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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도
하얀 파도가 밀려와선 부딪친다. 태풍이 올 때 타 넘을 것 같이 둘둘 말린다. 거리낌 없이 들이닥치는 파도를 가로막아서 주저앉힌다. 여름에는 푸른 빛이다가 겨울은 갈색으로 바뀐다. 드문드문 검은 나무가 보인다. 애드벌룬처럼 둥근 게 주저앉아 있다. 흔한 남자 이름 같다. 옆은 신자도와 대마등, 장자도가 가로질러 늘어섰다. 섬마을이다. 다닥다닥 길게 엉겼다.
직선으로 1킬로 아니 2킬로쯤 될까. 안쪽 가운데도 가락 동쪽이라는 낙동강이 합쳐지는 바다여서 수평선은 대중이 안 간다. 저길 가 보고 싶은데 갈 수가 없다. 물이 얕아 걸어갈 수도 있을 텐데 아무도 그리 가는 걸 못 봤다. 가운데 배들이 다니는 길이 세로로 뻐끔 틔었다. 썰물 때 바닥이 드러나도 뱃길은 패여 고인 물을 따라 다닌다.
“썰물 때 가면 닿을 수 있겠다.”
“한번 가 보고 싶어라.”
아낸 저기 가자고 졸랐다.
“나물 캐고 모래사장을 걸으며 조개도 줍자.”
“빠지면 어쩌려고.”
가운데로 쭉 뱃길이 나 있는데 좌우로 붉고 파란 불빛이 깜박인다. 밤길 다닐 때 물길을 안내하는 등이다. 저기 왜 물이 고였을까.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닌다. 바닥이 드러나 온통 뻘밭인데도 그 길로 통통거리며 들락날락한다. 장마 때 흙탕물에 토사가 밀려 내려오면 골고루 퍼져 평평해야지 어찌 배가 다니나.
“배 다니라고 저절로 만들어졌어요”
“그런 게 어딨어 누가 팠길래 생겼지.”
갯벌에 조개 캐러 다니는 사람을 본 적 없다. 겨울 철새들이 찾아오는 보호지역이어선가. 서낙동강 다리 위는 물 나갈 때 사람들이 재첩과 조개 건지러 많이 들어간다. 그 아래는 들어갈 수 없는가. 양식 배만 다닌다. 진우도와 신자도 사이를 빠져 가덕도와 몰운대를 다니며 가리비를 키우는 것 같다. 한밤중에도 불빛이 움직이는 걸 보면 밤낮으로 일한다.
“논밭처럼 양식장이 줄 맞춰 늘어섰네.”
“바다가 아니라 농장이구만.”
바깥은 드넓은 바다이고 안은 얕아서 간조에 바닥이 드러난다. 장마 땐 낙동강 황토물이 넘실대며 흘러내려 바닥에 쌓인다. 얼마 못 가서 갈대가 자란다. 등이다가 섬으로 바뀌어 가는 순서이다. 자주 드러나는 곳엔 갈대가 자란다. 그렇게 생긴 서낙동강 섬이다. 큰 줄기 낙동강에도 을숙도와 그 아래 맹금머리, 백합등, 도요등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가는 배를 알아봐요.”
“가는 길이 없을까.”
진우도는 가까이 보여도 눈으론 희미해 뭣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해무가 피어올라 어렴풋한 게 선명치 않다. 검은빛의 나무도 촘촘히 있고 섬 중에서 커 보인다. 집이 있고 희끗거리는 덩어리가 뭘 쌓아놓은 것이다. 사람이 들락거리는 걸 못 봤다. 쌍안경으로 살펴도 눈으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까운데도 멀게 보여 안달이다.”
“하얀 백사장이 진우도와 건너 신자도에 넓게 보이네.”
