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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고비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상징은 누가 뭐라해도 바로 '로마 수도교(Acueducto Romano)'라 하겠다.
2.000년의 세월이 무색할만큼 여전히 완벽한 모습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할 뿐이다.
위대한 로마의 군인들이 만들어낸 인류 역사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아랍인들은 새로운 영토를 차지하고나면 가장 중요시 하는것이 바로 물의 확보였다.
그곳이 초원이던 평야지대건 황무지 언덕이던, 아니면 산골짜기던 그것도 아니면 사막의 불모지 일지라도 하다못해 오아시스부터 찾아내야만 했다. 태생적으로 척박한 환경속에서 유목생활을 수천년간 지속해온 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랍인들에게 작은 연못이 있는 푸른 정원과 항상 물이 뿜어져나오는 분수는 그야말로 하늘나라 천국 다음으로 꿈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로망이었다.
그들은 그 물이 풍부한 곳에 장막을 치고 가장 먼저 사원(모스크)을 짓기 시작한다. 모든것은 알라신에게서 나왔고 새롭게 가지게된 모든것을 그분께 영광으로 돌려드리고자 함이었다. 사원 앞으로 커다란 광장이 들어서고 그 광장은 곧 시장으로 발전해 나갔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같은 패턴이었다.
사나흘에서 한달이 걸리는 아주 먼곳으로 부터도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사원과 시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점점 모여든 사람들로 규모면에서 도시가 형성될 즈음이면 그들은 (메디나)를 건설했다. 도시가 하나의 견고한 성채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외부의 적들로 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도심의 외벽을 이중 삼중의 성채로 쌓고 네 다섯군데의 육중한 성문을 내달아 출입을 통제한다. 메디나의 내부는 상가나 거주지들이 모두 옆구리를 맞대고 실타래처럼 얽혀있어 미로를 만들었다. 내부로 침입한 적들에게 치명타를 입히기엔 더없이 좋은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것이 아랍식 도시다.
하지만 로마의 군인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물은 필요충분조건이기는 하였으나 결코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우선시 되는 조건은 최우선이 (전략적 요충지)였다. 높은 언덕에 서서 멀리 내려다보면서 주변을 살피고, 올라오는 적들에게 방어가 용이하거나, 군대의 이동과 물자의 수송에 대단히 중요시되는 길목을 차지하고 방어하는 선택이 최우선 과제였다. 나머지 조건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군인이었던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기후나 지형조건은 아무래도 좋았다. 군대가 적들과 싸워서 이기고 방어하기에 용이한 최적의 요새같은 지형이면 최선이었다.
그들은 장막을 치고 주위를 삥둘러 목책을 설치했다.
그리고나서 가장 먼저 시도하는 것이 (로마 가도)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축대를 쌓고 다리를 건설하고 산허리를 잘라 길을 만들었다. 심지어 돌을 다듬어 마차가 수월하게 물자를 수송하도록 포장도로를 만들었다. 신속하게 로마와 정보가 오고 가야만 했고, 전쟁 물자와 군대가 이동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영토에서 얻은 식량이며 자원들이 로마로 수송되었다.
정복한 영토에서 로마군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사람들이 목책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면 로마의 군인들은 도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은 목책을 띁어내고 바위와 돌을 이용해 튼튼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아주 먼곳으로부터도 물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로마의 수도교)가 생겨난 이유이다. 물가에 도시를 건설하기보담은, 무조건 전략상으로 중요한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나서 필요한 물을 끌어들였다. 수백 킬로미터 밖에서도 말이다.
로마군이 점령한 지역마다 이런 방식의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소아시아에서 부터 리베리아 반도 끝자락까지 온 유럽에서 벌어졌다.
로마의 시내에만 11개의 수도교가 설치되었다.
칼리큘라 황제가 시작하여 클라우디아 황제가 완성한 로마의 수도교가 그나마 보존 상태가 좋고 유독 아름답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으로 온 이스탄불 사람들의 생활용수를 공급하던 '발렌스 수도교'도 여전히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의 아비뇽으로 가는 길목에 놓인 '가르교'는 많은 영화에 낭만적인 장면으로 자주 등장하곤 한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수도교' 또한 우아한 자태에선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이곳 세고비아의 '로만 수도교'가 2.000년의 세월을 헤치고 지나왔으면서도 여전히 굳건한 자태로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 알렉산드리아 수도교
-- 로마의 클라우디아 수도교
-- 이스탄불 발렌스 수도교
-- 프로방스 가르교
톨레도에 이어서 (세고비아) 나들이에도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유럽 여행에서 비용면을 볼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기차 이용료'와 '마술관 박물관 입장권 구입비용'이다.
