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으로 번져온 층위의 문장들
-함진원 시집 《눈 맑은 낙타를 만났다》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세계의 상투성과 맞서려는 자가 시인이다. 다만 칼 대신 상상력을 통해 발현한 문장으로 행동할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아집으로 견고해진다 해도 그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의 모습에서 침투시키려 한 모종의 정치성을 간파해 내는 예리함을 피해 갈 수 없다. 시인은 지루하게 펼쳐지고 있는 현상들에서 그것들을 끝내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 없어한다. 그것의 다른 말은, 시는 동일한 언어로 말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함진원 시인이 추구한 시적인 세계에서 추구해 가는 문장의 형용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에서 반복이 아닌 시어를 추구한 것도 문장이 지녀야 할 매혹이란 것을 충분히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갖는 최고의 장점이란 것은 상징적인 극단의 간극에서 온다. 하지만 그런 창작 기법이란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으로 상상 이상의 고통이 요구된다. 삶의 무의식 속에 내장된 상상력의 탄력감도 알고 보면 이미 표상으로 내면화된 개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양하게 발색하듯 이미 고유성으로 존재한 혼돈 속에서 나름의 질서 체계를 이뤄 문장으로 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시적 사유로 발화된 주체적 자아의 서정성에 있다. 그 과정에서 극도의 몰입은 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것을 가리켜 고통 속에서 건져 올린 그리움 속 고뇌의 층위를 시적으로 전위화하면서 고도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낮달로 스미는 봄바람 사이로
옥양목처럼 정갈한 이웃들
다듬 다듬 다듬이 소리
나랏일 보러 간 오라비 목울음인가
흐드러지게 핀 철쭉 다듬 다듬 다듬어진 소리
이렇게 맑은 봄날이면 귓가에 머무는 애절한 소리
얼음장 같은 시집살이 다듬 다듬 다듬어 견딘
이 나라 핏빛 세월 세월들
증심사 오름길 걸으며 생각나는 소리는
다듬 다듬 다듬어진 다듬이 소리
가슴 엔 듯 적시고 가는 찬 강물 소리
-<증심사에서> 부분
사물로부터 전이된 풍경에서 마치 음악을 감상하듯 거칠어진 마음이 다소곳해졌다. 증심사를 오르다 점심으로 보리밥을 먹고 난 뒤 포만감으로 얻은 덤인지 모르지만, 주변과 어우러진 단상들이 성장 과정의 원 체험적인 기억을 발동한다. 풍경이 과거의 시간으로 전이되면서 ‘낮달’이 ‘봄바람’을 매개로 ‘옥양목’으로 변주되고 그 주변을 맴돌고 있는 ‘이웃’으로 변주된다. 아주 오래전 이웃집에서 다듬이를 두드려 옷주름을 펴던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 다듬이 소리는 단순하게 빨랫감에만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남의 이목을 피하려고 다듬이를 두들겼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봄이 한창 무르익어 앞산 능선마다 핀 철쭉을 보며 고된 시집살이에 봄꽃놀이 한번 나설 수 없는 씁쓸함을 다듬이 소리로 억누르며 살았던 것이다. 화자도 살며 그런 때가 있었던 듯 “증심사 오름길 걸으며 생각나는 소리는/ 다듬 다듬 다듬어진 다듬이 소리/ 가슴 엔 듯 적시고 가는 찬 강물 소리”가 이명처럼 잊힌 기억을 되살려준다. 세상이 아무리 심사가 뒤틀려도 청랑한 다듬이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지면 한 동안은 집집들이 편안해지곤 했던 추억을 소환했다. 화자가 바라는 세상도 그렇게 맑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희구가 증심사의 반경을 아우르면서 무등으로 번져간다.
