 그 선지자가 ‘그렇게 자기가 받아야 할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건져내어져서, 오직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되었고, 그들은 그 저주를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되니까, 하박국이 딱 박수를 딱 치고, ‘비록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내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고, 내 밭에 소출이 없어도, 나는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그 하나님만을 기뻐하겠습니다!’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이에요. 그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말이라고요 이게!
‘내가 지금 혹시 조금 덜 먹어야 될 상황이고, 혹시 좀 남들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고, 그래도 나는 여호와로만 만족한다.’ 그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이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나는 왜 이렇게 늘 부족할까?’ 우리 그러고 있잖아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래야 되는데! 아니란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하박국의 이 고백을, 우리도 동일하게 해야 되는 거예요.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둬드릴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 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왜? 나는 알았으니까! 나는 그렇게 죽어야 할 자인데, 나에게 믿음이 주어져서, 나는 그렇게 건져냄을 받은 자니까, 나는 기쁘다! 그게 우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에베소서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오늘의 결론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 믿음은!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지금, ‘나는 예수 믿었는데도, 왜 이렇게 아직까지도 죄에 대한 욕구가 끊임없이 솟아오를까? 왜 예수 믿었는데도, 아직도 나는 왜 이렇게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할까? 왜 예수 믿었는데도, 나에게 마음속에는 이렇게 욕정이 끓어오를까?’ 혹시 그런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 계신 분들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먹고 살겠다고 도망쳤던 그 자리에 계신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 아내를 왕에게 팔아먹는, 그 아브라함의 자리에 서 계신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은, 그 일들을 다 겪어내고, 모리아산에서 백세에 낳은 아들을, 하나님 앞에 턱 믿음으로 바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과 하박국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좀 보시라는 거예요. 그리고 용기를 좀 내시라는 거예요. 여러분은 진짜 백점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나에게 이미 주어졌고, 그 믿음은 반드시 나를, 나의 주관적인 믿음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것이 여러분의 위로가 되셔야지, ‘아픈 데 손 얹고 기도하세요! 다 나을 거예요.’ 이딴 거 갖고 기뻐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기도하면은 네, 로또 맞을 거예요!’ 그 코미디 아닙니까? 이거? 예배당에서 이런 소리하는 건,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ローマ人への手紙 1:17)
17 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て、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からです。「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
この「信仰」という言葉は、私たちにとってどれほど親しみのある言葉でしょうか。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の信仰という言葉を、私たちは非常に誤解し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信仰という言葉を誤解することによって、多くのとんでもない間違いを私たちは犯してしまうのですが……。さて、今日はその信仰について明確に理解していきましょう。
皆さんはイエスを信じて救われました。そうですね? では、皆さんはいつ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か? 実は、これは悪い質問なのです。この質問は! いつ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か? あなたはいつ救われましたか? あなたはいつ救いの確信を持ちましたか? このような質問が、私たちの60年代、70年代、80年代までの韓国キリスト教を病ませてきた、そのような質問なのです。あなたはいつ信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か? いつ救いの確信を得ましたか?
それで人々は、しきりに自分の経験や体験に立ち返り始めたのです。「いつだろう? なぜあの人はあんなに明確に自分が救われた日を覚えているのに、私にはその日がないのだろう? あの、胸の中でサイダーが弾けるような経験が、なぜ私にはないのだろう?」それで不安になり始めるのです。人々が! それでしきりに自分の経験や体験に立ち返るのです。
「あぁ、いつだろう? 私にとってそれはいつなのだろう? 私が認識できなかったその瞬間があったはずなのに……。あぁ、あの時トレ・ディアス(修道会)に行って、三回泡を吹いて倒れた時かな? あぁ、それとも、ある興行師のような牧師が来た時、その集会で全身に電気が走るような体験をしたけれど、あの時かな? それとも、ある礼拝で本当に目玉が抜け落ちるほど泣いた時、生まれてあんなに泣いたことはないけれど、あのように泣いた時、あの時かな?」このように自分の体験や経験を遡り始めたのです。「あぁ、あの時が私が信じた瞬間だろう!」
しかし聖書は明らかに、聖霊によって私たちに信仰が来ると言っていますが、その聖霊がいつ来るのか、どこから来るのか、私たちは分からないと言うのです。私も、いつ自分が信じるようになったのか、いつ自分が救われたのか、私も知りません。その日付を! もちろん今は、私はイエスを信じています。しかし、いつこの信仰が私に来たのかは、私は知りません。
ですから、私が賛美歌の中で一番歌いづらい賛美歌が、「そこにあなたはいたのか(Were You There)? その時に! あの十字架の現場に、そこにあなたはいたのか? その時に!」私はそこにいませんでした。それなのにしきりに問いかけてくるのです。「そこにあなたはいたのか? その時に!」いいえ。私はそこにいませんでしたが、もちろんイエス・キリストの中で、霊的にイエス・キリストの中で、その場にいましたが、私のこの今の実存は、そこには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その十字架の事件によって、私がこの場所にい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確かなことなのです。
皆さん! 私たちは信仰に対する誤解を持って、どれほど多くのデタラメなことをしでかしてきたでしょうか。人々は「信仰」といえば、「この信仰さえ持てば、私たちにできないことはない」という教育を幼い頃から受けてきました。「信じる者には、できないことはない」という言葉を私たちは聞いて育ったのです。ですから、私が有能にすべてのことを行うために、この信仰を育てようと、私たち自身で多くの努力をしてきたのです。百日定例祈祷! 千日早朝祈祷! 四十日断食祈祷! こういったことをやり始めたのです。信仰を育てるために! その信仰はなぜ育てたのですか? 自分が望むものを手に入れるために! もしそのようにして信仰が与えられるなら、それがなぜ「恵み(恩恵)」であり、「贈り物」なのでしょうか。
私が昔、高校生の時、どうしても聖書が信じられなくてですね。私は高校部の会長だったのです。教会で! なのにどうしても聖書が信じられなくて、伝道師に、「伝道師! 私はこれがどうしても信じられません。どうすればこれを信じ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か?」と言ったら、その伝道師は私に、「ただ信じろ!」と言ったのです。「いや、信じられないのに、どうやって信じるんですか?」
あまりに私がそう言うので、その伝道師は私に、「声に出して、信じます! 信じます!」と。これをただ信じられない時、疑いが湧くたびに、「信じます! 信じます!」と。それもただ「信じます」と言うのではなく、私たちの(汝矣島方面の)発音で「ミッ〜スミダ(信じ〜ます)!」と、このように一日に数百回叫べば、信じられるようになるというのです。しかし、信じられますか? そのようにして?