유럽의 기차는 쾌적하고 대단히 편리하게 잘 발달되어 있다. 대신 비용이 엄청 비싼 편이다. 일부의 경우는 비행기 값을 기차가 훨신 상회한다. 대신 이 고민을 다양한 노선만큼이나 각종 편이시설이 고루 발달되어 있는 버스가 대신 보상해 준다. 고속 열차가 가장 빠르다 할 수 있겠지만, 초고속 열차가 없는 상당 부분의 여행에서는 버스가 기차와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거나, 심지어는 기차보다 버스가 빠르기까지 한다. 거기에다 몇년사이 버스 사양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항버스 처럼 3열의 버스를 자주 이용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기차보다도 장점이 많아보였다.
세고비아 노선은 당연히 버스가 좋다.(경험에 의한 평가)
스페인의 시골 풍경을 감상하면서 즐기다보면 어느새 버스는 세고비아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마드리드에서 출발할 때 왕복티켓을 구매 하였다. 약간의 할인이 주어질 뿐만 아니라 돌아오는 시간을 오픈 티켓으로 구매하였기 때문에 아무때고 매표소에서 확인한 후에 버스를 선택해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매표소 창구 확인과 저녁 무렵의 버스 시간표를 메모한 후에 본격적인 세고비아 나들이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때까지 그 어디에서도 장엄한 수도교는 보이 않는다.
유명세 뿐만이 아니라 사진에서 본 그정도 위용이면 세고비아 아디에서든 훤하게 모두 보여야 하는것 아닌감?
세고비아가 맞는거여?
혹 세고비아 기타 만드는 공장에 내려준건 아니지?
헐......
아주 가끔 '세고비아 여행' 이야기가 나오다 보면 불쑥........ 뜬금없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꺼내드는 사람이 있다.
헐....... 이런 난감할데가.........
'정말로 그러시면 안되시는 것이옵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라나다에서 찾으셔야지........ 이 세고비아와 그 세고비아는 전혀 다른것입니다요'
'그게 몬 말이냐 하면.......... 나중에 그라나다 편에서 부연하여 설명드리기로 .......... ㅋㅋㅋㅋ'
스페인의 옛도시들이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세고비아는 유독 더 작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세고비아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길을 건너 휘감아 돌듯이 쭈욱 앞으로 나아가면 여행자는 이미 세고비아의 품속에 젖어든 것이다. 터미널이 그만큼 세고비아 내부 깊숙히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야만 하겠다.
몇분 걸리지 않아 왼쪽의 너른 공터에 낡은 성당 건물이 나타난다.
12세기 초의 건물로 세고비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축물중의 하나인 '산 미얀 성당'이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듯 하다.
마치 아르메니아에서 흔하게 본 성당건물에 아치형태의 개구분만이 좀 이색적이다 싶을 정도로 동유럽의 성당 건물과 상당히 닮아있다. 바로 그런 점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치형 기둥의 머리부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고 그 기둥들이 길게 늘어선 주랑이 특히 유명한데....... 미사 시간 외에는 일반에게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가던 발걸음을 계속하면 너른 도로의 양쪽으로 아케이트와 함께 낭만이 펄펄 끓어 넘치는 멋진 카페 거리가 펼쳐진다. 그 사이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마침내 사진속에서만 보던 '로마 수도교(Acueducto Romano)'가 제모습을 드러낸다.
와!!!!
어쩜 저렇게........
어마어마한 위용의 수도교 아래로 너른 광장이 펼쳐져있다. 세고비아 여행의 핵심이자 종착지인 '아소게호 광장'이다.
이 광장의 카페중에 카스티야 지방의 향토음식중 가장 대표젹인 '코치니요 아사도(새끼돼지 통구이)'로 명성이 자자한 집이 있다.
수도교를 올려다보면서 왼쪽으로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세고비아의 구도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발길 내키는 대로 어느 골목을 향하던지 전혀 상관이 없다.
어차미 모든 길은 '마요르 광장'으로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로마인들은 기원전 1세기 경인 트라야누수 황제 시절에서 부터 서기 1세기까지 칼리큘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유독 많은 수도교를 온유럽에 건설하였다.