저리도 시끄러운데 피었습니다
내가 안녕 했더니
저도 안녕 합니다
미움과 원망까지 꽃향기에 묻으니
진초록 새움 돋았습니다
그저,
다행스러움만 떠올리며
감사하라고 속삭였습니다
꽃 아래 꽃 같은 아이들 봄바람과
놀고 있습니다
손때 묻은 세월 오롯이 놓아둔 채
엄마는 집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목련꽃 아래서 엄마 불러봅니다
-<목련꽃 피었습니다> 전문
1연에는 외면과 단절에 대한 마음을 열고 있다면 2연은 감사한 마음을 3연은 엄마의 세월을 상기시킨다. 1연에서 “저리도 시끄러운데 피었습니다”라는 데는 그간의 말 못 할 사정을 담고 있다. 단순하게 소음성 소란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혼란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환경이란 것이 매우 열악한데 목련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얀 꽃망울을 펼친 것이다. 목련꽃을 향해 “내가 안녕했더니/ 저도 안녕 합니다”하며 명랑한 인사를 건네온다. 결국은 사회관계론적인 소통 기제를 언급하고 있다. 2연은 화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말해준다. “꽃 아래 꽃 같은 아이들 봄바람과/ 놀고 있습니다”라며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현실에 감사해야 함을 깨달은 것이다. 3연은 엄마의 시절을 상기한다. 생각해 보니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온 엄마였다. “엄마는 집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목련꽃 아래서 엄마 불러봅니다”에서 엄마는 목련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한 화자의 심중은 다른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유형적인 엄마의 삶을 어느덧 화자도 답습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세월이 흘러 화자도 ‘할머니’란 호칭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목련꽃’을 통해 안타깝게도 흘러간 시절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사진 정리하다/ 라일락꽃 그늘 아래서 함박, 웃었던 사진 한 장/ 꽃무늬 원피스에 긴 머리 단정하게 묶은/ 라일락 향기가 솔솔 나는 사진 한 장/ 가난해서 좋았고,/ 부족해서 좋았고,/ 그냥 좋았던 시절/ 스물, 꽃다운 나이”(<라일락 그늘 아래서>)를 상기하는 화자의 속내가 몹시 싱숭거렸다. 누구나 그런 한때를 다들 갖고 사는 줄 알았고, 그냥저냥 산다고 바빠서 그 시절을 잊고 살았을 뿐이다. 그만한 시절에 누린 행복을 그때는 알지 못한 것이다. 꿈속 같기도 한 아름다운 시절은 다시 올 수 없다. 어려웠던 시절은 잊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살이가 고달플 때마다 하나씩 꺼내 들며 자신을 위로해 줄 소중한 자산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먼 훗날 현재의 시간도 되돌아보면 색이 바래 아득해진 흑백 사진첩처럼 아련한 그리움이 될 것이다.
“울어서 될 일이면 날마다 울겠지만/ 울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네”(<운다고 옛사랑이 오겠냐마는>)라며 무섭게 흘러가는 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다. 안타깝게도 돌아올 수 없는 추억만 새록거린다. 우리가 살아온 생애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너무 멀리와 있다. 이제는 지나간 일들의 후회가 가슴을 파고들지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유행가 가사 한 소절이라도 읊조리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그마저 생각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진정성에서 비롯된 화음이 전한 아름다운 삶의 매혹인 것이다.
“수수한 사람들끼리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기어이 흥을 놓다 콧물 훌쩍인다”(<비는 내리는데>)라며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날 생각이 없다. 그럴만한 점심을 때우는 곳이 국숫집이니 마음도 편하고 그저 끼리끼리 뭉쳤으니 말 나눔도 편해서 좋은 것이다. 흉도 볼만하니 끄집어낸 것이고 다들 수긍할 만하니 재미진 것이다. 사는 것이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물 찍고 만다. 사람마다 가슴 속 곡절 깊은 사연이 나올 밖에 그럴 때 ‘우리끼리’란 공동의식체로 견고해지는 법이다. 그러니 그만 일어서자는 사람도 없어 달빛에 파꽃이 저홀로 여물어간다는 국숫집 풍경이 아늑해져 좋기만 하다. 아직은 모닥거려 수다를 떨 사람들이 있어 감사할 일이다. 그것도 찰나란 것을 시간이 더 지난 뒤 세상 이치처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순간의 잘못한 생각으로 오랫동안 마음 아파하는 경험들이 있다. 만약에 “그날 돌아섰으면 어떻게 됐을까/ 뜨신 차를 자꾸자꾸 따라주는/ 아주 많이 추웠던 날// 허심거릴 때 먼 길 왔다며/ 따순 밥 먹자고/ 손잡아주는 마음 있었다”(<그 겨울>)라는 할머니의 표정에서 주변과의 연락이 끊긴 채 홀로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관계 단절을 말해준다. 발길 끊긴 독거노인의 쓸쓸한 하루는 항상 사람 그리워져 앓아누울 짬도 없다. 그날 찾아간 집의 풍경이 딱 그랬다. 화자가 일어서려는데 잡아끄는 손을 바쁘다며 뿌리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안도하고 있다. 그해 겨울이 끝나기도 전 부음을 들었을 것이다.
