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고 눅눅하고,,, 겨울에 바닥에서 느꼈던 냉기가 지금은 습기로 바뀐것 같다. 이게 바로 반지하의 불편이고 약점인가 싶다. 그래도 뭐 최악은 아니다. 아니, 그럭저럭 견딜만 하다고 할만하다. 이보다 더 불편한것은 따로있다. 내 입안이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혀가 자꾸 더듬는 바람에 혀 끝이 민감해지고 쓸려서 통증까지 오고있다. 생각해보면 한두곳이 아니다. 여기 저기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중이다. 언제까지 참고 견디야 할까. 스스로 답을 할수가 없다. 뽑아버려? 뽑아? 선택은 내몫이다. 그런데 뭘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후원자를 바라는 것이라면 포기하는게 낫다. 아니, 후원자가 아니라 기적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상이 기적임을 안다. 무탈한 일상이야말로 탁월한 기적이다. 이기적도 그분의 선물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제습기가, 선풍기가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전기요금은 내 몫이다. 그럼에도 오늘은 늘 다행이다. 어제는 밥을 지었고, 된장찌게를 끓였다. 내가 넣을수 있는 것은 모두 넣었다. ㅎㅎㅎ 집안 온도는 30도를 찍었다. 나는 시골 사람인대도 된장찌게를 좋아하지 않는듯 싶다. 된장찌게 보다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 두루치기가 더 좋은 것 같다. 일년네네 그걸 먹고있다. 옛날에, 돼지고기 반근만, 혹은 한근만 주세요 하면 덩어리살을 잘라 주었는데, 바로 그 덩어리살을 지금은 다른 부위에 비해 아주 싸게 팔고있어서 부담없이 그걸 사서 김치와 함께 볶아놓고서 지속적으로 먹는다. 지겹지 않다. 어쩌면 나름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도 있다. 영양가가 어떻고 맛이 어떻고를 따질 상황인가. 60년대를 지나온 나다. 시골에서 언제 고기를 먹었던가. 다른 사람들 일상은 모른다. 좀 산다는 우리집 얘기다. 평소에는 육고기는 물론이고 생선도 귀한 몸이었다. 굶지않고 끼니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불과 얼마전 일듯듯 싶은데, 지금은 정말 많이도 변했다. 다이어트를 한다며 일부려 안먹고, 혹은 덜먹고 사는 세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햇는데,,, 그런데 실상 나는 60년대에서 그리 멀리있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벗어나지 못하고 멈추어 버린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세월이나 발전에 함께하지 못하고서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불쾌지수란 말이 안들리는 것 같다. 이젠 사용하지 않기로 했나. 하긴 그런것 까지 굳이 치수로 표현해가며 사람들의 불쾌지수를 늘릴 필요가 있을까. 악을 향해 치닫고 있는 사람들이 어린아이 노인 를 가리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전염병처럼 온 사회에 퍼지고 있다. 특히 아이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극에 달한 것 같다. 도저히 어린 아이들의 행위라고 할수 없을 정도다. 어떻게 그리 극악스러운 것인지. 어린아이들이 친구들을 상대로 저지른 범죄는 어른들의 그것과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럼에도 처벌을 못한단다. 회개하고 개선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는 좋다. 그렇지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죄를 물어야 하지않을까. 영악한 아이는 자기가 촉법 소년이라는 것 까지도 계산하고 있다. 어른들은 그냥 놀아나고 있고. 어디고 안전한곳은 없어보인다. 학교도 가정도 이웃은 더욱더 안전하지 않다. 각자도생이란 말이 가장 강력한 효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인듯 싶다. 오늘을 잘 살자. 주신 하루를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주신분께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깜량이 안된다. 그 깜량까지 주시면 좋겠다. 이제 얼마 안남은 내 시간을 유용하게 쓸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주신 모든것들을 깨닫지 못해서 낭비했다면 이제라도 충분히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다. 감사만이 답이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