이는 그리이스를 멸망시키고 등장한 로마가 지중해 지배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한바탕의 대전란(포에니 전쟁)을 모두 승리로 이끈 직후가 되는 시점이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지중해 연안을 비롯한 온 유럽을 로마가 석권해나가던 가장 왕성했던 시기를 뜻한다. 영토를 점령하고 성을 쌓고 다리를 놓아 도로를 개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로마의 거점 도시들을 만들어갔다. 로마는 이를 토대로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 세고비아 수도교를 클라우디아 황제 시기에 건축된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본래 켈트족의 정착지였던 세고비아에 기원전 80년 경에 로마의 군대가 들어와 병영을 설치하고 이곳을 다스렸다 라는 기록에 준한다면, 그들이 병영을 설치하여 주둔지를 확보하고 도로를 닦고 물을 끌어들였다고 가정한다면....... 아마도 나의 견해로는 트리야누스 황제의 시대에 건축된것을 보여진다.
세고비아의 어디에서나 보이는 정말로 멋진 장관은 바로 만년설에 덮여있는 '시에라 데 구아다라마 산맥'의 압도적인 풍경일 것이다. 푸른 들판 위로, 때로는 도심의 위로 만년설에 뒤덮인 시에라 산이 저만치 멀리 우뚝 솟아 있어 장관을 이룬다.
처음 세고비아에 도착하여 만년설을 가리켰을 때, 챠밍여사는 믿지 않았다. 더워도 한참이나 더운 스페인의 한복판에 만년설이라니........ 가도가도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올리브 밭고 포도밭과 밀밭이 지평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만년설이라니......... 나중에 인터넷 검색까지 마치고서야 믿었다.
그 만년설이 녹아내려 흘러가는 '아세베타 강'의 물을 세고비아까지 끌어들이는 대역사를 로마의 군인들이 이루어 낸 것이다.
아세베타 강에서 세고비아 저수조까지는 장장 17km나 되는 아주 먼 거리였다. 하지만 기어코 그들은 그곳으로 부터 온 시민과 군인들이 먹고 마시고 가축을 기르고 농경지를 개간할 수 있을 만큼의 물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현재는 길이 728m에 높이 29m의 수도교만이 163개의 아치형 교량에 의해 지탱된채로 완벽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있다. 1세기 전까지는 실제 수도교의 역활을 수행해왔으며, 현재에는 가장 상층부에 수도관을 설치하여 실제 사용하고 있다.
세고비아의 로마 수도교는 다르게 '악마의 교량'이란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
로마인들의 가공할 건축기술에 하나였던 회반죽을 이용한 시멘트나 기타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순수하게 화강암을 다듬고 가공하여 쌓아올려 이처럼 위대한 건물을 세웠으며, 2.000년이 흐르는 동안에도 여전히 처음의 그 모양새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니....... 절로 로마 군인들의 탁월한 기술력과 지혜에 고개가 숙연해질 뿐이다.
로마 수도교를 지나 마요르 광장에 이르는 길은 여느 스페인의 관광지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고 넘쳐나는 다사롭고 풍요로운 햇살과 게으른듯 넉넉하고 여유로운 현지인들 모습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자들로 붐빈다.
거기에다 또 같은듯 다르게 느껴지는 도시마다 골목마다의 풍경은 항상 여행자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오늘도 세고비아의 골목길은 풍요롭고 아름답다.
고풍스런 옛건물에 젊은이들이 가득차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공방이랄까? 아카데미아 학원이랄까?
열띤 토론과 실사작업으로 실내 분위기가 정말로 뜨겁게 느껴지는 수업중인 강의실이었다. 창의성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는 학생들의 탐구정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나하나 한가지 한가지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가르치려는 스승의 헌신적인 노력이 흐르는 땀과 함께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스페인의 진지함과 스페인의 창의적 학구열을 절실하게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누구도 이 낯선 이방인을 거부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눈이 마주치면 미소로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머지않아 저들도 지금 열의를 다해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스승을 닮아가리라......... 그리고 또 누군가를 열심히 가르치겠지.......... 오! 스페인이여........
아름다운 세고비아여........
세고비아까지 왔으니 당연히 카스티야의 대표 전통요리인 '코치니요 아사도(새끼 통돼지 바베큐)'를 먹어보리라 생각했었다.
로마 수도교 앞에 있는 스페인에서 아사도 요리로 가장 유명하다는 집에 들르려하였으나 세고비아에 막 도착한 직후인지라 점심 식사를 하기에는 좀 이르다 싶었다. 마요르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길 상점들마다 바베큐 요리를 서로 잘한다는 광고판이 내걸려 있다. 그래서 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아뿔싸........
