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비가 종일 추적거리는 날 늦은 오후에 끄무레한 하늘마냥 가라앉은 몸뚱이를 움직여 밥벌이터로 나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천생이 게으른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하는데 그게 시원찮으니 몸이라도 움직여야 밥을 굶지 않는다. 세상에 착한 집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과연 내가 이 홍탁집이라도 제대로 해내고 있을까... 먹고사는 일이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나 주차장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비가 추적거렸으니 오늘은 막걸리 손님이 다른 날 보다 더 몰릴 듯하다. 차안에서 서울탁주 노인네한테 한 열댓병 더 냉장고에 채워 놓으라고 전화로 일러 놓고 파장동시장으로 향한다. 미나리며, 쪽파 등 오늘 가게에서 쓰일 야채를 사기 위해서다. 파장동시장은 수원 변두리 재래시장 쳐놓고 규모는 작지만 제법 역사가 깊은 시장이다. 야채, 과일, 생선, 육류, 제수용품 등 품목이 다양하고 가격도 여느 도매시장 못잖게 싸다.
지지대고개 아래 옛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던 노송길과 경수산업도로 사이의 주택지대 안에 시장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안양, 의왕 쪽으로 몰리는 차량이 늘어 몇 년 전에 아래쪽으로 새로 도로를 뚫어 지금은 차가 그리 많지 않지만, 왕년에는 남문시장까지 나가지 못하는 주변 주민들 생필품 조달을 위한 중요한 시장이었다. 시장 안에는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장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고, 좁은 중앙통 사거리를 중심으로 열십자 형으로 작은 가게들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늘어서있다.
차를 이차선 노송로 버스정류장 앞에 조심스럽게 세우고 비상등을 깜박거리고 있으면, 아내는 시장안 야채가게로 가서 미나리, 쪽파며 오늘 가게에서 쓰일 식재료들을 사가지고 온다. 싱싱한 야채는 홍어집의 생명이다. 물건 사러 다니는 걸 참 좋아하는 아내... 마음 먹고 대량구매를 해야하는 때가 아니면 웬만하면 소소한 야채며 반찬거리를 살 때에는 늘 아내가 나선다. 재래시장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다. 눈홀림 조삼모사식 상술이 훤히 보이고 칼로 물 베듯하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같은 곳 보다 투박하지만 인심이 넉넉한 재래시장이 더 좋다는 사람...
야채 사러 간 아내를 기다리는 동안 안개비가 소록소록 내려 앉아 차 앞유리창에 물방울을 굴린다. 작은 물건 하나를 사도 생각이 많아 시간이 더 걸리는 아내. 나는 마음이 바쁜데 요것조것 따지거나 엉뚱한 물건에 홀려 충동구매를 해서 내게 면박도 곧잘 듣지만 영 고쳐지지 않는 아내다. 참으로 여자들의 쇼핑이란... 그래도 그렇게나마 재래시장을 좋아해서 능력 없는 남정네 만나 조막손 같이 작아진 씀씀이를 스스로 위로하는 마음이 늘 대견스럽고 고맙다.
물방울 흘러내리는 유리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호떡 굽는 냄새가 살살 코를 찌른다. 시장 입구 약국 앞에서 호떡을 굽고 오뎅도 파는 아주머니 포장마차에서 나는 거였다. 어디선가 음악도 은은히 들려온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다. 어느 가게 주인인지 오늘 같은 날 참 분위기있게도 틀어놨다. 문득 호떡을 유달리 좋아하는 아내 생각이 났다. 불법주차 해놓고 기다리는 사람으로 야채 사기에도 마음이 바빠 저기에는 신경을 못썼을 거다. 어느 새 차 키를 뽑고 슬그머니 포장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철판은 널직한데 구워 놓은 호떡은 몇 장 없다. 비가 와서 오늘 아줌마 대목 보는가 보다. 얼룩무늬 웃도리를 입은 오십 중반 쯤으로 보이는 사내와 동네 아줌마 둘, 그리고 여자 아이 하나가 그 앞에 서서 열심히 뭔가 먹고 있다.