가을 돌아와 바람 살살 불면
목포에 간다
갯내음 반기며 저녁놀 물든 선창가 만나는 곳
지친 마음 오래도록 말리다 보면
똑똑 여문 달빛도 뒷개로 온다
가을 돌아와 싱숭생숭하면
목포에 간다
목포는 항구다 노래 듣고 있으면
만선의 깃발 흔들며 바다도 뒷개로 온다
가을 돌아와 울렁증 넘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목포에 간다
항구가 된다
갯바람이 된다
워매, 워매 너는 목포 뒷개도 몰라야
-<우매, 뒷개도 몰라야> 전문
전라도에는 특유의 감칠맛이 나는 말투가 더러 있다. ‘응 긍깨’, “뭐시기 거시기”, “긍갑다~ 잉” 이런 말투는 지역성을 대표하는 상징어이다. 이 말 몇 개만 추임새처럼 끼워 넣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소통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화자는 목포를 찾았다가 이 말 말고도 재미있는 ‘뒷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미 실재한 것에 대한 재발견도 상상력으로 추수된 시적 언어여서 형상성을 충분하게 부조한다. ‘뒷개’란 언어가 화자의 귀에 반복적으로 들려왔고 그 말에 대한 적응의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다. 언어 자체가 기표와 기의 속에서 미미하게 충돌하면서 지속적으로 미끄러져 간극을 발생시키기 때문, 문제점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이 말처럼 사용하기에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 전혀 몰랐던 ‘뒷개’란 말이 귀에 박히면서 시적 상상력을 상승시킨다. ‘목포’하면 먼저 떠오르는 ‘뒷개’다. 그 말은 아무 곳에나 붙여놔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토종언어다. 말과 말이 얽히거나 혼란스러울 때 끌어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뒷개’다. 화자의 귀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졌고, 어원의 사전적 의미보다 남도의 정서를 상징하는 향토 언어란 점에서 따라 하기만 하면 그만인 순치脣齒의 우리말이란 것을 알았다. 목포에 가면 ‘앞개’로 나와선 안 되는 이유가 있었기에 살금살금 ‘뒷개’로 세상을 살피며 살아온 세월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위태위태했던 때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목포에서는 ‘뒷개’ 치는 것이 최고였다.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목포가 갖는 해안 접근성의 이점으로 부당한 개항을 하면서 가장 먼저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부침의 세월을 겪어온 사람들이라 신중한 언어 행동이 ‘뒷개’로 표현된 것이다. 요즘 ‘뒷개’가 목포를 알리는 상권에 붙여 활용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앞서가거나 서두르지 말란 것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들고/ 길 잃었을 때 눈 맑은 낙타를 만났어/ 뒤돌아보지 않고 쉼 없이 가야만 했던/ 고단한 생 한 점 한 점 찍으며/ 꿈 접지 못한 채/ 파닥거리며, 쓰러지며, 잠을 이기며/ 눈먼 호랑이 찾아 순례길 떠났다는 소식”(<느린 길>)을 전해 듣는 사람도 화자다. 혼자서 무대에서 다역을 수행하다 보니 지칠 만도 하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처지라 그만둘 수도 없다. 오직 팔자려니 하면서 고된 노역에도 앞만 보며 가야 한다. 잠깐이라도 해찰하면 여지없이 고통은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아무리 급하다고 시간을 서둘러 저녁을 맞이할 수 없다. 자연계의 질서에서 아침 해가 지루한 자오선을 따라 돌 듯 인생살이란 것도 세월이란 속도를 따라야 한다. 낙타가 사막의 모래바람을 긴 눈썹으로 헤쳐가며 한 걸음씩 나아가듯 우리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봄이 하늘거리면
목 울음 마른 등에 붙어
혼자 가는 길 외로울까 봐
환한 봄 따라가네
네 그리움이 내 그리움
내 마음이 네 마음 아니었더냐
뜰에 핀 수선화는 마냥 고운데
네 생각 나 세량지에 가면
위로의 말 건네는 푸른 하늘을