이야기를 이미 전해들었던지라 어느정도 사전에 예견은 했었지만........ '코니치요 아사도' 요리에서 풍겨나오는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생각보다 심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비오는 날 오래된 순대국밥 골목에 들어서면 나는 냄새보다 아주 조금 더 역겨움이 느껴져 나온다. 호불호가 갈린다더니만........
챠밍여사가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먼저 의자에서 일어섰다.
웨이터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뒤 나도 밖으로 나왔다. 훗날 우리고향 먹자 골목에서 순대국밥 한그릇에 미니 족발 한접시를 시켜놓고 막걸리 한대접 들이키다보면 아마도 이 날의 추억거리가 솔솔 다시 피어오르리라..........
거기에다가 이 상쾌하지만은 않은 역한 냄새의 휴유증은 전날 톨레도에서 생겨난 배탈 설사로 곧바로 연결되었다. 지난 밤새 그 고생을 하면서 한국에서 가져간 상비약으로 그나마 어느정도 진정을 되찾게되었고, 아침에 컨디션이 어느정도 회복되었기에 세고비아 나들이를 감행한것이었는데....... 그넘의 코니치요 아사도가 겨우 회복시킨 컨디션을 순식간에 최악으로 끌어내려버렸다. 다시 상비약을 복용하고 진정을 취했으나 사태는 쉽사리 호전되지 않았다.
챠밍여사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컨디션이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대략 난감.........
가다 쉬다 가다 쉬다를 반복한다.
기운을 회복하려고 결국엔 한 빵집을 찾았다. 무엇때문에 이리 북적이는지...... 여행객들 손에 손마다 이 빵집의 빠게트 빵이 들려져 있다.
챠밍여사가 아무것도 먹지를 못한다. 그저 생수만 들이키로..... 그나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단순한 호밀빵 몇조각만을 겨우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헐........ 이러다 정말........ 나 까지 쫄쫄 굶어다니게 생겼다.
'후안 브라보(Juan Bravo)'는 세고비아 사람으로 '카를로스 1세'의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란군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끝내 민중 봉기는 실패로 끝이났고 그는 세고비아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여행자 거리를 걷다보면 세고비아에서도 조금은 이색적인 멋진 풍경이 펼쳐져보이는 언덕길 중간의 작은 광장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중세 로마네스크 양식의 '마르틴 성당'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르틴 광장'의 구석 계단 위로 갑옷을 차려입고 커다란 깃발을 휘날리며 우뚝 서있는 멋진 청동상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바로 반란군의 우두머리였던 '후안 브라보'의 씩식하고 용맹스런 모습이다.
어떻게 군왕과 정부에 반기를 든 반란군의 주모자 동상이 이렇게 버젖이 멋진 포즈로 서 있단 말인가?
그가 반기를 든 스페인의 왕은 바로 '카를로스 1세(카알5세)'로 스페인의 최고 전성기와 최고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왕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그를 '카알 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숙적인 프랑스의 '프랑스와즈 1세'와의 전쟁에서 번번히 승리하였고,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 초기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그는 당시 유럽 최고의 단독 군주였다. 유럽은 스페인의 손아귀에 쥐어졌고, 스페인은 그의 손 안에 놓여 있었다.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왕이었고, 동시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의 부친은 '미남왕'이었던 '펠리페'였고,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로 스페인을 존립시킨 양왕(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었다. 그야말로 로얄패밀리 중에서도 극한의 로얄패밀리였다.
비록 전쟁광이었고, 정치적 보복이 잦았으며, 참혹한 사건을 수도없이 스스로 만들어 냈던 가혹한 군왕의 표상이 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스페인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건한 나라로 만든 '카를로스 1세'에게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반란이 일어났고, 그 우두머리가 '후안 브라보'였다니........
그리고 이곳 세고비아가 어디였던가?
'친할머니인 이사벨이 처음 여왕으로 등극한 곳이며, 이를 기반으로 '레콩키스타 운동'을 시작하여 마침내 이슬람을 스페인 영토에서 몰아내고 새롭게 굳건한 '카톨릭 국가 스페인'을 건국한 그 대업이 시작된 곳이 바로 세고비아 였던 것이다.
'후안 브라보'와 코쿠네로스 반란(Comuneros Movement )'.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고, 스페인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그를 저렇게 기리고 있는 것일까?
선남선녀의 만남이라 해서 매냥 행복하기만 한것은 결코 아닌가보다.
