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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이 시작되기 전의 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이 책은 저자가 1965년 일본에서 두 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토대로 출간한 결과물이라고 제시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만큼이나 일본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기에, 당시 현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저자를 초청해 그 해답을 듣고자 한 내용이 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고 이해된다. 사전적으로는 지식인이 높은 수준의 지성과 폭넓은 교양을 갖춘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지만, 그러한 능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발휘될 때 과연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발휘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적절하게 펼쳐내야만, 그 사람을 일컬어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저자 역시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자기와 관계없는 일에 참견하려 드는 작자’로 여기는 풍조를 거론하고 있다. 아울러 ‘정치사회에서는 물론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이 박탈’된 ‘본질적으로 무력한 존재들’이라는 비난에 대해, 지식인의 입장에서 저자가 변명을 시도하는 내용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먼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지식인이 처한 상황과 지식인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탐색하고자 한다. 어느 사회나 ‘지배 계급은 그 자신의 궁극적 목적인 이익에 준하여 실용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권력자의 이익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을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으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교수로서 정치적인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을 정치교수(politic professor)라는 의미로 '폴리페서(polifessor)'라는 신조어로 일컫고 있는데, 이러한 부류의 인물들을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칭하지 않는 이유라고 하겠다.
저자에 의하면 ‘지식인이란 자기 내부와 사회 속에서 구체적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의 이념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지배 계급의 사주를 받아 자칭 엄격한 논리’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일컬어 ‘사이비 지식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그렇기에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행동하는 ‘근본주의와 지식인의 행위는 동일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개혁론자들의 온건한 논리야말로 지식인에게 지배 계급의 원리 자체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지배 계급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그 계급에 봉사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필연적으로 지식인이 근본주의적 입장에 서게 만드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저자는 ‘지식인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누구로부터 위임장을 받은 일도 없고 어떤 권력으로부터도 자리를 배당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로 특징되는 지식인이 처한 ‘모순’을 우선적으로 떠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대중들의 입장에서 고민하며 행동해야만 한다는 점을 ‘지식인과 대중’이라는 항목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의 근원적 상황과 형성 과정에 의해 영원히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는 그 이념에 대항하여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저자 자신이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기에 ‘작가는 지식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작가 역시 진정한 지식인으로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다.
오랫동안 서가에 꽂혀 있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면서, 그 주변부가 누렇게 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대학 신입생 시절 동기들과 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기 위해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 읽은 후 책의 뒷면에 적힌 대학 신입생으로서의 다짐을 적은 다음의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얄팍한 지식인(知識人)의 때를 벗어버리고자 몸부림을 치며 이에 나의 모습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역시 이러한 생각으로 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앙드레 말로의 책에서 인용한 “삶은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삶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라는 구절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권력에 빌붙지 않고 항상 사회에서 배제될 수 있는 처지의 소수자의 입장에 서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이유라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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