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祖神聖大王(15)
丁酉(二十年 937秊)
<後晉 天福二年, 契丹 天顯十二年>
○ 夏五月에 政丞金傅ㅣ 獻鐫金安玉排方腰帶한데 長十圍이요 六十二銙라 新羅寶藏ㅣ 殆四百年한데 世傳聖帝帶라 王이 受之하고 命元尹弋萱하여 藏于物藏이라
○ 여름 5월에 정승(政丞) 김부(金傅)가 전금안옥배방요대(鐫金安玉排方腰帶)를 바쳤는데 길이가 10발[圍]이고 대구(帶鉤)가 62개였다. 신라(新羅)에서 보물로 간직한 지 거의 400년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성제대(聖帝帶)라 불렀다. 왕은 이를 받고 원윤(元尹) 익훤(弋萱)에게 명하여 물장성(物藏省)에 보관하게 하였다.
* 전금안옥배뱡요대(鐫金安玉排方腰帶): 금을 상감(象嵌)하고 옥을 넣은 네모진 허리띠.
* 과(銙): 대구(帶鉤). *帶鉤: ①혁대의 두 끝을 마주 걸어 잠그는 자물단추. ②띠쇠(허리띠에 다는 쇠 장식).
初新羅使金律來에 王問曰 聞新羅有三大寶는 丈六金像과 九層塔 幷聖帝帶也니 三寶未亡이면 國亦未亡이라 塔像ㅣ 猶存한데 不知聖帶라 今猶在耶아 律ㅣ 對曰 臣未嘗聞聖帶也니이다 王이 笑曰 卿은 爲貴臣이온 何不知國之大寶아
예전에 신라의 사신 김율(金律)이 왔을 적에 왕이 묻기를, “신라에는 장륙금상(丈六金像)과 9층탑ㆍ성대(聖帶)라는 세 가지 큰 보물이 있어서, 세 가지 보물이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불상과 탑은 아직 남아 있는데, 성대도 지금까지 있는가." 하였다. 김율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성대가 있다고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웃으며 이르기를, “경은 지체높은 신하이면서 어찌하여 나라의 큰 보물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律이 慚하며 還告其王하니 王이 問群臣이나 無能知者라 時有皇龍寺僧 年過九十者ㅣ 曰 予聞聖帶는 是眞平大王所服으로 歷代傳之하여 藏在南庫라하다 王이 遂開庫하니 風雨ㅣ 暴作하여 白晝晦冥하여 不得見이라 乃擇日齋祭然後에 見之라 國人이 以眞平王是聖骨之王으로 稱曰 聖帝帶라
○ 遣王規․邢順하여 如晉賀登極하다
율이 부끄러이 여기고 돌아와서 왕(신라왕)에게 고하니, 왕이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황룡사(皇龍寺)의 나이 많은 중이 말하기를, “성대는 진평대왕(眞平大王)께서 띠고 계시던 것인데, 대대로 이를 전하여 남고(南庫)에 간수해 두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였다. 왕이 마침내 남고를 여니 비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한낮인데도 어두워져서 보이지를 않았다. 이에 택일하여 재계하고 제사를 드린 뒤에야 보게 되었다.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은 성골 출신의 임금이므로 “성제대(聖帝帶)”라고 칭하였다.
○ 왕규(王規)와 형순(邢順)을 후진에 보내어 황제에 오름을 축하하였다.
戊戌(二十一年 938秊)
<後晉 天福三年, 契丹 會同元年>
○ 春三月에 西天竺僧來하니 王이 備兩街威儀法駕하여 迎之하다
○ 봄 3월에 서천축(西天竺)의 중이 오니, 왕이 양가(兩街)의 위의(威儀)와 법가(法駕)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 秋七月에 碧珍郡(星州)將軍李忩言卒하다 新羅之季에 群盜競起한데 唯碧珍郡은 爲忩言所保하여 民賴以安이라 王이 遣人하여 諭以同心戮力하여 底定禍亂하니 忩言이 奉書甚喜하여 卽遣其子永하여 將兵從王征討라 王이 善之하여 以大匡思道貴女로 妻之하고 拜忩言하여 本邑將軍하고 恩賚稠重이라 忩言이 感激하여 鍊兵峙糧하여 以孤城으로 介於新羅百濟하여 必爭之地로되 屹然爲東南聲援이라
○ 가을 7월에 벽진군(碧珍郡) 장군 이총언(李悤言)이 졸하였다. 신라의 말기에 뭇 도둑들이 앞다투어 일어났는데, 오직 벽진군은 총언의 보호를 받아 백성이 그 덕분에 편안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화란을 평정하도록 개유(開諭)하니, 총언이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여 곧 그 아들 영(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을 따라 정토(征討)하도록 하였다. 왕이 이를 착하게 여겨 대광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고, 총언을 본읍의 장군으로 임명하고 은사(恩賜)가 후하였다. 총언이 감격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양식을 저축하여 고립된 성(城)으로 신라와 후백제가 서로 다투는 땅에 끼어 있으면서 우뚝히 동남쪽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 성원(聲援): ①소리를 질러 응원(應援)함. ②하는 일이 잘되도록 격려(激勵)하거나 도와줌.