근자에 희자되던 유명 연예인의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니다. 오백년 하고도 수십년 전에 있었전 역사자적으로 아주 유명한 일화를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리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순수한 카톨릭 국가로서의 스페인'을 재통일한 위대한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에게도 커다란 한가지 고충이 있었다. 바로 작은딸 '후아나'가 영원한 골칫덩이'였던 것이다. 젊어서는 나름 꽤나 괜찮은 정도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고는 하는데....... 괴팍한 성격에 편견과 집착이 남달랐으며, 쉬쉬하면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이따금씩 정신병이 발작한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하여 더욱 구중궁궐에 꼭꼭 숨겨서 자라나게 하였는데....... 어느덧 여인네 티가 나타날정도로 장성하였으니 당연하게 혼담이 오고가는 것이 당연지사였것다?
하지만 정작....... 본인에 대한 소문때문인지, 아니면 너무나 서슬이 시퍼런 어마무시한 장인 장모 때문인지 세상 그 어디에서도 혼담이 들어오지 않았다.
구중궁궐에 꼭꼭 숨겨 놓고 애지중지 길러 논 천상 요조숙녀(?) '후아나'가 글씨......... 어디서 어떻게 소문을 접했는지는 몰라도 부르고뉴 지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역. 흔히 베네룩스 3국)의 젊은 영주가 '세상 최고의 꽃미남에 미혼'이라는 소문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꽃보다 인연이라는 것이 본시........ 남녀가 직접 마주보고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야 비로소 사단이 벌어지는것이 인륜이요 순리일진데.........
'후아나'의 생각은 애시당초 달라도 너무 달랐다. '후아나'가 어떤 느낌을 가졌으니 이미 그것으로 족했다. 부르고뉴의 꽃미남은 당연히 자기차지라 생각했다. 보편타당한 상식의 선에서는 실로 어이없는 일이겠으나......... 후아나의 부모가 어디 보편 타당한 보통사람이었던가? 당시 후아나의 나이 16살 이었다.
암튼 어찌 되었건 후아나는 부르고뉴의 꽃미남 '펠리페'와 결혼을 하였고, 거처를 부르고뉴의 네덜란드로 옮겼다. 또 이때 겹사돈 잔치가 벌어졌다. 후아나의 오빠가 펠리페의 여동생 마가렛에게 빠져서 비슷한 시기에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
이 즈음에 서서히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후아나는 펠리페와의 사이에서 '카알' 이라는 장남을 얻었는데........ 이 즈음에 왕권 후계자였던 오빠가 갑자기 사망해 버린 것이다. 자식이 없던 마가렛이 과부가 되어 고향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펠리페와 마가렛, 남매지간인 두사람의 사이가 남다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가뜩이나 너무나 잘생겨서 탈인 남편을 간수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신경과민 상태인 마가렛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만 정신병이 재발한 것이다. 갈수록 의부증에 시달리던 후아나는 주술과 약물에 중독되기까지 한다. 그럴수록 남편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만 갔다. 펠리페의 여성편력은 점점 심해졌다. 그와중에 이번엔 후아나의 언니가 원인모르게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후아나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했던 이사벨 여왕의 모든 지위와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는 후계자의 지위로 신분이 급상승한것이다. 이제 후아나는 스페인 왕국의 카스티아를 지배하는 여왕이었다. 후아나는 서둘러 왕위 계승을 위해서 마드리드로 옮겨가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카스티아 왕국에 탐이 난 펠리페가 이제껏 없었던 금슬을 다시 내세우며 후아나와 동행하여 마드리드에 입성한다.
후아나는 마가렛이 펠리페 옆에 있는것을 극도로 꺼렸다.
하여 자신의 외아들인 카알을 부르고뉴에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나면서 마가렛에게 훈육을 부탁했다. 마가렛은 부르고뉴의 섭정이자 카알의 고모이며 스승이 되었다.
톨레도에 머물면서 꽃미남 펠리페는 지극정성으로 후아나를 받들어 모셨다. 그런 결실로 톨레도에서 둘째 아들 페르디난도를 낳는다. 감격한 후아나는 펠리페를 자신과 함께 카스티아의 공동 통치자로 선임한다. 펠리페는 부르고뉴의 왕이자 카스티아의 왕이 된것이다. 카스티아를 차지한 펠리페는 하루아침에 다시 본색을 드러낸다. 걷잡을 수 없게 여성편력에 바져들던 펠리페는 느닷없이 찾아 온 장티푸스로 인해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망했다.
남편에 대한 집착이 너무도 강했던 후아나는 이후 갖은 기행을 자행하고 정신병이 재발하여, 그의 지위를 노리는 정적들에 의해서 수도원으로 유페된다.