이곳으로 이사 온 뒤 맨날 저 건너를 내려다보는 게 버릇이다. 13층이어서 앉아 보면 한눈에 들어온다. 대한해협에서 밀려오는 파도와 태풍을 네 개가 받아주는 고마운 섬들이다. 좌로는 다대포 몰운대이고 우측으론 가덕도와 그 뒤에 거제도가 희미하다.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 아파트이다. 거센 파도가 폴폴 찾아와선 사그라들곤 한다.
“저길 갈 수 있나.”
볼 때마다 생각만 흘렀는데
“철야기도를 갔다 왔어요.”
문인 모임에 수필 쓰는 김애영 권사가 교회에서 진우도를 갔다 왔단다. 섬이 뵈는 아파트에 산다니 일러준다. 배를 빌려 들어가 밤샘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둘러보고 왔다며 그곳의 얘길 해줬다. 그런가 하며 지났는데 점점 살던 집은 어떤가.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콩칠팔새삼륙이 생긴다. 누가 살았기에 집이 있지 않았겠나.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왜 오래도록 비어있나. 알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다.
마침 그리 가는 일이 생겼다. 이곳 문학회에서 해당 구청의 도움을 받아 배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날짜를 기다렸다. 또 향토사학자가 자주 만나는 문인이어서 설명을 곁들이면 자세하게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난봄 문학기행 때 가덕도를 배로 다녔다. 하나하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백 년 전 일군의 진지를 얘기해 줘 놀랐다. 대한해협으로 지날 러시아 함대를 겨냥한 것이다. 30여 척의 거대한 무적 발틱전함과 맞닥뜨려 이틀간 피나는 해전이 벌어졌다. 5월 말경이다. 세계 최대 전단을 맞아 포탄이 불을 뿜은 노일전쟁이다. 거의 전멸하다시피 기세등등하던 러시아 함대가 일본에 패했다. 독도 부근에서 제정러시아 함장은 사로잡혀 항복했다. 수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수장됐다니 한 많은 곳이다.
숭어잡이 장소도 알려줬다. 높은 데서 물빛을 보고 소리치면 그물을 올린다. 숭어가 가득히 올라온다니 신기하다. 원시인들이 살던 조개무덤도 보여줬다. 임란 때 부산항에 들어온 왜군을 몰아내려다 순신의 아들 회를 잃은 곳도 여기다. 작은 섬이지만 산이 높고 험해 마을을 배로 다녀야 한다. 이제 차도가 생겨 마지막 몰고 한 바퀴 도는 배란다.
진우도 갈 날에 그만 집안일이 생겨 못 가고 말았다. 퇴직자 모임에 동료 선배가 가덕도가 보이는 곳에 산다니
“진우도를 아는가.”
보육원에서 원생들을 지도했다. 저학년을 가르치고 5.6학년과 중학생은 건너 가덕도에 배 타고 다니면서 배우게 했다. 괴정수용소에서 원생들을 보내면 받아 먹이고 입히며 가르쳐 재웠다. 전란 통에 부모 잃고 떠도는 아이들을 시내 곳곳의 시설로 보냈는데 진우도가 섬이어서 아이들 관리하기가 쉬웠다.
꽃밭을 만들고 소나무를 곳곳에 심었다. 규율 완장을 차고 자치 지도를 했다. 원장이 바뀌자 떠나야 하는데 마땅한 직장이 없어 박 선생은 그대로 눌러있게 되었다. 밭도 일궈 채소를 얻고 바다 개펄에 들어가 조개도 캐 보탰다. 새로 받아놓으면 밤중에 도망친다. 거리를 헤매며 걸식하던 게 버릇이 된 아이들은 답답해서 못 견뎠다. 그때 오리쯤 되는 서낙동강 하구 바다를 ʻ후절펑ʼ 건너 시내로 줄행랑을 놨다. 썰물 때 건넌다는 얘길 했다. 밀물 만조여도 한길을 넘지 않는다.
