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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전 지급(신문왕 7년 687년) | 신문왕 7년 687년 5월 고나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녹읍 폐지(신문왕 9년 689년) | 신문왕 9년 689년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로서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정전 지급(성덕왕 21년 722년) |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
녹읍 부활(경덕왕 16년 757년) | 경덕왕 16년 757년 3워 내외 월봉(관료전과 세조)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
국학생 녹읍 지급(소성왕 원년 799년) | 소성왕 원년 799년년 3월 청주 거노현을 학생들의 녹읍으로 삼았다. |
다. 정전의 지급
왕토사상에 따라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고 조를 바치게 하였다. 신라 민정문서에 등장하는 연수유답(烟受有畓)은 정전으로 보인다.
3. 민정문서
가. 발견
1933년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0에서 유물 정리 도중에 제35대 경덕왕 14년 755년 또는 제41대 헌덕왕 4년 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원경(西原京, 청주)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나. 내용
⑴ 작성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변동사항을 기록하였다.
⑶ 내용
촌의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桑)・잣나무(柏)・호두나무(楸)의 수, 호구, 우마의 감소 등이 기입되어 있다.
인구는 연령에 의하여 정(丁, 丁女), 조자(助자, 助女子), 추자(追子, 追女子), 소자(小子, 小女子), 제공(除公, 除母), 노공(老公, 老母)의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연(孔烟, 戶)은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다. 공연의 정(丁)의 수를 합계하여 일년마다 1계연(一計烟)으로 계산하여 촌에서 역역을 징수할 정수를 파악하였다(최근에는 공연의 9등급은 종아 수가 아니라 재산의 정도에 있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촌에는 관모답・전, 내시령답, 마전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이 경작하였다.
토지 | 내용 |
관모답・전(官謨畓・田) | 국가의 수입 |
내시령답(內視令畓) | 내시령(內視令)의 수입 |
마전(麻田) | 국가의 수입 |
촌주위답(村主位畓) | 촌주의 수입 |
연수유답(烟受有畓) | 농민의 수입 |
신라에는 촌만이 아니라 향, 부곡도 존재했다. 군・현・촌이 양민 거주지역이고 향・부곡은 천민 거주지로 생각했으나 향・부곡도 군・현・촌주민과 같이 인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Ⅱ. 통일신라의 경제활동
1. 통일이후의 경제성장
가. 서시(西市)와 남시(男市) 설치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경주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시사(市肆, 소지마립간 12년 490년)과 동시전(東市廛. 지증왕 10년 509년)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32대 4년 695년 서시(西市)와 남시(南市)를 설치했다.
나. 수공업
각 물품마다 생산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거 있었고 왕궁내에 설치한 공장에서 장인과 노비를 통해 공급했다.
2. 대외통상
가. 당
조공형태의 공무역과 사절단이나 사신들에 의한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이후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당이 혼란기에 접어 들면서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했고 산동반도, 강소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新羅所, 관청), 신라관(新羅館, 여관), 신라원(新羅院, 절) 등이 설치되었다. 장보고가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유명했다,
나. 일본
처음에는 적대관계에서 무역이 성행하지 못했으나 8세기 이후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 아라비아(大食國)
울산에 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다.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신료 등 귀족의 사치품이 애용되었다.
라. 장보고의 활동
장보고(張保皐, 張弓福, 張弓巴)는 42대 흥덕왕(興德王) 3년 828년 완도에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로서 청해진(靑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일본과 당과 국제통상을 전개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으로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게 하여 중앙정계에 개입하고 딸을 문성왕비로 보내려다 귀족의 반대에 직면하여 46대 문성왕(文聖王)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어 청해진은 문성왕 1년 861년 폐지되고 1만 군대는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되어 재생이 억제되었다.