もしそのように「信じます!」と言って信じられたなら、それはすぐに揺らいでしまう砂の上に建てられた「砂上の楼閣」のような信仰です。それはすぐに揺らぎます。それは「マインドコントロール」と呼ぶものであって、信仰ではないのです。もし私たちが「信じます!」と言って、そのようにして信じられるなら、信仰が大きくなるなら、それがどうして神の贈り物であり、どうして神の恵みなのでしょうか。
恵みとは? 受ける資格のない者に、ただで与えられるのが恵みだと言うではありませんか。その信仰は恵みだと学んだではありませんか。私たちが! ならばその信仰は、私たちがそのように努力して、育てることもできないし、受けることも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私たちは聖書から十分に学んできたではありませんか。
私たちがこの信仰というものを、しきりに国語辞典の概念で捉え、「信じる」という言葉の名詞形が「信仰」だと考えているから、皆さんはしきりに誤解されるのです。聖書のこの概念は、国語辞典の概念でついていくと、相当に誤解を招く恐れのある単語がたくさんあります。「復興(リバイバル)」という言葉や、「亨通(成功・順調)」という言葉などは、聖書が言うところと、国語辞典が言うところとは違うのです。この信仰もまた、国語辞典が言うところと、私たちが聖書で言う「信仰」という言葉は、違うわけです。
さて、今日の本文で、「信仰から信仰へ(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という問題と、「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言葉の意味を、皆さんと一緒に勉強します。まず「信仰から信仰へ進ませる」という言葉を見ていきますが、あたかも信仰が二つの種類があるかのように、このように説明されています。そうですよね? では、前の信仰は何で、この後ろの信仰は何なのか。
ところが、今日の本文を見ると、「神の義が現れて、信仰から信仰に至らせる」と、この「神の義」が、私たちに信仰を与えるものとして説明されているのです。では、この「神の義」とは何なのか。私たちを信仰に至らせる、この「神の義」!
聖書で言うこの「神の義」とは、神の父が子供たちに対して、最後まで父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続けてくださること! 神の父の父らしさ! それを「神の義」と言います。父が最後まで子供のために、父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てくださること! それを「神の義」と言うのです。信仰はそこから出発するのです。
ここで既にヒントがありますね? その信仰は、私たちから始まるのではなく、「神の義」からその信仰は出発するものなのです。私たちが知っている福音とは何ですか? 福音! 今日の本文で、「福音には神の義が現れて、信仰から信仰に至らせる」と言いますが、その福音とは何ですか? 福音! 英語で福音は何ですか? 「グッドニュース(Good News)」です。そうでしょう? グッドニュース!
皆さんにはグッドニュースがたくさんありますね? グッドニュース! 宝くじに当たった。グッドニュース! 息子が良い大学に入った。グッドニュースです。そうでしょう? マンションの抽選に当たった。グッドニュースですね? しかし、宝くじに当たって、一人でもまともに生きている人を、皆さんは見たことがありますか? ならば、そのグッドニュースは永遠のグッドニュース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しょう? 良い大学に入って、その良い頭で詐欺を働いて刑務所に行った人がどれほど多いですか。良い大学に入ったことが永遠のグッドニュースにはならないのです。マンションに当選して、それで投機をして手錠をかけられた人も多いです。それはグッドニュースではありません。
では、永遠のグッドニュースとは何でしょうか。福音! 永遠の福音とは何ですか? 聖書ではたった一つです。罪と過ちで死ぬしかなかった私たち! 罪と過ちによって死んでいた私たちを、神が生かそうとして、神の御子をこの地に送り、私たちを懐に抱き、その神の怒りを、その御子にすべて注ぎ込んで、彼を死なせ、生かし、その人生を私たちの人生にすべて転嫁(身代わりとして適用)してくださったこと!
そして私たちは救われました。救われた後も、私たちは罪を犯し続けますよね? その罪はどう解決するのですか? 皆さん! 救われたのに、今も罪を犯し続けているではないですか。それをイエス様が赤子として生まれ、死ぬまで、神が満足されるような完璧な人生を生き抜き、それを私たちに転嫁してくださったので、私たちがこのようにデタラメな人生を送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神を賛美し、神を礼拝しているのではないですか。それがまさに「福音」なのです。それが福音なのですが、私たち以外の他の人々、世の中の人々には、それは福音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正気の沙汰ではない話でしょう? それは!