○ 始行後晉年號하다
○ 築西京羅城하다
○ 冬十二月에 耽羅國太子末老ㅣ 來朝하니 賜星主王子爵하다
○ 是歲에 城陽巖․龍岡․平原하다
○ 비로소 후진(後晉)의 연호를 시행하였다.
○ 서경에 나성(羅城)을 쌓았다.
○ 겨울 12월에 탐라국(耽羅國)의 태자 말로(末老)가 와서 조회하니, 성주(星主) 왕자의 작(爵)을 내려 주었다.
○ 이해에 양암(陽巖)ㆍ용강(龍岡)ㆍ평원(平原)에 성을 쌓았다.
己亥(二十二年 939秊)
<後晉 天福四年, 契丹 會同二年>
○ 春三月에 佐丞龔直이 卒하다 直은 燕山昧谷人으로 自幼有勇略이라 事百濟하여 爲甄萱腹心한데 以長子直達과 次子金舒及一女로 爲質이라
○ 봄 3월에 좌승(佐丞) 공직(龔直)이 졸하였다. 공직은 연산군(燕山郡) 매곡(昧谷)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후백제를 섬겨 견훤의 심복이 되었는데, 연산에 있으면서 맏아들 직달(直達)과 둘째 아들 금서(金舒)와 딸 하나를 볼모로 삼게 하였다.
直이 嘗朝百濟라가 謂直達曰 今見此國奢侈無道하니 吾雖密邇나 不願復來라 聞高麗王公은 文足以安民하고 武足以禁暴이라 故로 四方無不懷服이라 予欲歸附한데 汝意何如아
공직이 일찍이 후백제의 서울에 조회하러 갔다가 직달에게 이르기를, “지금 이 나라가 사치하고 무도한 것을 보니, 내가 비록 가까이 있지마는 다시 오고 싶지 않다. 들으니 고려의 왕공(王公)은 백성을 편안하게 할 만한 학문과 포학을 막아 제어할 만한 무용을 갖추고 있어, 사방에서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귀부(歸附)하고자 하는데, 너의 의사는 어떠하냐?" 하였다.
直達曰 自入質以來로 觀其風俗하니 唯恃富强하고 競務驕矜하니 安能爲國哉잇가 今大人이 欲歸明主하여 保安弊邑이 不亦宜乎잇가 予도 當與弟妹로 俟隙而歸矣니이다 縱不得歸라도 賴大人之明하여 餘慶이 流於子孫이면 則予ㅣ 雖死無恨이니다
직달이 말하기를, “제가 볼모로 들어온 후로 그 풍속을 보니, 오직 부강한 것만 믿고 교만과 자랑에만 힘쓰니 어찌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아버지께서 현명한 주군에게 귀부하시어 우리 고을을 보전하려 하심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마땅히 아우ㆍ누이동생과 함께 틈을 타서 고려에 귀부하겠습니다. 비록 귀부하지 못하더라도 아버지의 밝으심을 힘입어 앞으로 남은 경사가 자손들에게 전해진다면 저는 비록 죽더라도 원한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直이 遂決意來附하고 與子英舒로 來朝하여 言於王曰 臣在弊邑하며 久聞風化하니 雖無助天之力이나 願竭爲臣之節이라하니 王이 喜拜大相하고 賜白城郡(京畿道 安城)祿과 廏馬彩帛하고 拜子咸舒하여 爲佐尹하다 又以貴戚正朝俊行之女로 妻英舒하다
공직이 드디어 고려에 귀부하기를 결심하고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와서 조회하고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저의 고을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고려의 풍속과 교화를 들어왔으니, 비록 왕을 도울 만한 힘은 없사오나 신하의 절의를 바치고 싶습니다." 하였다. 왕이 기뻐서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백성군(白城郡)의 녹(祿)과 말ㆍ채백(彩帛)을 내려 주고, 그 아들 함서(咸舒)를 좌윤(佐尹)으로 임명하였다. 또 귀척(貴戚)인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王曰 卿이 灼見理亂存亡之機하고 來歸於我하니 朕甚嘉之하여 聯姻公族하여 用示厚意하니 卿은 其益竭心力하여 鎭撫邊境하라
왕이 이르기를, “경이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의 기틀을 환하게 보고 나에게 귀순해 왔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긴다. 그러므로 공족(公族)과 인척(姻戚)을 맺게 하여 후의를 보이니, 경은 더욱 마음과 힘을 다하여 변경을 진무하라." 하였다.