스페인은 온통 이합집산의 왕위 쟁탈전이 점입가경의 경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 휘청거리는 스페인을 바로세울 한명의 위대한 스승이자 고모이며 여성이 비로소 역사으이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고뉴의 마가렛이었다. 펠리페의 여동생이자 청년으로 자란 카알의 고모였다.
카알에 대한 고모 마가렛은 헌신은 적극적이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했다. 유년기부터 부모에게서 버려지다시피한 소년에게 5개국어를 가르쳤고, 유럽의 역사와 왕실 예절과 전통 교육을 시켰다. 신학자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명망있는 최고의 학자들을 모셔다가 가정교사로 들여 플라톤 철학과 사상을 물론 이집트나 그리이스에서 시작해 지중해 저편에서 준동하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역사까지 철저하게 교육을 시켰다. 최첨단 통치자의 덕목을 훈련시킨 것이다.
마가렛에게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예측과 판단이 예리하게 사전에 판단이 이미 섰던 것같다. 그녀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카 카알을 가르치고 훈련 시켜 강건한 청년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스페인 톨레도에서 차기 스페인의 통치자를 뽑기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유럽 전역으로 부터 혈연과 명분을 앞세워 스페인의 통치자 자리를 노리는 왕족들이 모여 이합집산을 벌이고 있었다. 고모가 사전에 철저하게 사전 준비해놓은 프로그램에 의해서 카알이 톨레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최종 회의에서 마침내 그가 대중 앞으로 나섰다.
'나는 부르고뉴에서 온 카알이라고 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펠리페 1세이며 어머니는 후아나 여왕입니다. 나는 두 분의 사이에서 태어나 세례를 받은 장남입니다. 아울러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2세왕의 장손자 입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조부모와 나의 부모가 가졌던 모든 권위와 영토를 되찾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그분들의 유지를 받들어 스페인을 더욱 부유하고 강건한 나라로 우뚝 세울것입니다. 저는 태어나 처음 톨레도에 왔습니다. 대부분의 여러분들이 저를 처음 보셨을 것이고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저의 고모는 아시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르고뉴의 섭정이자 이 순간부터는 부르고뉴의 여왕으로 불리워지실 마가렛이 저의 고모입니다. 저는 고모로 부터 정치가 무엇인지 통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왕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모두 배웠습니다. 저에게 쏟아부은 고모님의 헌신은 절대로 헛되지 않을것입니다. 고모님이 스페인을 위해서 가지셨던 꿈과 희망은 이 순간부터 내가 모두 이루어 드릴것입니다. 이제 나는......... 내게 주어진 권위와 나의 영토를 원합니다.'
카알은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스페인 역사에서는 '카를로스 1세' 혹은 '카알 대제'가 되며, 영어권 역사에서는 '카알 5세'라 부른다. 바로 이탈리아 전쟁의 핵심 인물이다.
카를로스 1세는 또 한번 고모의 절대적 후원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되면 이때 그의 직함이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알 5세'가 된다.
하지만, 그는 분명 스페인의 왕이었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부루고뉴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무덥고 황량한 스페인은 쉽게 적응이 되질 못했다. 거기에다 5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할머니의 지지기반이자 어머니의 기반이었던 카스티야와 레온 지방의 언어(사투리)를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크게 4개의 대립 지역으로 나뉘어 볼 수 있으며, 각 지역의 고유언어와 사투리가 심해서 일부 회의에서는 일부러 이웃국가인 프랑스어를 통용어로 쓰기도 했다.
사방으로부터 원성이 터져나오고 작은 소요와 분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카알은 이를 신성한 왕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고 강력한 군대를 보내 진압했다.
그러자 이번엔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정적들이 주도하여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스페인에서 자란 카알의 친동생 '페르디난도'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자는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기는 했으나 문제는 동생이었다. 자신이 왕위 등극을 위해 톨레도에 첫발을 내딛을때까지 카알은 자신의 동생에 대한 존재조차도 가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둘째 페르디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이 격동하는 정치판에서 서로 맞닥트린 것이다.
많은 신하들이 화근인 동생을 죽여 없애야만 반란이 끝날것이라고 했다. 카알은 머리를 싸매고 장고에 들어갔다.
그때 부르고뉴의 고모로 부터 서신 한통이 카알에게 날라 들었다.
다음날 어전회의에서 카알은 동생 페르디난도를 스페인령 독일 지역의 왕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즉시 현지 부임을 명했다. 별도의 명이 있을 때까지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을 달았다. 원망 가득한 시선으로 동생 페르디난도가 독일을 향해 떠났다.