いや、どうして私たちが見たこともない2,000年前に、それも天地を創造した神がこの地に下りてきて、私たちの代わりに死んで生き返ったと? そして彼が生きた人生が、私たちの人生になったと? 人々がこの話を聞いて、私たちを指差さなければ、それは狂人でしょう? しかし、私たちはそれを信じているのです。
福音は私たちと関係があってこそ、それが福音になるのです。他の人たちにとっては、それは福音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はないですか? あの江原道三陟(サムチョク)の李さんのおじさんの息子が、司法試験に合格したことが、亀把撥(クパバル)に住む姜さんのおじさんと何の関係があるのですか。それは李さんのおじさんにとっては福音ですが、姜さんのおじさんには何の意味もない話です。福音ではありません。
聖書が言う福音が、私たちにとって本当にグッドニュース! 福音になるために、私たちに必要なものがまさに、「信仰」なのです。信仰! その信仰がこのグッドニュース、福音を、私たちとフックアップ(接続)させて、私たちを生かすというのです。ですから、この信仰を正確に定義できていなければ、その福音は皆さんのものになり得ないのです。
ところが今日の聖書は何と言っているかというと、皆さんに信仰を与える方法が、「信仰だ!」と言います。私たちに信仰を与える唯一の方法が、信仰だというのです。「信仰があなた方を信じさせる」と言うのです。「信仰によって、あなた方は信仰に至るようになる!」と言うのです。言葉遊びのようです。そうでしょう? 「信仰によって、あなた方は信仰に至るようになる」と言うのです。この前の信仰は何で、後ろの信仰は何なのか。
私たちが信仰を勉強するなら、信仰の父、アブラハムの生涯を調べれば、なぜ彼を「信仰の父」と言うのか分かるではありませんか。まず、ヘブル人への手紙11章8節から9節で、アブラハムをこのように「信仰の父」と言っています。
(ヘブル人への手紙 11:8-9)
8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召しを受けたとき、それに従い、あとの相続地として受けるべき地に出て行きました。彼は、どこに行くのかを知らないで、出て行ったのです。
9 信仰によって、彼は約束の地に他国人のようにしてとどまり、同じ約束をともに相続するイサクやヤコブとともに、天幕生活を送りました。
確かに、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召しを受けた時に従い出て行った、と言うのです。信仰によって! この信仰によって出て行ったと言いますが、果たしてアブラハムが信仰によって出て行ったのか、私たちが考えるあの信仰によって出て行ったのか、創世記11章31節に行きましょう。
(創世記 11:31-32)
31 テラは、その息子アブラムと、ハランの子で自分の孫のロトと、息子アブラムの妻である嫁のサライとを連れて、カナン地方へ行くために、カルデアのウルからいっしょに出発した。彼らはハランまで来て、そこに住みついた。
32 テラの全生涯は二百五年であった。テラはハランで死んだ。
誰がアブラハムとロトとサライを連れ出しましたか? テラが連れ出したのです。アブラハムが信仰によって発ったのではなく、聖書はテラが、その息子アブラハムと、ハランの子の孫ロトと、アブラハムの妻サライを連れてカルデアのウルを発った、と言うのです。
アブラハムがその家族を連れて発ったのではなく、テラが、アブラハムの父であるテラが、自分の命令権の下にある、その家族をすべて連れて発ったのです。しかし確かに神は、アブラハムにカルデアのウルで現れました。そしてアブラハムに命令されたのです。使徒の働き7章2節に行きましょう。
(使徒の働き 7:2-3)
2 ステパノは言った。「兄弟たち、ならびに父老の方々、聞いてください。私たちの父アブラハムが、ハランに住む以前まだメソポタミアにいたとき、栄光の神が彼に現れて(現れました。)、
3 『あなたの土地とあなたの親族を離れ、わたしがあなたに示す地へ行け』と言われました。(と言ったのです。)」
確かに神は、アブラハムに現れて、「お前! 本土、親族、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お前に指示する地へ行け!」と言ったのですが、テラがその家族を連れ出します。そして彼らはどのような人々であったか、聖書でこのように言っています。ヨシュア記24章2節に行くと、
(ヨシュア記 24:2)
2 ヨシュアはすべての民に言った。「イスラエルの神、主はこう仰せられる。『あなたがたの先祖たち、アブラハムの父、ナホルの父テラは、昔、川の向こうに住んでおり、ほかの神々に仕えていたが、』」
彼らは偶像を作って売る家系でした。偶像を崇める者たちでした。神を信じる者たちではなかったのです。
整理してみるとですね、カルデアのウルに住む、偶像を作って売るテラの家系! その息子であるアブラハムに、神が現れました。「お前、今からわたしが指示する地へ発て! そうすれば、わたしがお前に祝福を授けよう!」と言ったのです。「本土、親族、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指示する地へ行け!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高める。あなたは祝福の基となる!」と言ったのです。
偶像を崇めるその家に、どなたかが現れて、「わたしがあなたたちに祝福をあげるから、発ちなさい!」とそのように誘惑したのです。偶像を崇める者たちが、最も望むものは何ですか? 祝福です。その偶像を通じて得ようとするものは何ですか? 祝福なのです! 神が「その祝福をあげる!」とそのようにアブラハムに言ったところ、アブラハムが父親に話したのです。するとテラが「祝福をくれると? 行こう!」これほど耳に心地よい言葉がどこにありますか、偶像を崇める者たちにとって!
神はなぜ信仰の父を、そのような偶像を崇めるカルデアのウルから救い出されたのでしょうか。当時、アブラハムと同時代の人々の中に、非常に立派な人々がたくさんいました。その一人がヨブではないですか。アブラハムと同時代を生きた人々の中で、非常に立派だった人! ヨブが私たちの信仰の父になったなら、私たちは納得できるのですが、よりによって偶像を崇めていたあの家系から、アブラハムという信仰の父を引き出されるのです。なぜでしょうか。
その信仰というもの、救いというものは、まさにそのような不可能から出発す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が松の根を十二本抜き(必死の祈りの比喩)、三角山に行って4泊5日徹夜し、30日断食祈祷などをして、私たちに来るのではなく、神がそのような不可能な、罪と過ちによって死んでいた場所から、引き上げられるのが、まさに信仰の出発だということです。
祝福を受けるためにテラとその家族が、カルデアのウルを発って、ハランへ行きます。ハランはまだカルデア文明圏です。メソポタミア文明の発祥地であるカルデアのウルは、すでに4千年前、水洗トイレがあった場所でした。そのような文明都市だったのに、そこから連れ出して、カナンへ行けと言うのですが、そこは飲む水さえない場所です。
当時の古代社会の人々は、自分の文明圏を離れれば、誰かが来て危害を加えたり、極端な話、殺したとしても、どこにも訴えられないような社会だったのです。だから親族を捨てられず、家族を皆連れて発つのです。そこへ行くのが怖いから! テラは最後までカナンまで入り込めず、ハランに留まって死にます。
アブラハムも75歳まで、まさにそのハランに留まるのです。本土! 親族! 父の家! 離れろと言われたのに、アブラハムが何一つ離れましたか? 本土、カルデアのウルを離れましたか? 依然としてカルデア文明であるハランにいたのです。親族? ロトを連れて行きます。父の家? 父の家を離れますか? 父が連れ出しました。これが何の信仰ですか、皆さん! 信仰によって出発したと言いますが、これが信仰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聖書が言う信仰は、それではありません。創世記12章1節を見てください。
(創世記 12:1-2, 5)
1 主はアブラムに仰せられた。「あなたは、あなたの生まれ故郷、あなたの親族、あなたの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へ行け。
2 そうすれば、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とし、あなたを祝福し、あなたの名を大いなるものとしよう。あなたは祝福となりなさい。 (5節です。)
5 アブラムは、その妻サライと、おいロトと、彼らが集めたすべての財産と、ハランで得た人々を連れて、カナン地方へ行くために出発した。こうして彼らはカナンの地に入った。」
神がまた現れました。ハランで! その父テラが死ぬと、ハランでアブラハムにまた現れて、その話を全く同じようにまたされたのです。「発て! なぜ発たないのか?」だからアブラハムは発ちました。そしてカナンに入りました。入ってすぐ見てみると、その土地は人が住める土地ではありません。そのうえ飢饉が起こりました。するとアブラハムはすぐにエジプトへ下ります。カルデアのウルまでは遠すぎて戻れず、エジプトへ自分の生きる道を探して発つのです。神が行けと言ったその土地から! これが信仰ですか? 創世記12章10節をご覧ください。
(創世記 12:10-13)
10 さて、この地にはききんがあった。それでアブラムは、エジプトのほうにしばらく住むために、下っていった。この地のききんが激しかったからである。
11 彼はエジプトに入ろうとしていたとき、妻のサライに言った。「聞いておくれ。あなたが見た目に美しい女だということを、私は知っている。
12 エジプト人があなたを見るとき、『この女は彼の妻だ』と言って、私を殺すが、あなたは生かしておくだろう。
13 どうか、『私の妹だ』と言ってくれ。そうすれば、あなたのおかげで私もうまくいき、あなたのおかげで私は生きのびることができるのだから。」
神の言葉を破ってエジプトに行くだけでなく、そこでパロ(ファラオ)に、自分の妻を売り払います。なぜですか? 自分の命を救うために! こんな男に出会ったら大変なことです。自分が生きようと自分の妻をパロに渡すのですから。そして多くの贈り物を受け取ります。また! こんな恩知らずがいますか? 世の中に! これが信仰ですか、皆さん?