"아주머니 호떡 얼마죠?'
"네!! 어서오세요 하나에 오백원이에요"
쾌활하게 대답하면서도 아주머니는 연신 비닐장갑 낀 손으로 반죽을 빚어 흑설탕을 오무려 넣는다. 손놀림이 무척 재다. 호떡 반죽은 아주 찰진데 저걸 어떻게 저렇게 손바닥 안에서 굴리고 펴서 설탕을 재 넣는지 기가 막히다. 호떡이 딸려선지 손놀림이 무척 빠르다. 역시 여자의 손은 위대한 거다.
"아따 아저씨!! 호떡 자시면서 그 담배 좀 끄셔!!"
한 손에는 먹다 남은 호떡을 들고, 다른 손에 담배를 끼고 있던 오십 중반 사내가 구박을 받는다. 이구~~~ 오십 넘으면 남자들은 어딜 가나 구박덩어리다. 철판에 기름 넉넉히 두르고, 빚은 호떡을 올려놓고는 동그란 누름철판으로 꾸욱 누르는데 신기하게도 그 얇은 반죽에 설탕이 터져나오지 않는다.
"아주머니 호떡 두 개만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요 놈 구워서 드릴께요"
뒤집고 다시 누르고 하면서 노릇노릇하게 호떡을 구워내는 솜씨가 재빠르다.
"아이고 얘야~~ 너는 언제나 크냐아~~~~"
구박 받은 오십 중반 사내가 계면쩍은듯 괜시레 여자아이에게 말을 건다.
"................."
"................."
아이 엄마인듯한 여인과 여자아이는 말 없이 마주보며 꼬치에 꿴 오뎅만 오물오물 먹고있다.
"여기 있습니다. 돈은 이 통에다 좀 넣어주세요~~"
주인 아주머니가 노릇노릇 맛스럽게 구워진 호떡 두 개를 종이봉투에 담고, 다시 검정 비닐에 담아서 내 놓는다. 비닐 장갑 벗기가 번거로와 옆에 있는 작은 상자에 돈을 넣어달란다. 슬쩍 들여다 보니 천 원짜리 열 댓 장이 그 안에서 뒹굴고 있다. 이렇게 한데에 종일 서서 호떡 굽고 오뎅 팔아 하루 얼마나 벌까 싶다. 마음이 짜안하다.
"많이 파세요 아주머니...!!!"
호떡 천 원어치를 비닐봉투에 담아가지고 차로 돌아왔다. 가게에서 먹을 저녁밥이며 반찬 싸가지고 다니는 큰가방 안에 깊숙히 넣었다.
"많이 기다렸지?"
역시나 아내는 야채 말고도 집에서 먹을 찬거리 몇 개를 더 사느라 생각보다 늦게 차로 돌아왔다.
"그려!! 좀 빨랑 다녀라!! 가게 늦었다!!! 뭘 또 그래 샀나?!!"
괜히 큰소리를 쳐본다.
"근데 어디서 호떡 냄새가 나네~~~? 아까 약국 앞에 호떡 파는 아줌마가 있던데 거기서 냄새가 뱄나? "
"그래? 맞다!! 아까 그 약국 앞에서 호떡 팔드만. 거기서 났나 보다. 날이 흐려서 냄새가 오래 가나?.."
시침을 딱 뗀다.
"그런가 보네 ...."
우리 차가 좌측 깜박이를 요란하게 반짝거리며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가게를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안개비는 여전히 앞유리창을 간지럽히고, 머릿속에서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계속 맴돈다.