차마 볼 수 없어
뜰에 핀 수선화는 지고 있는데
혼자 가는 길 외로울까 봐
환한 봄 따라가네
-<환한 봄 따라가네> 전문
사물이 충만한 이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 안에는 무엇이 존재하기에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그토록 간절해지는 것인가? 무표정한 저 현상들이 화자를 사이에 둔 채 서로를 밀당하고 있는 것인가? 내면에 켜켜이 쌓여있는 만감처럼 몰려오는 ‘봄’은 미리 예정된 연기적인 인연이었던가, 그도 저도 아니면 우연일 뿐인가? 찰나에 만나 그저 막연하게 스쳐가면 그만인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와는 무연한 것인가? 화자가 말하고 있는 ‘봄’은 단순한 봄이 아니라 실존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에 발목을 잡혀 사는 우리는 무상감에서 쉽게 초연超然해질 수 없다. 그에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채 뒤따라가는 ‘목 울음’은 질긴 인연으로 맺어진 존재란 것이다. 그렇지만, 우주의 신비로 부여받은 생명성은 안타깝게도 유한한 것이 문제다. ‘세량지’를 통해 스쳐간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봄 풍경 한가운데에 화자가 서 있고 내색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번 가면 다시 그 ‘봄’은 오지 않는 것을 알고 있어 슬픔이 더 복받치는 것이다. 언젠가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이별의 아픔을 상기하며 “네 그리움이 내 그리움/ 내 마음에 네 마음 아니었더냐”라며 자연의 현상을 통해 환기되는 지난 시절을 상기하고 있다. 그 대상(봄)을 향한 시간은 시적 감수성을 극도로 예민하게 하였고 분리해 나온 자연으로 다시 귀의하고자 한 절실함과 그에 따른 고뇌일 것이다. 때마침 세량지의 수선화가 심금을 파고들어 그리움을 출렁였고 진정된 마음을 파장하고 만다. 무릇 사람과 무관한 일이라 쳐도 세량지의 풍경을 통해 심연 속 그리움이란 것을 수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리는 서정성은 봄기운을 능가하여 애틋해진 마음을 투영해 준다. 화자는 수심을 넘나든 절정을 애써 수습하려 하지만, 마음을 뒤흔드는 것은 여전히 서정적 자아로 유효한 진경에서 파동한 시적 발현이다.
누구나 이 풍진風塵 세상을 살며 겪는 일이 다반사이듯 “살아야 할 의미를 못 느낀다는 후배에게/ 까칠한 날 세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죽고 싶을 때 있었다고”, “후배에게 엽서가 왔습니다/ 해가 뜨나/ 달이 지나/ 사는 것 마찬가지라 여겨 숨죽이고 살아보겠노라고/ 아직 숨이 살아서 뛰는/ 또박또박한 글씨체 새겨져 있었습니다”(<숨이 붙은 엽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한 마음을 반전시켜 경이로운 생명성을 일깨워준 시다. 자칫 무관심으로 끝날 수 있는 순간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따뜻한 신뢰는 개별성에 달한 사회의 이기심을 ‘우리’라는 공동 의식체로 환기해 준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 세계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조리한 채로 굴러가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인식의 쉼표를 유예하고 있다.
“왕버들나무 아래 여름을 내려놓은 동강댁은 수심이 깊다 애호박처럼 주렁거리는 애들 생각하면 잠이 오다가도 벌떡 일어나 어제 뜯어다 놓은 호박잎이라도 다듬는 손이 재빠르다 손가락을 보면 뭉퉁하게 닳아져 손톱 자를 일 없는 그의 목에는 늘 머릿수건이 둘러져 있는데 땀으로 삭아 내려 곱상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남편 복 없는 년이 뭔 복은 타고났겠느냐고”(<여름날>) 푸념처럼 넋두리를 한다. 혼잣말로 주절거리는 신세타령을 보면 동강댁은 남은 슬픔마저 체념해 버린 듯하다. 남 보란 듯이 한평생 잘 살겠다고 애틋한 서방 만나 꾸린 살림이었는데 기구하게도 홀로 남겨져 평생의 발목을 붙잡고 만 것이다. 도무지 형상을 드러내지 않는 죽음으로 혼자가 된 동강댁이지만 비관하지 않고 팔자려니 하며 여름날의 피로를 일장춘몽같은 낮잠으로 보상받고 있다.
