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쌍둥이 동생 같아서 더욱 친근감이 들었었는데."
이세현은 윤태수를 부둥켜안으며 농담을 던졌다.
"저는 남의 머리를 이고 다니는 것처럼 불편했거든요."
태수도 웃으며 농담으로 받았다.
"박 과장도 너무 수고 많았어."
"회장님께서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복원수술을 마친 태수는 성규와 함께 이세현 회장을 찾았다. 세현은 소파에 앉아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얼굴도 원래모습을 되찾았고, 우린 모두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온 건가."
"모하메드 하산을 놓친 게 마음에 걸립니다."
"미국이 내건 2,000만 불의 현상금이 아깝다는 뜻은 아니겠지."
세현은 가벼운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태수의 표정이 굳어지는듯했다.
"회장님께, 그리고 박 과장한테도 아직 알리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요."
태수가 세현과 성규의 눈길을 동시에 잡아끌었다.
"모하메드 하산, 그자가 한국인입니다."
"그래? 우리나라 사람이 이슬람무장조직의 좌장격이라니 놀랍군."
"더 놀라운 건 그자가 바로 회장님의 형님을 죽인 자라는 겁니다."
"뭐, 뭐라고?"
세현은 깜짝 놀라 들었던 찻잔을 놓칠 뻔했다. 성규도 놀란 눈을 태수에게 고정했다.
"화학의 이세준 대표와 중공업의 전승현 대표를 살해한 놈이 바로 모하메드 하산입니다."
"난 지금 반쯤 얼이 나갔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군."
파랗게 질려 세현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팀장님! 저도 감이 오질 않네요."
"그자가 주로 저를 신문했는데 IS의 모하메드 하산이 이명규라는 걸 알고 저도 까무러칠 뻔 했지요."
태수는 대승화학의 근로자였던 이현우의 아들이 성장해서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대승을 위협하게 된 일부터 오규철 대표의 살해실패 후 수사망을 피해 터키로 도주했다가 시리아로 들어가 IS에 가담하기까지의 사실을 얘기했다.
"아아, 꽤 오래 전의 일인데 그게 지금까지 끈으로 이어져왔었다니."
세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탄식하듯 뇌까렸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를 놓친 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요."
"그자가 다시 나타날까?"
"IS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봐야겠죠. 나한테 두 번이나 기만을 당해 수치심까지 느끼고 있을 거구요."
"나한테 느끼는 거겠지."
태수의 말에 세현은 집게손가락으로 제 몸을 가리키며 부러 불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 그렇겠네요."
농처럼 말을 받았지만 태수도 불안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100억 유로의 몸값을 받으러 갔다가 부하들만 잃고 도망친 전설적 인물 모하메드 하산, 델타포스에서의 용감무쌍했던 마이클 중사, 오랜 세월 와신상담 복수심을 안고 살아온 이명규. 태수는 세 사람한테서 뚜렷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집착. 이슬람국가 건설을 위한 강렬한 충성심, 적대 적으로 맞설 때마다 승리에 대한 집념, 복수를 향한 활화산 같은 분노, 집착에 사로잡힌 세 사람 그 누구도 IS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는 의식이 들자 불안감이 엄습하는 거였다.
"갑자기 등골이 써늘해지는군."
"회장님을 불안하게 해드리는 것 같아서 말을 아꼈던 건데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명규가 속에 지닌 대승그룹에 대한 원한에 더해 IS의 모하메드 하산이 장기간에 걸쳐 계획한 이세현 회장 납치작전이 두 번이나 이 회장에게 농락당한 뒤 실패로 돌아갔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게 울분을 이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산은 군사력증강을 위한 명분으로 대승그룹 공략을 내세워 알아프리를 설득했겠지만 정작 본인은 개인적 원한이 깊이 사무쳐있다.
하산과 이명규에게 이세현 회장은 두 마리 토끼나 다름없었다. 잡은 토끼를 각각 한 마리씩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가 대승에 대해 분노를 지니게 된 계기 같은 걸 거론한들 사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해 이 회장에게 모하메드 하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태수는 양복주머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 옆에 서있는 자를 눈여겨보세요."