3. 생활 모습
가. 귀족
귀족은 녹읍(祿邑), 식읍(食邑), 사전(賜田), 마거(馬阹, 목마장), 조(租, 곡물)를 통해 농민을 지배했다. 귀족은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금업도 수입원이었고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하는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당시 주경(主京) 금성(金城, 경주)에는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 금입택(金入宅), 4 절유택(節遊宅)이 있었다.
나. 평민
시비술(施肥術)이 발달하지 못해 농업생산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을 경우 생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전세는 생산량의 1/10 정도였으며 공물(貢物, 삼베, 명주실, 과일류 등 특산물)과 요역(徭役, 繇役, 부역)을 부담해야 했다.
Ⅲ. 발해의 경제
1. 수취제도
조세 |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둠 |
공물 |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둠 |
부역 | 궁권, 관청 등의 건축에 노동력 징발하고 전쟁시 나가서 싸움 |
2. 산업
가. 농업
밭농사 위주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이 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나. 수공업
제철, 방직, 목재, 피혁가공업, 금속가공업, 삼베・비단・명주등 직물업, 도자기업이 발달하였다,
다. 어업, 목축업
고래, 명마, 모피, 녹용등이 풍부했고 돼지, 말, 소, 양등을 길렀으며 말(솔빈부의 말 유명)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라. 상업
상경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요지에 상업이 발달하였다.
3. 대외관계와 통상의 발달
발해의 주요 교통로에는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가 있었다. 조공도는 당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길이며 영주도는 당으로 가는 육로이고 거란도는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도로이고 일본도는 일본으로 가는 도로이며 신라도는 신라로 가는 길이었다.
5대 교통로(交通路)
발해의 주요 교통로에는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의 5대간선 국도를 건설했다. 당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조공도, 당으로 가는 육로인 영주도 서쪽의 거란국으로 가는 거란도,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와 신라로 가는 신라도가 있었다.
1. 거란도(契丹道)
발해에서 서쪽 거란국으로 가는 육로이다. 부여국(농안)은 거란과 접경지역에 있어 거란국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부여를 통과해야갈 수 있었다. 발해의 상경에서 출발해 장광재 고개를 지나 국경의 부여부를 통과한 다음 천산산맥을 넘어 거란국의 수도인 임황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2. 영주도(營州道)
발해의 수도인 상경에서 당나라의 영주로 가는 육로다. 현재 중국 요녕성에 있는 모양을 당나라시대에는 영주로 불렀는데 이곳에는 발해국을 관리 감독하기 위한, 당나라 조정을 대표하는 평로절도사(총독)가 주재했다. 발해국에 대한 당나라 왕의 명령이 영주의 평로절도사에게 전달되면 영주도를 통해 발해에 전달되거나 영주의 당나라 관리들이 발해로 들어갔다.
이 영주도는 당나라와 발해간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정치도로의 성격을 띠었다. 영주도는 상경에서 중경(현덕부)을 거처 현덕부의 중경(돈화)를 거처 화전·휘남·해남·신성(무순)·심양·흑산·북진을 통과해 영주에 이르는 길이다. 여기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를 넘어 당나라 수도 장안(서안)으로 들어갔다.
초기에는 이상과 같은 육로로 발해와 영주간을 오갔으나 거란과 돌궐족 때문에 영주도가 자주 차단되어 후기에 들어와서는 압록강을 거치는 해로인 조공도를 이용했다.
3. 조공도(朝貢道)
발해의 3경인 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으로부터 압록강과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의 등주(연대 근방)로 상륙해 육로를 통해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조공도는 육로와 해로를 거치게 되어 있는데 육로는 수도인 사영을 출발해 돈화·대포채화를 지나 무송을 거쳐 압록강의 임강진 근방에 있는 신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 다른 육로는 상경을 출발해 오아청가야 하류를 지나 연길·용정을 거쳐 중경 화룡의 서고성을 통과해 압록강 압록부의 서경으로 나와 배를 타는 길이다.