いや、この時アブラハムは75歳過ぎですよ。ならサライも60歳を優に超えていた時なのに、どれほど美しかったのかは知りませんが、サライを王に売り払うのですが、一度ではなく、後にはゲラルの王に、イサクが腹の中にいた時でさえ売り払います。本当に好みも独特でしょう? 妊娠したおばあさんがどれほど美しかったのか。ゲラルの王もまた、奪いに行きます。アブラハムが仕でかしたことなのです、それが! それなのに神はアブラハムを打たず、パロを打つのです。それでパロがアブラハムを呼んで、「なぜ私を騙したのか。すべて持っていけ! お前の妻まで皆連れて行け!」
このように弱くて臆病で、信仰がなかったアブラハムが、「この神はいったいどなたなのだろうか。当時の世界最高の統治者であったエジプト王パロが震えながら、私にこのように待遇してくれるなんて。あの方は何かすごい方なのだろう」と、少しずつ、少しずつ知っていくのです。
このアブラハムの生涯こそが、まさに信仰者という、信仰のあるクリスチャンという、皆さんの生涯なのです。私たちはまさに信仰があると言いながら、このように失敗し続け、倒れるのです。しかし神は、私たちをこのように教えていかれるのです。
そうしながら時々、信仰を見せたりもします。どのように? あの時、ソドムとゴモラの王をはじめとして、九つの国の王たちが連合して、激しく戦うことがあったのですが、その時ソドムとゴモラに住んでいた甥のロトが捕らえられます。するとアブラハムが毅然と立ち上がり、自分の家にいた下僕たちをですね、その下僕318人を連れて、そこ、戦場がどこだと思って、そこへ行くのですか。鎌や火かき棒といったものを持って行って、戦って勝ちます。そしてロトを連れて来るのです。そして奪い取った財物! アブラハムがすべて奪い返して持ってくるのです。
するとソドムの王が「それをあなたがすべて持ちなさい!」と言いますが、「神が私を富ませるものであって、あなたがおそらく私を金持ちにしたと言うだろうから、私は受け取れない」と、財物に対する毅然とした姿まで見せるのです。そして甥のロトに、「お前が望む土地はお前が取れ。お前が残した土地を私が取る」と、このように時々、信仰に勝利した姿も見せるのです。
そうしながらまた失敗し続けます。また妻を売り払い、神が現れて、お前に子孫を授けると言うのに、ニヤッと笑いながら、「へっ! 笑わせるな。私の年が今いくつだと思っているんだ……」と言いながら、また不信仰な姿を見せるのです。そして女中のハガルを通じてイシュマエルをまた産むのです。
このように成功し、時には失敗し、また一歩、一歩進んで成功し、また失敗し、これが私たちの信仰の旅路なのです。しかしそのたびに、神様が一緒にいらっしゃるのです。そうしながらアブラハムを教えていかれます。教えていかれるのです。見てください。創世記17章17節を見ると、神様がアブラハムに「息子をあげる」と言ったところ、
(創世記 17:17)
17 アブラハムはひれ伏したが、笑った。そして心の中で言った。「百歳の者に子が生まれようか。サラにしても、九十歳の女が子を産めようか。」
これが信仰ですか、これが? 「信仰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カルデアのウルを離れた」という、あの信仰なのかということです。神を信じたのですか、これが? サラは? サラも「信仰によって、不妊であったのに、身ごもった」と言うでしょう? ヘブル人への手紙11章で! サラは創世記18章10節をご覧ください。
(創世記 18:10-12)
10 主は仰せられた。「わたしは来年の今ごろ、必ずあなたのところに戻って来ます。そのとき、あなたの妻サラには、男の子ができているでしょう。」
サラは、主の後ろの天幕の入り口で聞いていた。
11 アブラハムとサラは年を重ねて老人になっており、サラには、女の月のものがすでに止まっていた。
12 それでサラは心の中で笑って言った。「衰えてしまったこの私に、何の楽しみがあろう。それに主人も年老いているのに。」
サラも笑います。あざ笑うのです、神を。「神様! 私はすでに月のものも止まり、このように年老いて、枯れた木切れのようですが、どうして私に後継ぎがいるなどとおっしゃるのですか」と笑ったのです。だから息子の名前が「イサク」ではないですか。笑い! 「お前は笑った!」イサクと呼ぶたびに、「笑った! イサク! 笑った!」私たちが考えるあの信仰が、今彼らの人生からは出てこないではありませんか。
ところがアブラハムは、100歳で産んだ息子をポンと、神の前に捧げる、あの信仰の所有者になるわけです。見ましょうか。創世記22章16節に行きます。
(創世記 22:16-18)
16 主はこう仰せられた。「わたしは自分にかけて誓う。──主の御告げ。──あなたが、このことをなし、あなたの独り子さえ惜しまなかったから
(神の前に捧げたのです。独り子を!)、
17 わたしは確かにあなたを大いに祝福し、あなたの子孫を、空の星、海辺の砂のように大いに増やす。あなたの子孫は、その敵の門を勝ち取る。
18 あなたの子孫によって、地のすべての国々は祝福を受けるようになる。あなたが、わたしの声に聞き従ったからである。」
神の前にアブラハムが息子を捧げたので、神が、「よし、殺すな! お前の心は分かった」と言っておきながら祝福されるのですが、その祝福の言葉が、創世記12章でハランでアブラハムに言った話! 創世記15章でアブラハムに契約したあの話! 全く同じ契約なのです。
ここでは、「アブラハム、お前が私に息子を捧げたから、お前を祝福してあげよう」と言っていますが、その約束は、その祝福は、すでに創世記12章と15章で約束されていたのです。ならばどういうことですか? どう推論できますか? 神はすでにアブラハムに、その祝福を与えようと決めておられたのです。それなのに、このどうしようもないアブラハムが、その祝福を受けるに値する人間ではないので、この祝福を与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が、こいつにその資格がないから、こいつをそのように作り上げていかれるのです。人生を通じて! この祝福を与えるために!