주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복수심에 불타는 페르디난도가 독일 지역에서 힘을 길러 언제고 만듯이 스펭인으로 쳐들어 올것이라고....... 그 때는 잠자고 있던 이제까지의 많은 반란군들이 내부에서 그를 지원할 것이라고....... 카알의 미래는 이제 풍전등화가 되었다고.......
카알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2년 뒤.
프랑스의 프랑스와즈 1세가 밀라노를 거쳐 피렌체를 침공했다.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와 스페인 령이었던 나폴리가 구원을 요청했다.
가뜩이나 스페인과 백성들에게 염증을 느끼던 카알이었는지라, 도한 프랑스와스 1세와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터라....... 단박에 군대를 몰아 이탈리아로 달려가야 했는데......... 스페인을 텅 비워놓고 떠난다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반대파들이 기다리는 기회가 바로 지금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지니 무능하고 겁쟁이 왕으로 치부될 터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에게 또 고모의 편지가 날아 들었다.
수일 후, 카알은 자신의 정병 5만을 모두 이끌고 아주아주 쿨하고 씩씩하게 톨레도를 출발했다.
스페인 내분에 대한 걱정은 손톱만큼도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번엔 그가 정말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찾아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루 전. 한테의 파발마가 왕명을 받고 독일을 향해 죽어라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카알이 페르디난도에게 보내는 한 통의 짤막한 서신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동생 페르디난도에게. 형이 부족하다보니 진즉이 너를 찾아보고 형으로서 돌보아 주지 못해 한없이 미안하구나. 또한 너에게도 나름의 체면과 지위가 있었음에도 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함도 미안하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형의 바람직하지 못한 명을 받아들고 그 즉시 독일로 떠나는 너를 멀리서 바라보면서 나도 한없이 울었단다. 왕이 아닌 시골 농부의 아들들로 우리가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동생아. 네가 이 편지를 받을때 즘이면 너도 이미 모두 알게되겠지만........ 나는 나의 전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간다. 주위에서 옥좌를 오랫동안 비워두고 떠나는 것을 걱정하지만, 나는 아무 걱정없이 참으로 홀가분하게 떠난다. 왜냐면 나에겐 동생인 너가 있으니까. 이 편지를 받는 즉시 스페인으로 떠나거라. 스페인을 너에게 맡긴다. 만약에 나에게 어떤 불상사가 생기게 된다면........ 그땐 네가 스페인을 잘 다스려 주렴. 너를 믿고 나는 편하게 떠난다. 담엔 우리가 좀더 반갑게 재회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램을 가져본단다. 아우야. 스페인을 부탁해.'
카알은 파죽지세로 이탈리아에 쳐들어가 프랑스 군을 격파했다.
스페인군은 위기때마다 본국으로부터 절대적 지지와 보급품과 지원군을 보충 받았다. 카알은 전쟁터를 맡았고....... 페르디난도가 든든한 배후가 되었다.
두 형제의 놀라운 콤비 풀레이는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간다.
훗날,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지위는 동생 페르디난도에게 물려진다. 그리고 페르디난도의 지위는 형의 아들에게 다시 되돌아 간다.
그런데, 이 두형제의 아름다운 이야기 중간쯤에 바로 (후안 브라보)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고비아 대성당)의 아픈 이야기와 엮여서.........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나난도 왕'의 '레콩키스타(국토 회복운동)'의 결과로 이슬람을 리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전까지의 스페인 백성들은 거의 농노나 다름 없었다. 그저 거대한 귀족의 장원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겨우 주어지는 배급분 정도로 주린 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정도였다.
부와 사치와 향락은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레콩키스타 이후로 이슬람을 몰아내고 새로 차지한 광활한 영토에 국토회복 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비롯해 나름 공훈을 있는 사람들을 우선 순위로 영토 배분이 이루어 졌다. 평민이 새로 개척한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는 경작권이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부위 재분배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새로운 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중산층의 등장이라 하겠다.
새롭게 등장한 신흥 중산층 계급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고 나아가 상호간 협력을 위하여 '코르테즈'라는 협의를 통한 일종의 대의기구를 탄생시켰다. 굳이 비교한다면 오늘날의 기초단체 의화 같은 정도라 할수 있을까? 이는 아마도 유럽 지역에서는 어느나라 보다도 앞서 민주주의의 기초가 선보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1188년 레온 지방을 필두로해서 아라곤. 카탈루냐. 카스티아에 코르테즈가 발족했다.
