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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노무현대통령 충주지역 시민추모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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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게시판 스크랩 <펌>[윤태영의 기록-9] 취미와 기호 ①담배와 술
체 게바라 추천 0 조회 96 14.01.15 21: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깝거나 멀거나, 하지만 끊을 수 없었던

[윤태영의 기록-9] 취미와 기호 ①담배와 술

윤태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부속실장

담배부터 이야기해야 되겠다. 술이라면 모를까, 담배를 빼놓고는 그의 삶을 이야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분명 애연가였다. 그러나 ‘줄담배’를 태우는 지독한 골초는 아니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담배에 연달아 불을 붙이지 않았다. 이 말은 물론, 그렇게 특별한 경우도 있다는 의미이다. 역시 대통령직에 있을 때의 일이다. 여느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심경이 복잡할 때면 그는 담배를 쉬지 않고 물었다. 방안은 금세 담배연기로 자욱해졌다. 난처한 국면을 마주했을 때, 더하여 마땅한 출구조차 보이지 않을 때, 담배는 그의 벗이었다.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흡연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금연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정치인 시절 숱한 시도와 좌절이 있었다. 스스로의 정치역정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만 정치의 큰길을 결단하듯 단호하지는 못했다. 미련과 아쉬움이 항상 있었다. 패치도 붙여보았지만 두어 달을 가지 못했다. 잘 나가다 다시 원외로 돌아오듯 결국은 흡연의 세계로 돌아왔다.

 

재임 중인 2004년 말, 주치의로부터 금연령이 떨어졌다. 끊는 것 이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로부터 5개월,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그는 담배와 담을 쌓았다. 습관처럼 본관 소집무실 소파 옆의 서랍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곳에 담배는 없었다. 부속실이나 관저의 주방도 담배를 준비해놓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의 갈증은 충분히 공감이 가지만, 주치의의 단호한 방침을 따르는 일은 더 중요했다. 그는 끝내 우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흡연을 하고픈 내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최소한의 체면이었을까?

 

끊을 수 없었던, 끝까지 함께하진 못했던

그 무렵 그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역시 애연가인 이해찬 국무총리였다. 그는 총리와 주례오찬이 있는 월요일을 은근히 기다렸다. 식사와 함께 간단한 보고가 끝나면 그는 서둘러 이해찬 총리에게 담배를 청했다. 두 사람은 허물없는 친구처럼 담배를 나누어 피웠다. 오찬이 끝날 때까지 그는 서너 개비를 더 피웠다. 부속실은 걱정이 되었지만 주치의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대통령의 담배는 다시 조금씩 늘어갔다.

이를 계기로 선호하는 담배에도 변화가 생겼다. 2004년 말까지는 가느다란 ‘에세’가 주종이었는데, 이 무렵부터는 굵은 담배를 자주 피웠다. ‘디스플러스’나 ‘아리랑’이었다. 굵은 담배가 좌중에서 사라지면 그때서야 슬림형을 피웠다. 때로는 가는 담배 흡연자를 농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굵은 담배의 선호는 계속되었다. 퇴임 후에는 ‘아리랑’과 ‘클라우드9’이 뒤섞였다.

 

그렇게 대통령은 총리나 장관급 참모들의 담배를 얻어 피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담배가 없을 경우 마지막으로 부속실 직원에게 담배를 찾았다. 흡연이 재개되자 관저의 주방에서도 담배를 보루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부속실이나 관저 주방은 최후의 보루였다. 우연히 뜯지도 않은 새 담뱃갑을 들고 있을 경우 어쩔 도리 없이 그대로 헌납해야 했다. 몇 개비 피운 갑을 다시 돌려달라고 할 만큼 야박한 비서는 없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저녁나절을 보낼 담배까지 확보하는 셈이었다. 때로는 담뱃갑에 붙여 일회용 라이터까지 세트로 헌납해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 그는 인터폰을 통해 주방이나 부속실에 담배를 주문했다. 작은 사각형의 재떨이와 함께 몇 개비의 담배가 배달되었다. 적으면 두 개비, 많아야 세 개비였다. 이러한 배달 관행은 퇴임 후 봉하의 사저에서도 계속되었다. 담배를 줄여보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담배를 주문하는 그의 인터폰도 잦아졌다.
“음, 여기 담배 좀 갖다 주게.”