決して私たちが、神が望む水準まで成長したから神が私たちを褒めてくださるのではなく、神は私たちに祝福を与えようと決心され、その決心されている、祝福を受けるに値する資格のある者を作るために、この人生を許された私たちを引き連れて行かれ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アブラハムの生涯こそがまさにそれではないですか。創世記12章1節から3節まで、全く同じことを、神が祝福されるのです。創世記15章5節でも全く同じ、その祝福をされるわけです。
では、信仰とは何なのか。どうしてアブラハムが、この創世記22章で、自分の100歳で産んだ息子を神の前にポンと捧げることができたのか。その信仰はいったい何なのか。信仰とは何かというとですね。「神が私たちを、罪の過ちで死んでいた私たちを救い出し、完成された神の民として、神の御言葉に完全に順従し、降伏して、それを信じるあの民へと作り上げていかれる、その全体を信じることを、私たちは『信仰』と呼ぶ」のです。
それは私たちに一度に与えられます。私たちが少しずつ、少しずつ信仰を育てていくのではなく、一度に与えられるのです。なぜなら? 私たちはクリスチャンであり、クリスチャンは義人(義なる人)と言うではないですか。その義人は、信仰がなければ義人になれませんよね? 聖書の論理上! ですから私たちはすでに信仰があってこそ、義人になるのです。つまり、私たちはすでに信仰を持っているのです。
しかし、その全体が私たちの中に入っているのに、私たちはまだ自分自身で認識できず、理解できていない客観的な信仰だけを持っているのです。ところが神が、私に与えられたこの信仰を、私を殴り、時にはなだめ、時にはすかしながら、これが私に理解され、認識されるその信仰へと。「あぁ、そうだ! 神様はそのような方なのだ! 私はあのような境遇にいたのに、このように救い出されたのだ!」と、私が「あぁ、信じます」と告白できる、その主観的な信仰に変えていかれることを、「信仰から信仰へ(信仰に始まり信仰に進ませる)」と言っているのです。信仰は、神が始め、神が終わらせるのです。
私たちは「already but not yet(すでに、しかし未だ)」という教理を聞きましたね。私たちはすでに義人です。そうでしょう? しかし、私たちはイエスが再び来られる日! 義人として完成されるのです。私たちはすでに信仰があります。しかし、私たちはイエスが再び来られる日! 完全なその信仰! 「私はこのように神の前に降伏します!」というあの完全な信仰の完成の所有者になるのです。ですから既に私たちには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すべて!
私たちは義人であり、救いを受け、私たちは信仰が与えられている者たちなのですが、この地を生きながらそれを私たちは確認し、自分のものにする、まさに私の理性で告白できる、私の理性で降伏できる、自分のものにする作業を、この地です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信仰から信仰へ至らせる」。神は私たちに信仰を注いで、私たちを信じる者へと作り上げていかれるということを、「信仰から信仰に至らせる!」
アブラハムがイサクを捧げる時、どのような信仰の所有者であったか、一度見てください。ヘブル人への手紙11章18節を見てください。あの臆病者のアブラハムが、どのような信仰の所有者になられたのか。皆さんはここまで行くことになるのです。
(ヘブル人への手紙 11:18-19)
18 彼については、「イサクから出る者が、あなたの子孫と呼ばれる」と言われていたのですが、
19 彼は、神には人を死者の中からよみがえらせることもできると考えました。それで彼は、死者の中からイサクを取り戻したのです。これは比喩的な出来事です。
アブラハムは、確かに神がこのイサクを再び生き返らせることを知って、その胸に刃を突き立てようとしたということです。確かに死者をも生かされる方が神であることを、アブラハムがその人生を通じて、神を知り学んだということです。その人生は、ほとんどが失敗の連続である人生でした。
皆さんは、ですから落胆したり失望したりしないでください。皆さんはそのように失敗し、失望してこそ、自分が何者なのかを知るようになるのであり、神がそれにもかかわらず、自分のような者を生かされたので、その大きな愛がどれほど大きなものなのか、知るようになるのです。
私たち同士で「イエスを信じる者が、どうしてあんな風に生きるのか」などと言わないでください。家に帰れば自分も同じではないですか。それなのにお互いに相手を見て、「おい! イエスを信じる者がどうしてあんな風に生きるのか?」私たちはその過程にいるのです。むしろ皆さんにとって、その罪悪と、皆さんのその失敗と挫折は、神が皆さんを神の民として作り上げるための、一つの方法であり、時には祝福とまで言えるものなのです。皆さんが、あちら(天)だけを望んでいるとするならば!