그러자 얼마 안가서 왕들은 일부 귀족들과 일부 성직자들과 지역 대의원(포를라레스)로 이루어진 코르테즈의 '의회 민주주의'를 왕권을 위협하는 불온한 세력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전쟁을 치루고 돌아온 카를로스 1세가 그동안 쏟아부은 전쟁부담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자 이들 코르테즈를 중심으로 거세게 항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한 카를로스 1세는 군대를 동원해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성난 파도처럼 솟아오른 민중들의 이념과 울분과 분노는 마침내 폭력사태를 수반하게 되었다.
민중들은 흩어진 힘을 한데로 모아줄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세고비아 출신의 (후안 브라보)였다.
후안 브라보는 '신성 동맹' 이라는 이름 하에 민중의 역량을 한데로 집결 시켰다.
스페인을 사랑하지도, 통치에 열의도 보이지 않는 카를로스 1세의 자격을 논한것이 아니라, 세금 경감, 법률 개정과 함께 부패한 공직자의 처분을 요구하였다. 체계가 잡힌 민중의 저항의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갔고 스페인은 뜨겁게 끓어올랐다.
세고비아에 이어서 톨레도가 동참했고, 이어서 과달라하라, 아빌라, 마드리드가지 대거 새롭게 합류했다.
아드리안 총리는 용병을 앞세워 세고비아의 무기고를 탈취하려다가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고 화약이 터져 세고비아 도시가 온통 쑥대밭이 되었다. 세고비아 대성당도 회생 불능일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다.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왕은 곧 촐리로 임명했던 위트레흐트 아드리안을 파면했다.
이후...... 정말로 아이러니 한 일이 벌어진다.
느닷없이 유배중인 후아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수도원에 가둔 왕정파와 후안 브라보의 신성동맹 사이에서 서로 후아나를 새로운 왕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어진 음모와 배신과 이간질과 어그러진 욕망들 속에서 마침내 반란은 끝을 맺고 만다.
1521년 비얄라르 전투에서 신성동맹의 민중 봉기군은 그만 정부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세고비아 대성당의 사모라 주교는 형틀에 앉혀져 교살당했고, 후안 브라운을 비롯한 73명의 의원들은 모두 이곳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역사는 (코무네로스의 반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그림같은 성의 모델이었다는 이유로 유명세를 톡톡하게 치르고 있는 (세고비아의 알카사르)를 살펴보면서 나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알카사르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천험의 요새였다.
2.000년 전, 이곳에 첫발을 내디딘 로마의 군대가 처음 병영을 설치하였던 곳이며, 목책을 둘렀던 방어진지였으며, 그 중요성이 더해지자 지금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성채의 모형은 아니었겠으나, 틀림없이 웅장하고 위용이 넘치는 성벽을 바위 벼랑에 기대어 쌓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도교를 통하여 물을 끌어들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로마 군대의 우렁차고 절도있는 행군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자연관찰 학습인지 소풍을 나온것 같은 초등학교 학생들과 잠시 만나 서툰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스페인에 대한 자부심과 공부에 대한 열정이 넘쳐보였다.
세고비아도...... 참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나마 사진이 나름은 골고루 살아남아 줘서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잃어버린 사진이야 어쩔 수 없겠고........ 가슴에 담아논 풍경이야 어느정도까지는 소중하게 남아있지 않겠는가.
여행기의 서두에 '레콩키스타가 시작된 카스티아 & 레온의 중심 도시 세고비아'라고 편현한 것은, 스페인 역사를 어느정도 아는 사람에게는 어리숙하거나 틀린 표현이 될 수도 있다. 다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런 표현을 했고, 그대로 두는 이유는....... 시기적인 첫 시작은 아니었지만, 레콩키스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만드는 절정의 시작이었다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레콩키스타는 이사벨 여왕을 빼고는 이야기 될 수가 없고...... 그녀가 이곳 세고비아에서 '카스티아 & 레온'의 왕으로서 즉위함으로써 절정을 향한 대단원의 막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레콩키스타'는 스페인 영토의 2/3를 삽시간에 차지해버린 이슬람 세력에 대해서 초기부터 꾸준하게 영토 회복운동이 전개되어 왔던 것이다.
역사는 그 시작을 서기 722년 북부 아스트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코바동가 전투에서 처음으로 승리하면서 부터 이미 레콩키스타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사 이야기는 스페인 여행내내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 다음 여행은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남은 (프라도 미술관 기행) 이었는데, 미술관측이 사진을 허락핮 않은 관계로 보완을 해서 이번 여행기의 마지막에 미술관 소개를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여 다음 이야기는 (코르도바)로 건너 뛰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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