(2009.12.11)
첫댓글 호떡은 따뜻할 때 먹어야 부드럽게 살살 녹는데...출발하시기 전에 드시쥐...나중에 딱딱해진 호떡에 쿠사리 먹진 않으셨을지~~ㅎ~~평범한 일상에 애정이 담뿍 담긴 이야기, 제 맘이 따뜻해집니다.
정언님 그렇게 까지 딱딱해지진 않았어요 ㅎㅎㅎ
그리도 맛 있던 그 음식들은 그 곳에 다 있는데, 그 맛들은 다 어디로(아마도 세월 속으로) 갔는지....
잘 찾아보면 아직 여기저기 있어요 형님^^
아내를 마음속으로만 사랑하는 너무 착한 남자, 에코님. ^^
쑥쓰럽구러... 같이 일해주니껜 고맙기두 하고 또, 편히 살려고 잔머리 스는거쥐여..ㅎㅎㅎ
속이 깊어 개띠같은 닭띠 에코님!
ㅎㅎㅎ 이장님... 보신탕이 몸에 좋을까요? 아님 닭곰탕이 몸에 좋을까요? ㅋㅋㅋ
그냥 맘이 짠해지네..이쁜 형수 고생시키고 사시네~~
이뿌기는요 요즘 떵배가 튀어나와 주체를 못하구만... 이뿌기는 나사님 부인이 이뿌시쥐...^^
문제있는 글에 문제를 제기하는 댓글에는 문제없음
이거 간접광고 같은디....(조만간 나도 해야징..^^
들켰뿌렀당..ㅋㅋㅋ 난 이제 장사하러 간다우~~~
자나깨나 그 호떡 언제나 먹나 ..끝까지 그 대목을 기다렸는데 안타깝게도 끝내 안드셨네. 뜨거울때 꿀 질질 흘리면서 먹어야 제맛인데 애꼈다 드실라고요? ㅎ
그저...먹는거에, (안뵈도 그 풍체 그려집니다..^^
아꼈다 먹었슈...ㅎㅎㅎ
이 노래는 불륜의 냄새가 나서 더 매력있는데 글내용은 그게 아니네요^^
오호~~ 불륜 냄새가 매력이 있군요 ^^ 담에 제가 불륜 이야기 함 올릴께요ㅎ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내성적이다 뿐입니까 전형적인 AA형이유..으이구 그 염소...^^
아내를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남자는 이기적인 남자!
등대님 전 아직 몸으루두 사랑한다우...ㅋㅋㅋㅋ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가사이지만 울고 있어도 웃음이 날것같은 우리네 사는 이야기....
서로 의지 하면서 정이 넘치게 사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수선화님 글로 보니까 정이 넘치지요...에효 ~~~
서로 보듬고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세상....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나고 나눔과 연대가 햇살처럼 따사로운 공동체.... 아이들이 고운 꿈을 갖고 살수 있고 소외받는 이들이 외롭지 않은 나라.... 꿈이겠지요?
이루어질 수 있는...........
꿈만은 아닐 겁니다 ...^^
꿈이라도 강렬하게 많은 사람이 꾸어야 차츰이라도 시동이 걸리지요.
에코님의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네요.
바부님 담에 만나면 호떡 사드릴께요^&^
어느 소설에 겨울 땅콩이야기가 문득 생각나게하는 따끈한 호떡같은 에코 표...사연...^^
ㅎㅎ 형님두 담에 뵈면 호떡 사드릴께요^&^
그날따라 그 호떡이 참 맛있었을것 같습니다. 에코님의 따뜻한 일상이 그 호떡만큼이나 정겹습니다.
네 리코리아님...둘이 가게 가서 하나씩 손에 설탕물 묻혀가면 먹었어요 ㅎㅎㅎ
순간~~`그에 몸이 몹씨 뜨겁지 않든가요?ㅋㅋㅋ
아, 호떡 묵고 시퍼라~~ (그저 먹는거에만 먼저 쏠리는, 요즘 체중계 눈금이 엄청 빠르게 올라가고 있는 뚱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