本当に失敗と挫折の中で神に出会い、その神の民になった人々がどれほど多いことか。イエス様をよく信じていたのに、少し金を稼いだからといって、むしろ世俗の中にどっぷり浸かってしまった人々がまたどれほど多いことか。私たちがこれまで持っていた、世の中の人々が持っているあの価値観や世界観を、早く引き裂いてしま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こそが私たちを神の民として作り上げる近道になり得るのです。ローマ人への手紙4章1節を見ると、このように結論づけています。
(ローマ人への手紙 4:1-2)
1 それでは、肉による私たちの先祖アブラハムについて、何と言ったらよいでしょうか。
2 もし、アブラハムが行い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のであったら、彼は誇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神の御前で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アブラハムは神の前で、これっぽっちも! 何もし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神がすべてされた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何も誇るものがないのです、アブラハムは! 私たちの人生が、私たちの信仰が、私たちの救いが、まさにそれだということです。
だから、このヘブル人への手紙11章で、信仰の先駆者のあの隊列に、ギデオン! エフタ! バラク! サムソン! こうした人々が入っているのです。モーセ! モーセが何の信仰でエジプトを去りましたか? 人を殴り殺して逃げたのではないですか。それなのに何がモーセが信仰によって去った、ですか。まさにあの信仰! 私たちが調べた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あの信仰! 神の熱心によって、彼は救い出されたのです。
ギデオンの三百人の勇者ですか? 神はなぜ3万人が集まったのに、2万9,700人を帰らせて、300人だけを残されるのですか。神が強制的に皆帰らせるではないですか。12万人の敵と戦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3万人でも「戦うぞ」と集まったのに、元気づけて(encourage)戦わせるのではなく、2万9,700人を帰らせるのです。300人だけをきっちり残されます。
そしてギデオンに「出て行って戦え」と言います。何で? 壺と、たいまつと、ラッパ! これが何の武器ですか、これが? それは「戦争は神がする」ということを教えているのです。ギデオンのようなあの臆病者! 自分一人食いつなごうと酒ぶねの中で小麦を少し持ってきて、こっそり脱穀して食べていたら、神が現れたので、びっくり仰天してですね。このような臆病者を、信仰の先駆者へと作り上げていったそれを、「信仰」と呼ぶのです。
サムソンは一生浮気ばかりして死にました。何をしましたか、サムソンが? それなのに信仰の父の名簿に入っているのです。バラク? デボラのスカートの裾を掴んで、「あなたが行かないなら、私は行きません」。こんな馬鹿だったのです、バラクは! それなのに彼らが堂々と、信仰の父の隊列にずらっと並んでいるのです。どれほど恥ずかしいことでしょうか。しかし、それが信仰なのです。
私たちは彼らよりは百倍マシでしょう? 私はいくら命の脅威が迫っても、女房を二度も売り飛ばしたりしません。私は! ところが、彼を信仰の父と言うのです。「信仰は、神が始め、神が終わらせる。そのモデルが誰だか知っているか? アブラハムだ!」だから信仰の父と言うのであって、彼が何かすごい人だから、信仰の父と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皆さんの方がずっとマシですよ。皆さんはあのイエス・キリストと十字架を目で見ている人々です。新約時代の人々です。ならば「信仰から信仰へ至らせる」ということは、もうクリア(clear)になりました。そうですね?
では、「ただ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この言葉を今から勉強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ね。ところが使徒パウロが今日の本文で何と言ったかというと、「『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と言います。ならばどこかに書いてあるという話ではないですか。これは旧約のどこかにあるのでしょう? 使徒パウロはそれを見て、今ここに記録したのではないですか。ハバクク書2章4節を見てください。
(ハバクク書 2:4)
4 見よ。心の曲がった者は、その心に正直さがない。しかし、神に従う人(義人)はその信仰(真実)によって生きる。
この「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言葉は非常に重要なものです。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 マルティン・ルターをはじめとする宗教改革者たちの改革理念だったのです。マルティン・ルターはまさにこの一節! この御言葉で新しく生まれました。ならば皆さんもこの御言葉を理解すれば、その水準になるのです。マルティン・ルターなんて大したことありません。「ただ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
パウロがハバククのこの御言葉を引用した時は、完全に(fully)理解した上で引用したはずです。ならば、このハバククが今語っている、「ただ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神の御言葉が、どのような背景で彼らに、ハバククに与えられたのかを調べれば、私たちが明確に分かるではないですか。
ハバククという預言者は、紀元前600年から610年の間に生きた、活動した預言者です。そのハバクク! ですから、先週調べましたが、北イスラエルは紀元前722年に滅びました。南ユダは? 紀元前586年に滅びました。ならば紀元前600年から610年の間は、まさにその間です。上の北イスラエルと南ユダが互いに滅びていくあの時期なのです。
神はなぜ彼らを滅ぼしたのですか。偶像を崇め、不敬虔で、反逆したから罰を与えるのです。バビロンに連行させ、北イスラエルはアッシリアを通じて完全に粉砕されました。それでサマリア人を作り上げてしまったのです。ならば、このハバククが生きたあの時代は、最も反逆した時代だったのです。
その時にハバククが神に叫びます。自分は義人です。それを前提(前提)として神に叫びます。「神様! いつまでこのイスラエルの反逆を黙って見ていらっしゃるのですか。いつまであの不敬虔な者たちがあのように飲み食いし、裕福に暮らしている姿を見ていらっしゃるのですか。いつまで私のような義人はこのように苦しま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か」と神の前に叫びます。
