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생인들 애로가 없을까. 아주 우연히 돈연스님 타계소식을 들었다. TV에서. 처음 그분의 결혼소식을 들은것도, 방학때 아이들을 대리고 연화리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였다. 스포츠신문. 그때 충격에 비하면 이번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나이가 나이이니까, 그래서 였을까 아니면 마음이 그만끔 멀리 있어서 였을까. 그는 확실히 유명인이고 대단한 사람이긴 했다. 그 어렵다는 장경을 우리말로 번역을 할수있었던 몇분 안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분을 알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을수도 있다. 어쩌면 그이 발치에도 못미치는 내가 늘 열등하다는 자격지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도완녀 여사, 돈연스님은 도선생이라고 호칭했단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셨던 것 같다. 우여곡절을 다 남이 어찌 알겠는가만, 서로 존중하며 사는 삶이면 성공한 삶이 아니겠나 싶다. 그러고보니 다들 갔다. 소꼽동무에서부터 어쩌다가 스처지나간 친구(?)들까지,,, 간다는 말도 없었다. 하긴 작별을 나눌만한 사이도 아니었던가. 죽엄이란 관문을 통과해서는 각자가 다른 세상에 이르는 것일까 아님 서로 만나는 볼수있는 것일까. 서로를 궁금해 하기는 할까, 아니 그럴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던게 아쉽다.나는, 뭐가 그리 까다로운지 친하게 알고지낸 사람이 없다. 내것을 선듯 내어줄만끔, 그런 사이는 아무도 없다. 생각해보면 참 헛살았다. 뭐에 목을 맸을까. 허영심 뿐이었을까. 탐욕은? 인색함은? 나를 정말로 망친것은 뭐였을까. 이룰수없는 꿈에 현혹되어 현실 파악을 못하고 평생을 그릇친거라면 거기 남편 흉은 왜 보는데? 상대방 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존심은 사실 나를 병들게 했을뿐이다. 내가 왜 그보다 못하냐는 비교의식은 나를 절망속으로 빠트리는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강하지도 못했고 영리하지도 못했다. 개천의 용을 선망하고 사모했으면서도 노력은 전혀 없었다. 나는, 그러니까 판타지에 취해서 현실감도 갖고있지 않았다. 내 인생은 그렇게 허비했던 것인데,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분투에 분투를 쌓은 사람들은 어느정도 성과라는 것을 거둘수도 있는게 당연한게 아닌가.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그사람도 나름 시인, 혹은 소설가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나는 그를 질투하며 읽을수도 없는 어려운 글을 쓴다며 흉을 본다. 이게 나다. 나는, 생계문제에 매달려 다른것에는 문외인으로 살았다. 그럼 작은 부라도 이루었어야 마땅한데 현실은 그렇지도 않다. 아들딸에게 내 생활비까지 부담시키고 있다. 왜 이렇게나 한심할까.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나 당대의 부를 창출한 졸부는 아니더라도 내 앞가림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할게 아닌가. 그런데 그마저도 내게는 어렵고 힘든 일인것은 왜 일까. 얘기가 또 자기비하 쪽으로 가고 말았다. 덥다. 선풍기로는 부족한가. 아니, 아니다. 충분하다. 돈연스님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먼저 간게 조금 부렵다. 작년이 내 희망수명이었는데,,, 왠지 도난당한 기분이다. 그럼 나는 얼마를 더 견디고 버텨야 할것인가. 할일없이 시간만 줘어진다는 것도 벌 받는 것이 아닐까. 주님, 그리 마시옵소서. 용서를 거듭 빕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십시요.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