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교육시기에 사고로 접근하면 발생되는 문제는 무엇인가?
'사고'는 인간의 의식 중에서 깨어있는 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이 근간이고, '공감'은 무의식이 근간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말한다면 마음이다.
인간의 본성 관점으로 보면
깨어있는 의식은 象으로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생각은 본질이 아니다. 본질은 무의식에 내재한 의지와 직관이나, 현실에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깨어있는 의식상태에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 접근하는 방법이 지식-생각인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항상 오류를 가지고 있다. 본질을 표현할려고 하지만, 생각이 사고를 통해 접근하므로 완전하지 못한 것은 따라서 필연이다.
반면 무의식이 근간인 마음은 본질을 표현하나, 표현하는 마음을 생각이 가려서 인간이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예컨대 힘들다는 것은 생각이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이 힘들다는 것이다. 또 복잡하다는 것은 생각이 복잡하지 마음이 복잡하다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자신에게 집중해보면 어느 순간 복잡한 생각이 마음으로 전달되어서 마음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생각이 무의식에 전달된다는 의미이다. -지식교육의 가능성이라고 할수 있을 듯하다-
인간의 발달단계를 살펴보면 공감시기가 있고, 공감시기를 거쳐서 사고단계로 나아간다. 공감이란 대상을 온전히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사고는 모두를 대상으로 보고 판단한다. 따라서 생각이란 -상- 대상이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공감이란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말이고, 사고, 즉 대상으로 본다는 것은 물질로 본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정신으로 보면, 모든 대상이 같은 존재이다. 이를 물질로 보면 대상은 모두 나와 다른 존재이다. 공감시기에 대상으로 보는 지식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신을 말살시킨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공감시기란 대상을 온전하게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인간이 깨어있는 의식 상태이지만, 대상을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상태로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무의식에 내재한 의지와 직관-본질을 만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한다면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아이가 의지가 없고 창조적이지 못한 것은 이 시기에 지식교육을 받아서 무의식에 연결되지 못한 때문이다. 예컨대 무의식에 연결된 상태인데, 대상으로 보도록 했기때문에 연결이 안 된 것이다.
요약하면 공감시기에 사고로 접근하면 아이들은 의지를 발현시키지 못하고, 직관 표출이 안 되므로 창조를 하지 못한다. 반면 인간의 본성에 따라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아이들은 의지를 발현시키고 창조를 할 수있다. 따라서 현재 아이들이 무기력하고 창조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이 문제인 것이다.
물론 공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지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슈타이너는 공감을 '사랑'으로 표현했다. 대상을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사랑의 의미와 온전하게 부합한다. 우리에게는 사랑으로 교육이 이루어진 시기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과학적인 패러다임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공감이 더욱 어려워진 것 또한 사실이다. 어쨌든 현재는 지식을 가지고 공감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장에서 많은 아이들이 공감시기에 지식교육을 받아서 무기력하고 더욱이 창조는 꿈도 꾸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본래는 창조적이고 의지가 강한 아이들인데 교육이 오히려 어렵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자는- 많이 안타깝다.
지식교육을 받아서 무의식에 연결되지 못했다는 것은 정신이 말살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의지와 직관은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공감이란 사랑인데 사랑을 받으면 용기가 나고 무엇이든 하고자 한다. 이것이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들에게 필자가 해주는 말이 있다.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하다는 것은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는 물질의 차원이 아니다. 아이가 자신이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아이는 변화한다. -물론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반복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한다. 정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존재, 주인이 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안창호 선생님 등-들이 청소년들을 교육할 때 이러한 시각에서 하지 않았나 한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면 주인으로 살고자 하고, 또 올바른 삶에 자신을 던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숨을 버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지식교육으로 인해 정신이 말살된 아이들에게 해 주면, 아이들의 정신이 다시 점화되어 가슴 속이 불타오르는 것을 필자가 느끼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이고, 매사 흥미를 가지며 학교생활을 즐거워한다. 반면 반대의 아이들의 경우는 정신이 말살되었다고 보면 된다. 지식교육의 폐해는 아이들의 정신마저도 말살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지식교육은 아이들을 행복하지 않게 한다. 공감은 '사랑'의 감정이고, 사고는 '토할 것 같은 구토'의 감정이다. 지식교육은 사고를 하도록 강조하므로, 지식교육을 받으면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된다. 토할 것 같은 구토의 감정을 자꾸 가지면 짜증나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결과 지식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짜증을 많이 낸다.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아이들, 짜증이 많이 난 아이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이 시기는 특히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의지가 나와 바로 행동으로 옮길뿐만 아니라 창조로 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요즈음 일어나는 학교폭력으로 분출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폭력의 시원이 공감시기,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짜증이 많이 나는 교육을 받은 결과, 의지와 직관이 표출되어서 폭력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은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인가?
그렇다면 공감시기에 지식교육을 하지 않을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식으로 본질을 표현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교육을 안한다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방법은 첫째, 0-3세까지는 아이를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3세가 지나면 아이가 스스로 의지를 발현시키도록 아이가 흥미를 갖는 일을 하도록 간섭하지 말고 지켜보는 것이다. 사랑으로 보듬으면 아이는 스스로 힘든 일을 이겨내고 완성한다. 이것이 아이가 의지를 발현시키는 방법이다. 특히 화를 내고 간섭하면 아이는 의지를 발현시키지 못한다. 이 시기 무의식이 열려있다는 의미는 의지와 직관, 창조로 바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이시기 받은 영향이 평생을 간다는 의미이다.
7-14세는 지식을 공감으로 전환시켜서 해야 한다. 아이를 사랑하면 아이는 대부분 흥미를 갖는다. 흥미를 갖고 재미있으면 스스로 반복한다. 이것이 예술교육이다. 지식을 그림과 음악으로 변환시키고, 예컨대 동화를 들려주어서 그림으로 표현하는 교육 등이다. 분명한 것은 아이가 흥미없어하면 그만 두어야 하고, 아이가 하고싶어하는 것을 하게 해주되 창조적이고 아름다운 영혼이 반응하는 일이면 더욱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