ところが神は答えられません。それでハバククが喚き散らしながら、「神様! なぜ答えないのですか」と言うのです。ハバクク書1章2節を見ると、
[ (ハバクク書 1:2-4)
2 主よ、いつまで、私は助けを求めて叫ば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か。あなたは、聞いてくださらないのでしょうか。私が、「暴虐だ」と、あなたに叫んでも、
あなたは救ってくださらないのでしょうか。
3 なぜ、あなたは私に不義を見せ、災いを眺めておられるのでしょうか。掠奪と暴虐は、私の前にあります。争いは起こり、論争は、持ち上がります。
4 それゆえ、律法は、無力になり、正義は、一向に行われません。悪者が義人を包み込み、正義が、曲げられて行われているからです。 ]
「助けてくださいと叫んでも聞いてくださらず、暴虐だ、と叫んでも救い出してくださらないので、主よ、いつまでそうされるのですか。なぜ私に不義を見せるのですか。なぜ悪をそのまま見ていらっしゃるだけなのですか。略奪と暴虐が私の前で繰り広げられ、争いと論争が絶える暇もありません。律法は形骸化し、正義は全く行われません。悪者が義人を脅かすので、正義が歪められてしまいました。神様! なぜ答えないのですか。なぜ公義を行わないのですか。悪人が義人を脅かしているのに、なぜ公義を行わないのですか」
何を前提にしていますか? 「私は義人(義なる人)だ!」ということでしょう。だから神様が5節から答えられます。
[ (ハバクク書 1:5-11)
5 国々を見よ、また眺めよ。驚き、驚き呆れよ。わたしは一つのことを、あなたがたの時代に行う。それが語られても、あなたがたは信じないだろう。
6 見よ。わたしはカルデア人を起こす。あの、激しく、性急な民族を。彼らは地の広々としたところを、あちこち歩き回り、自分たちのものではない住まいを占領する。
7 彼らは恐ろしく、また、ものすごい。その正義も尊厳も、彼ら自身から出る。
8 その馬はヒョウよりも速く、夕暮れの狼よりも荒々しい。その騎兵は、遠くから駆けて来、獲物を飲もうと舞い降りるハゲタカのように飛んで来る。
9 彼らはみな、暴虐を行うためにやって来る。その顔を前方に向け、捕虜を砂のように、かき集める。
10 彼らは、王たちをあざけり、君主たちを物笑いの種にする。彼らはあらゆる城壁を笑い、土を積み上げて、それを攻め取る。
11 それから、彼らは風のように、通り過ぎ、有罪となる。自分たちの力を、自分たちの神とする者は。 ]
お前たちは諸国民をよく見よ。驚き、腰を抜かすようなことが起こるだろう。お前たちが生きている間に、わたしはその事を行う。お前たちが聞いても、到底信じられないような事を行う。そう言いながら「わたしがバビロンを挙げてお前たちを打とう」と言われます。
「いや、神様! 私はわがイスラエルの人たちの癖を少し直してほしいと言ったのですが、いいえ、カルデア人! あのバビロンの人たち! 野蛮人を挙げて私たちを打つだなんて? いや、私たちを戒め、懲らしめるなら、私たちより優れた人々を通じて、このように戒めるべきであって、あの野蛮人! あの弱小国(当時の認識)を挙げて私たちを打つというのですか」
実際に紀元前586年にバビロンが、イスラエルを打って滅ぼしましたよね? つまり歴史は、神の御言葉に従って動かされるものであって、私たちが作っていくものではありません。ハバククが今食い下がっているのです。「いや、それにあのアリのような悪党どもは、私たちのものを奪い取って、腹一杯よく飲み、よく食べ、よく生きているではないですか」これが私たちの人生です。
私たちクリスチャンがそうなるのです。いや、私たちは神の御言葉どおりに生きようと法どおりにしようとするから、店の売り上げもきちんとすべて申告して、税金をすべて納めると、どうやって商売しますか。けれど神様はそうしなさいと言われたので、そうするのです。だから失敗し、時には潰れたりもします。クリスチャンは!
ところが、あいつらは私たちを利用して、私たちは法どおりに生きているのに潰れ、あいつらはもっと豊かに暮らしています。そのようなケースが、私たちのクリスチャンの人生にはあ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皆さんは逆に生きることを考えていらっしゃるでしょう? 「神様! あの者たちは早く滅ぼしてくださり、イエスを信じる私! お金持ちにしてください!」しかし神様は、「わたしはあなたをそうさせるためにこの地に来たのではない。わたしはこれを利用して、むしろ天のものをあなたに知らせ、それを与えに来たのであって、あなたを金持ちにさせ、よく飲みよく食べ、豊かにさせるためにわたしはこの地に来たのではない」と言われるのです。
ところが多くの教会で、イエスを信じれば、私たちはあの人々よりもずっと豊かに暮らし、ずっと顔もハンサムでなければならないし、ご飯をたくさん食べてもスリムになり……こうしたことを望んでい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奇跡が臨んでですね! 私たちのキリスト教は、そのようなキリスト教ではありません、皆さん!
だからハバククが今こう言っているのです。ハバクク書1章12節から見ると、
[ (ハバクク書 1:12-17)
12 主よ。あなたは古えから、私の神、私の聖なる方ではありませんか。私たちは死ぬことはありません。主よ。あなたは、裁きのために、彼を立てられました。岩よ。あなたは、責めのために、彼を据えられました。
13 あなたの目はあまりにも清くて、悪をご覧になれず、苦しみを見つめておら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それなのに、なぜ、裏切り者たちを黙って眺めておられるのですか。悪者が、自分より正しい人を、飲み込んでいるのに、黙っておられるのですか。
14 あなたは、人を海の魚のようにされ、治める者のない這い回るもののようにされます。
15 彼は、彼らをみな、釣り針で釣り上げ、網で引き寄せ、その引き網で彼らを、かき集めます。それゆえ、彼は喜び、楽しんでいます。
16 それゆえ、彼は、自分の網にいけにえを捧げ、引き網に香をたきます。それらによって、彼の取り分は豊かになり、食べ物も、たっぷりあるからです。 17 彼は、絶えず網を空にして、容赦なく諸国民を殺し続けてもよいのでしょうか。 ]
「主よ、あなたの目は清いので、悪を見て耐えられず、反逆を見てそのままにしていられない方です。それなのに、どうして裏切り者たちを眺めているだけなのですか。悪の民が正しい民を飲み込んでも、静かにしていられるのですか」16節を見ると、
「ゆえに、彼はその網のおかげで豊かに暮らすようになり、脂ののったものを食べるようになった」と言いながら、網に祭祀を捧げます。私たちのせいで、あいつらはよく飲み、よく豊かに暮らせるようにな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悪人たちはむしろ!