또한 용원부의 동경(훈춘)에서 당나라로 가려면 두만강을 타고 남강산맥을 넘어 부르하통하를 따라 연길과 용정을 지나 현덕부의 중경을 거처 안도·대포채하·무송을 통과, 압록부의 서경으로 갔다. 서경에서 당으로 길 때는 뱃길을 이용했다. 서경(중강진 근처)에서 강선을 타고 압록강으로 내려가 환주(지금의 집안)를 거쳐 압록강어귀인 박장구로 나와 돛 달린 해선으로 갈아타고 요동반도 해안을 따라 오골강(애하) 어귀를 지나 석인왕(석성도)와 행화포·도화초(대련)·여순을 거친 다음 오해호(발해만)를 건너 산동반도 북쪽 연안의 대사도(묘도열도)를 지나 등주로 상륙한 후 육로를 통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이다. 이 해로는 발해 제일의 간선교통로였다.
조공도가 개통된 정확한 시기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발해 초기로 추정된다. 발해 5대 교통로 중 제일 먼저 개척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 건국이 당나라와 밀접한 정치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 앙의특사인 홍영경과 최흔이 발해로 파견되어 대조영을 발해의 왕으로 정식 책봉한 2년 후인 서기 714년, 이 두 사람이 발해에서 당나라로 귀국하던 길에 요동반도 남단의 여순에 있던 황금산 기슭에다 조공도를 기념하는 우물 두 곳을 파고 조공도의 위치와 거리 그리고 경유지를 기록해 세운 비석이 후대에 와서 발견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발해는 수도 상경용천부를 중심으로 신라도·일본도·영주도·조공도·거란도 5개의 교통로를 이용했다. 이중에서 조공도는 발해와 당을 연결하는 가장 활발한 교통로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 전에 따르면 이 조공도는 현재의 헤이룽장(黑龍江) 성 닝안(寧安)시인 상경용천부에서 지린(吉林) 성∼압록강∼산둥반도의 덩저우(登州)로 연결되는 대장정 루트다. 이 시기 당나라 인들은 폐관(閉關)정책에 따라 자국민이 바다로 나가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발해의 상인들이 조공도를 통해 양국의 무역을 주도했다.
4. 신라도(新羅道)
발해의 4대 도시인 상경·동경·서경·중경에서 남경(함경도 부청근방)으로 가 신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발해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남경을 통과해야 했다. 삼국사기와 당나라 사기인 고금군국지에는 ‘남경(부청 근방)은 니하(용훈강)를 경계로 신라와 접했고, 신라의 정천부(함남의 덕원)에서 책성부(훈춘)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발해는 5대 교통로를 만들면서 각 도로마다 일정한 간격에 역을 두고 오가는 관리와 사람들의 여행을 돕도록 역로 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신라도 중에 동경용원부가 있는 훈춘에서 발해의 남경 남해부와 접경하고 있는 신라의 접천부 덕원 사이 길에는 30회마다 1개 역씩 모두 39개 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두 도시를 연결하는 육로는 1천170리나 되는 먼 거리였다.
5. 일본도(日本道)
발해의 상경·중경·서경·남경에서 용원부의 동경(훈춘)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길인데 이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 두 길을 지나야 했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용원부의 동경(훈춘)이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발해 내륙의 어느 곳에서나 일본에 가기 위해 배를 타려면 필히 동경으로 가야 했는데, 발해 전기(698∼755)에는 발해 내륙에서 화룡과 연길을 통해 동경으로, 후기(755∼926)에는 수도인 상경(용천부)에서 왕청과 도문을 통해 동경으로 들어갔다.
