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든 말끝마다 졸라, 졸라, 하던/기철이,/택배 한 건 더 하겠다고 급하게 계단 뛰어 오르다/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갔다/계단에 거꾸로 엎어진 그의 이마엔 상처 하나 없었다고 했다/미처 배달하지 못한/스치로폼 박스에 든 냉동 새우가/그의 머리맡에 뒤집어져 있었다고 했다//소주든 양주든 무조건 원샷이던/병식이,/오토바이 배달 가다 트럭에 받혀/바로 그 자리서 하늘로 배달되었다고 했다/스키드마크처럼 달려온 쌍둥이 아들이 주검을 들추며/자기 아빠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고 했다/뒤집힌 오토바이 바퀴가 한참을 더 헛돌았다고 했다/으깨진 철가방에서 쏟아진 짬뽕 국물이/경사진 노면을 따라 배수구 쪽으로 벌겋게 흐르고 있었다고 했다//똘똘말이 아니면 당구 안 치던/기혁이,/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남은 삶을 새벽잠과 함께 똘똘 말아 버렸다/한평생 모로만 누워 자던 그의 몸을 생전 처음으로/그의 아내가 반듯하게 펴서 눕혔다고 했다/당구공에 맞은 것처럼 붉은 시반이 온몸에 얼룩져 있었다고 했다//남은 세월이 기껏 얼마나 더 된다고/그걸 하나 제대로 늙어 죽지 못한 성질 급한 놈들/성질만 더러워 평생 누구에게도 민폐 한 번 끼치지 못하던 놈들/늙어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친구들을/생전 처음 한 자리에 다 불러 모으는 민폐를 끼치곤/어느 날 갑자기 제 성질대로 가 버렸다/어제 만남이/오늘 만남을 알지 못하는 순간에
「시와반시 봄 Vol. 127」(2024년, 시와반시) 전문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클레비치(1903~1985)는 『죽음에 대하여』에서 죽음을 인칭에 따라 구분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죽음이 3인칭의 죽음이다. 인구통계학적인 ‘흔한’ 죽음으로, 나의 삶에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으로 현재도 많은 이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처음과 달리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무뎌져 있는 게 사실이다.
다음으로 나의 부모나 형제나 친구 등의 죽음인 2인칭의 죽음이 있다.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깨닫고 삶의 무상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장클레비치는 2인칭의 죽음이 내 삶의 가치를 더해 줄 기회가 되기도, 아니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나약한 삶을 보내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2인칭의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조언한다. 1인칭의 죽음, 즉 언젠가 맞닥뜨릴 ‘나’의 죽음을 준비할 전환점이 바로 이 2인칭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제대로 늙어 죽지 못한 성질 급한” 친구들을 셋씩이나 둔 탓에 2인칭의 죽음을 세 번이나 겪었다. 봄 햇살 저리 환하다. 젖은 그의 마음이 참으로 시리겠다. (* 『죽음에 대하여』의 내용은 유튜버 ‘대동여지도’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