대통령 앞에서 그와 함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제한적이었다. 정부나 청와대 쪽에서는 이해찬 총리가 거의 유일했다. 당의 지도부가 청와대를 찾아와 만찬을 하는 경우, 터놓고 함께 담배를 피우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술은 그의 기호품 목록에 없었다. 좋아하는 정도로 따지면 담배의 1/10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이야기할 소재가 된다. 대통령후보 시절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서면질문에 주저 없이 ‘폭탄주’라는 대답을 썼을 정도이다. 변호사 시절에는 꽤 술을 마셨다고 한다. 꽤 놀 줄 아는 변호사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쨌든 그것은 옛날의 일이었다. 재임 중의 식탁에서는 한두 잔의 와인에도 얼굴이 불콰해지곤 했다. 술이 그다지 세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특이한 술버릇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수행비서와 술자리에 동석을 하는 것이다. 해수부장관 시절 수행을 했던 송인배 비서관의 증언이다. 남다른 의미가 있다. 하나는 비서를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업무의 효율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같이 들으면 굳이 기억해서 새로 지시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 하나의 술버릇은 ‘실종’이었다. 둘도 없는 후원자인 고 강금원 회장의 증언이다. 술자리가 거나해질 무렵 그가 돌연 사라지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한다. 기분이 상해서 가버렸나 하는 걱정에 구석구석을 찾다보면 화장실에 앉은 채로 잠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때로는 일식당 탁자 밑의 패인 공간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기도 했다고 한다. 약한 주량의 반증이기도 하다.

 

끊을 수 없었던, 끝까지 기대지 않았던

 

정치인이던 시절, 술자리에서의 그의 위치는 어쩌면 ‘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키지 않은 폭탄주도 마셔야 했을 것이다.
대통령이라는 위치는 달랐다. 적어도 술에 관한 한 ‘갑’이었다. 상대의 강권으로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청와대 만찬은 와인 한두 잔으로 끝났다. 그는 큰 잔이 나올수록 비싼 와인이라고 손님들에게 설명을 하곤 했다. 그를 찾아오는 외부 손님들이 한번 맛을 보라며 특이한 술을 가져온 적도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산 와인인 ‘노통(NORTON)’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국산 고량주인 ‘노부가주(盧府家酒)’였다. 임기 후반에는 국내산 머루와인도 식탁에 자주 올라왔다. 막걸리도 이따금씩 올라왔는데, 바람직한 농촌의 모델로 직접 방문을 했던 충북 단양 한드미 마을에서 보내오는 것이었다.
“동동주라 하는데 맛은 점잖다.”

민속주를 볼 때마다 그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막걸리든 동동주든 제조과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고향의 어린 시절 밀주 단속을 당하던 일화도 함께 튀어나오곤 했다. 술이 있는 만찬이라 해도 저녁 9시를 넘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가급적이면 9시 TV뉴스를 시청하려 했다. 일종의 긴장이었다. 그 긴장을 내려놓고 크게 취한 경우는 재임 중에는 손꼽을 정도의 일이었다.

 

퇴임 후 돌아온 봉하마을 사저. 9시 뉴스를 챙기지 않아도 되는 퇴임 대통령은 1박2일을 작정하고 내려온 손님들에게 술을 대접했다. 이야기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던 탓에 그는 항상 대화에 목말라 있었다. 그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들었다. 하지만 술에 취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외로움과 힘겨움을 술에 기대지는 않았다. 마지막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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