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기억하는 것들!
이런 날은 우울함 가득 담은 술 한 잔 하고 싶다.
깊도록 슬픈 봄을 세워놓고 한강 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술 한 잔 하고 싶다.
스무 살 그 청춘의 한 날 작업복을 입은 채 공단 입구의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잘 마시지도 못하던 소주잔을 기울이던 그 시간을 담아서 오늘 한 잔 마시고 싶다.
등고선 가득한 하늘의 빙빙 도는 빗줄기를 눈동자에 가득 감아놓고 꽃술 한 잔 하면서 친한 세월의 죽음을 기억하는 우매한 짓도 그런대로 참을 만할 빗소리라 그런가 보다.
사람은 공포로 산다고, 그 후미진 방안, 이렇듯 빗방울 살 저미게 쏟아지는 날이면 한 때의 다정했던 청춘을 안주 삼아 길거리 만장을 덮은 꽃잎 따다가 세월의 눈에 박아놓고 어깨 토닥이며, 술 한 잔 하고 싶다.
제법 근사한 음악이 흐르던 명동의 단골 다방, 하루 종일 구석에 앉아서 바람 맞던 기억, 야속한 시계 초침소리, 입술에 점 하나가 특별했던 그 여자를 기억하면서, 다방 DJ가 공개적으로 열두 시간째 바람 맞고 있는 한 ‘공돌이’를 위하여 'ACE OF SOLLOW'를 불러 젖히던 그 시절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술 한 잔하고 싶어진다.
그 시절 점 박힌 그 여자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표정으로 ‘커피’ 아닌 ‘코피’를 홀짝대며, “왜 불렀니? 이제 그만 불러대. 할 말도 없으면서” 라고 이별을 서슴없이 말하던, 그리고 매정하게 매일 커피만 마시느냐고 투덜대던 그 여자애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는지, 술 한 잔에 용해시켜 혼자 씁쓸히 기억하고 싶어진다.
나쁜 계집애!
불콰한 얼굴로 두 평짜리 자취방의 온갖 냄새를 게워내던 그 시절, 벚꽃이 이토록 아름다운 꽃이었는지, 진달래가 오스카 무대의 영상보다 더 진한 감동이었는지, 혹여 길가 개나리가 저토록 노란색의 최정예 색의 채색이었는지, 그런 날을 기억하면서, 추억을 쓸어 담아 술 한 잔 하고 싶다.
기억할 것이 많으면 기억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한다. 기억할 것이 없으면 기억할 것이 많은 것이다. 인생의 중앙에 서서 우두망찰하는 이 시간의 분절음 속에 나는 어떤 초침을 살아가고 있을 것일까.
행복한가?
긴 물 안개를 입에 물고 산을 오르는 저 봄의 그악스러움, 딱 한번만이라도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봤으면, 계절의 중앙에 서서 그 시절의 부질없음을 다 버릴 수 있을 텐데.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점박이 그 얘에게 ‘코피’ 아닌 근사한 헤이즐넛 향기 가득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이런 비오는 날 꽃잎 담은 눈빛을 머금고 멋지게 키스 한번 했을 터인데. 딱 한번만이라도 그 입술의 점을 내 입술로 담아봤다면, 아 그 시절을 더 이상 추억하지 않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