동경에서 일본으로 가는 뱃길도 전·후기가 다르다. 발해 전기에는 동경에서 출발해 두만강을 타고 내려와 현재의 크라스키노인 모구위(염주)에서 배를 타고 동해를 건너 일본 중부 연안의 후쿠이·이나이시가와로 상륙하는 직항로를 택했다. 그러나 이 직항로는 험한 편이어서 표류가 잦았다. 따라서 후기 때는 계절풍을 이용해 상대적으로 쉬운 남행항로를 개척해 이용했다. 바로 훈춘에서 염주(크라그티노) 항구로 가서 배를 타고 한반도 해안으로 내려와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를 지난 후 일보의 북규슈에 도착하는 ‘규슈항로’였다.
가. 당
처음에는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를 견제했으나 장문휴가 산동지방을 공격하였고 3대 문왕이후 우호관계를 맺었다.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통상을 하였으며 산동반도의 덩조우(登州)에 발해관을 설치했다.
나. 일본
당과 신라의 협공에 대비하고 외교 고립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했다.
다. 신라
남북국시대 두 나라간에는 친선과 대립이 교차하였으며 당의 빈공자 합격을 위한 문화적 우월 경쟁도하였다. 국경근처에 상설적인 교류가 이우어졌다.
라. 돌궐(突厥)
당을 견제하기 위해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돌궐(突厥, 괵튀르크, Gokturk 551년-657년)
1. 기원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하던 투르크계 민족으로 천산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다. 돌궐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이며, ‘주서(周書)’ 이역(異域) 돌궐(突厥) 열전은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며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557년의 영토는 6,000,000km²이다. 괵튀르크는 하늘의 튀르크 혹은 천상의 튀르크라는 의미이다. 지배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는 처음에 알타이 산맥 서남쪽으로 가서 유연(柔然)에게 복속되어 있었지만, 족장 토문(土門) 때 그 세력이 강대해졌다. 6세기 중엽 551년 토문(土門)은 유연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 이리 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고 동생인 디자브로스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투르키스탄을 경략하게 했다. 한편 투르키스탄에서는 디자브로스가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키고(563~567), 서면 카간(西面可汗)으로서 세력을 떨쳤다.
제3대 목간 카간(木杆可汗) 때 당시 강자로 군림하던 유목 제국 유연((柔然)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정벌하고 키르기스를 장악한 다음 본거지를 북몽골의 우트켄 산으로 옮겼다. 중앙아시아에서 만주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세력 확장을 펼치고 흉노에 비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2. 돌궐 분열
돌궐의 세력은 급속히 강대해졌지만,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동족간의 싸움이 그치지 않아 통일의 기반이 취약했다. 30년후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는 교묘한 돌궐 이간책을 써서 이시바르 카간(沙鉢略可汗)때인 583년 투르키스탄의 서면 카간을 독립시켰다. 이때부터 돌궐은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누어졌다.
동돌궐은 도남 카간(都藍可汗)의 치세 때 그와 달두 카간(達頭可汗), 돌리 카간(突利可汗)이 서로 싸우다, 603년 결국 돌리 카간은 수에 투항하고 도남 카간은 부하에게 살해되었으며, 달두 카간은 수나라 군대에 격파되어 달아났다. 돌리 카간은 계민 카간(啓民可汗)으로 개칭하고 오원(五原) 지방에서 유목지를 얻어 북몽골 지역에 거주하던 철륵(鐵勒 : 당·송대(唐宋代)에 중국인이 투르크족을 부르던 이름) 각 부(部)를 통제하게 되었다. 돌궐의 혼란기에 철륵 각 부가 세력을 신장시켰지만 동·서 돌궐이 다시 강대해지면서 다시 이들에 예속되었다. 동돌궐에서는 시필(始畢)·처라(處羅)·힐리극한(頡利可汗)의 세 카간이 연이어 옛날의 국력을 회복했고, 힐리극한(頡利可汗, 일릭 카간, 고대 투르크어: Illig qaγan, ? ~ 634년)동돌궐의 마지막 카간으로 당 정관 4년(630년), 이정의 공격을 받아 사로잡혀 항복했다. 이로써 동돌궐은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서돌궐에서는 사궤(射匱)·통엽호(統葉護)의 두 카간이 동방의 철륵 각 부와 서방의 페르시아·쿠샨 등을 정벌하고 투르키스탄에서 패권을 장악했다. 서돌궐은 실크 로드 중간에 자리잡고 있어 각국 상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또 이곳에 불교·조로아스터교·네스토리우스교(景敎) 등이 전파되었다. 당의 현장(玄奘)도 이곳을 거쳐가면서 통엽호 카간의 도움을 받았다. 서돌궐은 이슬람화 되었는데 그 중 오구즈 투르크멘 부족이 셀주크 제국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99년 튀르크 족은 오스만 제국(1299~1922)을 건설하였다.