直謝因言曰 百濟一牟山郡은 境接弊邑한데 以臣歸化로 常加侵掠하여 民不安業하니 臣願往攻取하여 使弊邑之民으로 不被寇竊하고 專務農桑하여 益堅歸化之誠이라하니 王許之라
공직이 사례하고 곧 아뢰기를, “후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은 경계가 신의 고을과 인접해 있는데, 신이 귀화한 까닭으로 늘 신의 고을을 침략하여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이 가서 빼앗아 신의 고을 백성들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고 오로지 농사와 길쌈에 힘쓰도록 하여 귀화해 온 정성을 더욱 굳게 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萱怒하여 收直達及弟妹하여 烙斷股筋하니 直達死之라 百濟滅하니 金舒는 得還하다
○ 是歲에 晉ㅣ 遣國子博士謝攀하여 來冊王하여 爲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하다
○ 城大安하다
견훤이 노하여 직달과 그 아우ㆍ누이동생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에 지져서 끊으니 직달은 죽었다. 후백제가 멸망하니 금서는 돌아왔다.
○ 이해에 후진에서 국자박사(國子博士) 사반(謝攀)을 보내서 왕을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로 삼았다.
○ 대안(大安)에 성을 쌓았다.
庚子(二十三年 940秊)
<後晉 天福五年, 契丹 會同三年>
○ 春三月에 以慶州로 爲大都督府하고 改諸州郡號하다
○ 秋七月에 王師忠湛死하니 樹塔于原州興法寺하고 王이 親製碑文하다
○ 十二月에 開泰寺成하니 命設落成法會하고 親製疏文하다
○ 봄 3월에 경주(慶州)를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고 여러 주(州)ㆍ군(郡)의 호칭을 고쳤다.
○ 가을 7월에 왕사(王師) 충담(忠湛)이 죽으니 원주(原州) 흥법사(興法師)에 탑을 세우고 왕이 친히 비문을 지었다.
○ 12월에 개태사(開泰寺)가 완성되니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다.
○ 是歲에 初定役分田하다 自朝臣至軍士히 勿論官階하고 視人性行善惡과 功勞大小하여 給之有差하다
○ 重修神興寺하고 置功臣堂하여 繪三韓功臣於壁하다 設無遮大會一晝夜하고 歲以爲常하다
○ 晉이 歸我質子王仁翟하다
○ 이해에 처음으로 역분전(役分田)을 정하였다. 조신에서 군사까지 관계(官階)는 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품과 행실이 선한지 악한지와 공로가 큰지 작은지를 보아서 역분전을 차등 있게 주었다.
○ 신흥사(神興寺)를 다시 수리하고 공신당(功臣堂)을 두어 삼한의 공신을 벽에 그렸다. 무차대회(無遮大會)를 하루 밤낮 동안 베풀고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 후진에서 우리 나라의 볼모 왕인적(王仁翟)을 돌려 보냈다.
* 역분전(役分田): 역분전은 940년(태조 23)에 고려 왕조에서 처음 실시된 토지 분급 제도이다. 역분전은 후삼국 통일 전쟁에 대한 포상이자 관인에게 지급하는 급여로서 직전(職田)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후 시행되는 전시과(田柴科) 제도의 선행 형태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