そこに向かって神様が仰るのが、まさにこの御言葉です。「ハバククよ! お前は今イスラエルが義人だと言っており、お前も今義人だと言っている。しかし、わたしがなぜバビロンを挙げてお前を打とうとしているのか考えてみろ! お前を懲らしめようとするのだが、このバビロンを挙げてお前を懲らしめるということは、お前もイスラエルも、このバビロンもカルデアの人々も、アッシリアも同じ人間だ」ということです。ただ「お前たちが義人になったのは信仰だ!」と言うのです。
「お前たちが何かが優れていて、お前たちが他人より特出していて、お前たちが義人になって生き延びたのではなく、『ただ義人は、信仰によるものだ』ということだ。わたしがわたしの愛で、わたしの父であること、わたしの神であることを、その愛と恵みと御心でお前を救ってやり、お前が義人になったのだから、口を閉じてじっとしていろ!」と言うわけですね。
そうして、その悪人たちがどのように呪われて死ぬのかを、ハバクク書2章で五つの姿で見せてくださるのです。するとハバククが3章で言います。「あぁ、神様! そういうことだったのですね。なぜ悪人たちが私よりもよく飲み、よく豊かに暮らしているのか、やっと分かりました。神様! 私を懲らしめ、諭し、教育させて、私を神の息子に作り上げるために、彼らを挙げて使っているだけなのですね。神様、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見てください、皆さん! バビロンや、アッシリアや、モアブや、ペリシテといった国々が、イスラエルを懲らしめるために挙げて使われたあの棒きれたちが、今存在しますか? ありません! 皆さんを苦しめ、皆さんを指差す彼らは、皆さんを教育し、諭すために送られた人々かもしれませんが、彼らはすぐに「あっちち! あっちち!」となるところへ行くのです。永遠に熱くて、「あっちち! あっちち!」と言う場所へ! 皆さんのために送られた者たちなのです。
それを知った後、ハバククが言います。「神様! それならば数年のうちに、」何ですか? 「早く復興(リバイバル)させてください!」と言います。「復興(復興)」という言葉は、聖書にそこ一箇所だけ出てきます。復興! 復興の火よ燃え上がらせてください、とよく言うでしょう? 皆さん、聖書にそこ一回だけ出てくるのですよ。その「復興」というギリシャ語原典はですね、「私たちを清める、私たちの悪を取り除く」という意味です。
「それならば神様! 早くその事を成し遂げてください! バビロンであれどこであれ挙げて、早くこのイスラエルの反逆を剥ぎ取ってください。数年のうちに私たちを復興させてください!」というその言葉なのです。早く我が教会をリバイバルさせてください、ではないのですよ。国語辞典のその概念ではないのです。聖書が言う復興は!
そして「怒りの中でも、憐れみを忘れないでください!」と言います。そのように私たちが懲らしめを受けている最中でも、私たちは自らの救いを考えられ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それが「怒りの中でも憐れみを施してください」という言葉なのです。ハバクク書3章1節2節がその言葉だということです。「ただ義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 お前たちが何か優れて、お前たちが他人より特出して、お前たちを救い出したのではない。ただ義人は信仰によるものだ。わたしがわたしの御心で救い出したのだ」
そうしておいて、ハバククがずーっと回想します。何を回想するかというと? 紅海が分かれたこと! 太陽が止まった事実! そのような歴史的、客観的な事実! その歴史的な事実を思い浮かべながら、「そうだ! そのような神様なら、この約束を必ず守られるだろう!」それがハバクク書3章なのです。
ハバククが、自分に下されるあの呪いがどれほど恐ろしいものかを見てですね、どうしますか? 自分の骨が腐っていくようだったそうです。あまりに恐ろしくて! 私の体は震えました。ハバククが! あの預言者が「そのように自分が受けるべき呪いが、どれほど恐ろしいものだったのに、私は何もしていないのに救い出され、ただその信仰によって救いを受けた者となり、彼らはその呪いを受ける」
この事実を知ったので、ハバククがパチッと、手をパチッと叩いて、「たとえイチジクの木に花が咲かず、ブドウに実がならず、私の牛舎に子牛がおらず、私の畑に収穫がなくても、私は私に救いを施してくださったあの神様だけを喜びます!」それが私たちクリスチャンの告白です。それが私たちクリスチャンの人生なのです。「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詩篇23篇)」その言葉なのですよ、これが!
「私は今、もし少し食べるのを控えるべき状況であり、もし他人より低い地位にいる人であっても、それでも私は主だけで満足する」それがまさに私たちのクリスチャンの人生だということです。「主は私の羊飼いなのに、私はなぜこのようにいつも乏しいのだろう?」私たちはそうしているではないですか。「主は私の羊飼い。私は乏しいことがありません!」こう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 そうではないのです、皆さん!
私たちはハバククのこの告白を、私たちも同様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イチジクの木に果実がなく、ブドウの木に実がないとしても、オリーブの木から採れるものがなく、畑から収穫できるものがないとしても、囲いに羊がいなくなり、牛舎に牛がいなくなったとしても、私は主によって楽しもう! 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神様の中で喜ぼう!」なぜ? 私は知ったから! 私はあのように死ぬべき者なのに、私に信仰が与えられて、私はあのように救い出された者なのだから、私は嬉しい! それが私たちの告白なのです。エペソ人への手紙2章8節に、
(エペソ人への手紙 2:8-9)
8 あなたがたは、恵みのゆえに、信仰によって救われたのです。それは、自分自身から出たことではなく、神からの賜物です。
9 行い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だれも誇ることのないためです。
今日の結論です。私たちから出たのではないのです。その信仰は!
皆さん! 皆さんはもしかして今、「私はイエスを信じたのに、どうして未だに罪に対する欲求が絶え間なく湧き上がってくるのだろう? なぜイエスを信じたのに、まだ私はこれほどお金に対する欲を捨てられないのだろう? なぜイエスを信じたのに、私の心の中にはこのように情欲が煮えたぎるのだろう?」もしかしてそのような失敗と挫折の場にいらっしゃる方、おられますか?
皆さんは今、アブラハムがエジプトへ食いぶちを求めて逃げ出した、あの場所にいらっしゃるのです。皆さんは今、自分が助かろうと、自分の妻を王に売り飛ばす、あのアブラハムの場に立っていらっしゃるのです。しかし皆さんは、その出来事をすべて経験し抜き、モリヤの山で百歳で産んだ息子を、神の前にポンと信仰をもって捧げられる者へと、作られていくでしょう。アブラハムの生涯とハバククのこの話を通じて、私たちの人生を見てください。そして勇気を出してください。皆さんは本当に100点なのです。
信仰は私に既に与えられており、その信仰は必ず私を、私の主観的な信仰へと導いていくだろう。それこそが皆さんの慰めになるべきであって、「痛いところに手を当てて祈ってください! すべて治りますよ」なんてことで喜ばないでください。「祈れば宝くじに当たりますよ!」それ、コメディではないですか? 礼拝堂でこのようなことを言うのは。「ただ主によって、私が楽しみ喜びます!」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