델타포스 군복을 입고 태수와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 속 인물의 명찰에 Michael Lee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태수도 사진을 보며 옆에서 웃고 있는 사내가 과연 생사를 같이 하며 우정을 쌓았던 마이클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IS에서 느낀 하산에게는 옛 전우이자 절친한 친구 마이클의 이미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마이클의 용맹은 살인마의 잔악함으로 뒤바뀌어 태수에게 몹쓸 그림으로 각인되었다.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한 명의 친구가 있다면 그 사내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거래.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은 행복한 게 맞아. 나한테 너, 윤태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말했던 마이클이다. 마이클은 그런 친구의 가족을 볼모로 삼았다. 태수는 잠시 숨을 몰아쉬다가 마이클 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산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세현의 얼굴색이 창백하게 탈색됐고 사진을 쥔 손이 심하게 떨렸다.
"어떻게 하산이 윤 팀장이랑?"
"팀장님! 오늘 자꾸만 놀라게 되네요."
세현과 성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수와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태수는 마이클이 전우였던 친구를 이용해 대승그룹의 총수를 납치하게 된 전말을 얘기했다.
"제가 대승그룹의 경호팀장을 맡은 게 발단이 되었다고 봐야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생사를 함께 한 친구한테…"
세현은 성규의 말을 자르고 한숨 쉬듯 낮은 목소리로 "우리 대승에 대한 원한이 더 사무쳐서겠지."라고 읊조렸다.
"박 과장! 이 사진의 얼굴을 머릿속에 충분히 담아둬."
"네, 다시 부딪치게 되면 반드시 잡으라는 거죠?"
성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경찰의 힘을 빌리자는 거야."
"하산에 대한 사항을 정부기관에 알려야 할까."
태수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 못한 세현이 물었고 성규도 의구심을 지니고 태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해 전 사우나살인사건의 범인윤곽조차 파악 못한 경찰이 지금 얼마나 답답할까요. 아직도 수사를 중단하지 않았을 겁니다. 범인은 시리아로 증발해버렸는데 말이죠."
태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남은 차를 마셨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세현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태수는 두 차례에 걸친 대승사장단 살인사건의 범인얼굴을 알게 된 이상 경찰력의 힘을 빌어서라도 그의 접근을 최대한 차단시키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몽타주?"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은 수긍하면서도 여전히 불안감을 씻어내지 못했다.
"내가 이따 박진철 팀장을 만날 테니 내일쯤 박 과장이 서초경찰서에 다녀오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박진철과 윤태수는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들이켰다.
"카아, 오랜만에 대장님이랑 마시니 술맛이 기막히네요."
태수는 진철의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덕담을 건넸다.
"태수랑 다시는 술자리 못할 줄 알았지.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
"대장님이랑 같이 설악산 가기로 했는데 약속도 못 지키고 죽을 수가 없었어요."
두 사람이 다시 잔을 비웠다.
"대승에 연이어 불행한 일이 생기는군. 아직 사우나사건도 해결 못했는데 말이야."
"아직도 수사를 계속하고 있나요?"
"미제사건이나 다름없지, 뭐. 단서하나 건져낸 게 없어. 그 사건 때문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어. 툭하면 언론이 건드리고 그러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씹히는 거야."
"몽타주를 만들면 어떨까요?"
태수는 조심스럽게 몽타주를 언급했다.
"그놈 얼굴을 본 사람이 없잖아."
"우리 박성규 과장이 얼굴을 기억해낼 수 있답니다."
"……."
"그때 지하주차장에서 범인이랑 박 과장이 몇 차례 몸싸움이 있었거든요. 가장 가까이에서 실물을 접한 유일한 사람이 우리 박 과장이죠."
"그때 범인은 백발신사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전문가가 실제모습을 살려내야죠."
"늦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놈이 국내에 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내일 박 과장을 우리 서로 보내."
"네."
다음 날 오전, 윤 팀장으로부터 받은 사진을 꺼내 한 번 더 유심히 살핀 박성규가 서초경찰서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이명규의 몽타주가 배포됐다.
서초동 사우나살인사건 용의자. 현상금 2,000만 원, 성명 이명규, 나이 30대 초반, 키 178cm, 탄탄한 근육질의 체격.
"모하메드 하산이 이 수배전단지를 보면 통탄하겠군요. 2,000만 불의 사나이를 2,000만 원으로 천분의 일이나 격하시켰으니 말입니다."
성규가 전단지를 태수에게 건네며 피식 웃었다.
"실물과 똑같아. 잘 그려졌어."
모하메드 하산. 태수는 몽타주에서 옛 친구 마이클의 이미지를 완전히 지우고 하산을 새기고 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