이와 같이 서돌궐은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동돌궐은 630년에, 서돌궐은 657년에 각각 당에 멸망되었고, 당은 이곳의 각 지역에 도독부(都督府)·도호부(都護府)·주(州)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7세기말 서돌궐 지역에서는 돌기시(突騎施)가 독립했고, 동돌궐 지역에서는 아사나골출록(阿史那骨咄祿)이 당에 반기를 들었다.
골출록은 일테리시 카간 이라 칭하고 돌궐을 다시 세웠다. 이것을 후돌궐이라고 부른다. 동생인 묵철(默啜)이 그의 뒤를 이어 카파간 카간이 된 뒤로는 세력이 더욱 커져 거란·키르키스·탕구트를 정벌하고 돌기시까지 격파하여 영토가 동서로 1만여 리(里), 병력이 4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북방의 철륵 각 부가 반란을 일으켜 카파간 카간이 그들을 토벌하러 나갔다가 전사했다(716). 그뒤 카간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지만, 결국 골출록의 아들 퀼테킨(闕特勤)이 형을 빌게 카간(毘伽可汗)으로 세웠다.
그는 스스로 군권을 장악하고 인망이 두텁던 톤육크(暾欲谷)를 고문으로 맞아들여 부족간의 안정을 도모했다. 빌게 카간은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734년 빌게 카간이 독살된 후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바슈미르·위구르·카를루크 등 여러 부족들이 독립함에 따라 후돌궐은 멸망했다. 후돌궐은 돌궐 문자를 사용했고, 빌게 카간, 톤육크, 퀼테킨의 공적을 기린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3. 대외관계
가. 고구려와의 관계
고구려와의 대외 관계는 거란과 말갈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다가 수의 통일 후 일시적 소강상태를 보인다. 그러나 7세기에 들어서 돌궐은 당의 고구려 원정에 동참하며 다시 한번 적대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나. 수당과의 관계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중국이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589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을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북방의 강자 유연(柔然)을 멸망시킨 새로운 패자 돌궐은, 중국과 대립관계가 된다.
6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자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서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은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고, 돌궐의 힐리 카안(頡利 可汗, Kieli Ka?an, Hieli Ka?an, ?li? Ka?an)은 당나라에 신속하면서 당과 돌궐 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한다. 중국과 돌궐의 관계를 보면 주도권 관계가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분열되면 중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중국에 복속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중원 왕조는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4. 돌궐문자
돌궐은 처음에는 소그드 문자를 썼다. 현재 소그드문자로 된 〈목간특근기공비 木杆特勤紀功碑〉가 남아 있다. 후에 소그드 문자의 자모를 빌어 돌궐 문자를 만들어 북방 유목 민족 가운데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돌궐 문자는 서아시아의 시리아 문자를 변형한 것으로 한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표음 문자였다.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면서도 독자적 문자 체계를 유지한 사실은 돌궐 민족이 강한 민족 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5. 제도
관제(官制)로는 카간 아래 엽호(葉護)·설(設)·특근(特勤)·사리발(俟利發)·토둔(吐屯) 등 28관원이 있었다.
6. 조세
세금으로 유목민들에게 병마를 징발했고 각종 가축에 과세를 부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