가슴에 맺힌 일들이 한두 가지랴 싶다가도 왜 ‘내가’라며 묻곤 할 때가 있다. “밤새 뒤척였던 명퇴가 나가자 희멀건한 낮달 같은 우두커니가 재취업 이력서를 구겨 넣은 채 봄밤 속으로 떠난다/ 그날 저녁 희망을 위한 행진곡만 목메게 불렀다는/ 진통제로 산다는 귀엣말이 고봉밥으로 새어 나온다/ 벚꽃이 터지는 사직동에 피 냄새 나는/ 꽃잎들이 떨어져 내린다”(<사직동에서>)에서 화자는 악몽 같던 지난 일들을 회상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명퇴’를 맞닥뜨리면서 긴 번민의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사직을 하고 말았다. 이후 사직동을 지날 때마다 활짝 핀 벚꽃에서 피 냄새가 난 듯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현실 속에서 부닥칠 수밖에 없는 생존과 실존은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때나 함께였다. 호불호를 떠나 닥친 현실은 누구에게 떠넘길 수 없는 화자의 몫이기에 감당해야만 한다. 어느 것이 살아있는 것이고 죽음이어야 하는가를 분간하지 못할 때 오는 허무감이나 패배감은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 고단한 삶과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부딪쳐왔기에 미얀마 국민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다. “울지 말아요 미얀마, 미안해요 미얀마/ 민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미얀마가 울고 있다/ 자유를 위해 흘린 피는 세세토록 아름답게 기억한다네”(<울지 말아요 미얀마>)라며 미얀마 국민들이 겪는 고통이 ‘80년 광주 5월’과 다르지 않다며 말을 이어간다. “총으로 얻은 것은 결국 총으로 돌아가고/ 평화는 승리로 일어나/ 빨간 코트를 입은 오월이 힘내라고/ 임을 위한 행진을 부른다”(<빨간 코트를 입은 오월>)며 미얀마 국민들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대한민국의 ‘80년 광주 5월’의 참담했던 역사를 말해준다. 핏빛으로 물든 주검에다 피 묻은 태극기를 덮어야만 했던 참담한 역사를 기억한다. 인간이 누려야 할 존엄적 가치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사람답게 살겠다는 자유와 민주, 인권은 하루아침에 그냥 오지 않는다며 “3 · 1, 4 · 3, 4 · 16, 4 · 19, 5 · 18/ 마음 모아 민주의 잎눈 뜨고”(<묵념의 시간>) 그들이 흘린 고귀한 피의 대가로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다며 감사한 마음을 되새긴다. 그것마저도 살아있어 가능한 “어쩌다 본께 봄이 훌쩍 가부렀시야 올봄에도 니 얼굴 못보고 말아분께 쪼까 서운해서 죽것다야 복사꽃도 진즉 피어불고 유채꽃도 만발해부렀는디 언제 한번 와볼란가 모르겄데이 그러고 바삐 살아서 어쩐다냐”(<봄이 다 가부렀시야>) 라며 살가운 안부를 전하며 인정머리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의 가슴을 깨워준다. 시가 가져야 할 온기 가득한 시편을 통해 서정 깃든 시의 근본을 상기시키고 있다.
지금껏 시편들에 담긴 함진원 시인만의 시적 변별성을 특정해 보려 했다. 좋은 시는 우리의 삶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시로써 보여주었다. 그것의 바탕은 탄탄한 경험 속 서사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발현할 수 있는가였고, 물음에 답하듯 각각의 시마다 분명한 시의성을 담고 있었다. 그런 결과로 구조된 시적 여운은 공감으로 오랫동안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사유의 시적 형상화는 현실에 대한 원체험 속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그것의 시적 완성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발현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시의 구조에서 작동하는 층위의 다양한 변주는 함진원 시인만의 시적 담론으로 추수한 전위라고 이해하고 싶었다. 가장 눈여겨본 시적 변용을 보면 일상적인 삶의 층위들을 소중한 문장으로 치환하여 시가 가져야 할 위의를 충분하게 드러냈다는 것에 있다. 시가 함의한 삶의 언저리는 언제나 일상처럼 반복된 생애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 시의 구조를 탄탄하게 형상화할 수 있는 보호재이면서 외연 확장의 자극과 촉진을 활성화하는 접면으로 활용된다는 것도 확인해 주었다. 그 본성이자 근원인 시의 완성을 위한 기조는 우리가 문학 이전 진정한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함진원 시인은 시로써 말해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