“여기가 염전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1만 세대나 된다. 그때 소금밭과 늪지대는 간곳없다. 가르쳤던 학생을 지금도 알고 지낸단다. 정유식이란 이름까지 말한다. 박인국 선생은 구순인데도 기억이 좋다. 꼬장꼬장한 늙은이가 당뇨로 몸은 야위어도 허리가 곧아 뒷모습은 젊게 보인다. 가덕도에 학생들을 보내고 데려오면서 자주 만난 그곳 중학교 엄산옥 선생과 결혼했다. 육이오 때 월남한 사람들이다. 엄 선생의 가까운 친척이 시내에서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섬과 섬을 들랑거리며 눈이 맞았다.”
건너편 용원은 진해 시인데 가덕도와 여기 섬들은 모두 부산시이다. 부부가 보수동 친척 학교로 옮겨 가르칠 때 함께 근무하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두 분은 그 전쟁 중에 부산에 와 지극히 살기 어려운 터였는데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교사 자격증을 얻었는가 보다. 참 놀라운 일이다. 박 선생은 사회과이고 엄 선생은 국어이다. 부부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교감 교장을 지냈다.
“북쪽 엇진 말투다.”
중학교가 없어지자 내외가 한 교무실에서 왔다 갔다 일하게 되었다. 얼마 뒤 부인 엄 선생이 도서관장으로 올라가더니 어느 날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두 달에 한 번씩 퇴직교사 모임에서 박 교장을 만나고 재단법인 이사회 때도 본다. 시인이 된 엄 교장은 문인회에서 가끔 만나 인사하는데 처음은 누군지 몰랐다.
그사이 많이 지났고 늙어 못 알아봤다. 팔팔하던 사람들이 나이 드니 저리 변해갔다. 말투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함경도 사투리다.
“안녕하세요.”
“아아 예 예 반갑습니다.”
인사하며 지나가는데
“누구더라.”
옆의 장자도엔 농사꾼이 살았다. 누군지 알고 싶고 찾아 어찌 살았는지 얘길 나누고 싶다. 물안개처럼 자꾸 피어나면서 생각난다. 무심히 내려다볼 때마다 그런 마음이 꽂힌다.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섬이 내 눈엔 그리움으로 이글거린다. 네 개 섬 중에서 우물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단다. 외로운 데다가 살기 구차하니 버리고 나온 것이다. 어디에 살고 있을까. 보고 싶어진다.
아이들 학교 보내야 하고 아프면 치료도 걱정이다. 이웃 없는 곳에서 어찌 사나. 거기에다 해마다 여름 태풍이 오면 견디기 어렵다. 덮칠 수 있어 위험하다. 어디로 연락이 되겠나. 통신 수단이 있었을까. 막막하다. 그곳에 우물 터가 어떤가. 지금도 있을까 가 보고 싶다. 사람 살던 터를 보면 아득히 생각나게 한다.
“이 사람들이 살았나 죽었나.”
“어디서 뭘 할까.”
우물 생각에다 꿈꾸는 얘기가 자꾸 이어진다. 노도(櫓島) 산 중턱에 엉덩짝만 한 밭과 엉성한 작은 우물이 있었다. 몇 해 귀양살이하면서 지낸 ʻ구운몽ʼ 김만중의 유배지다. 지지 고인 낙엽 쌓인 물에 서포의 얼굴이 일렁이며 나온다. 한참을 앉아 그를 그리워했다. 그의 글에 빠져들어 헤어나질 못한 적이 있다. 어쩜 그리 이쁘게 쓸까. 그런 세상이 있을까. 부러움으로 가득하다. 선녀들과 놀아난 구운몽 속을 거닐었다.
남해 상주로 넘어가기 전 바로 바싹 붙어있는 섬 중턱에 올라 우물을 보면서 서포 무덤도 둘러봤다. 고향으로 파 가고 없는 가묘에 올랐다. 좌우에 넝쿨 산딸기가 주렁주렁 달려 주섬주섬 따먹었다. 아름다운 남해이니 줄줄 써 내려가지 않았겠나.
대마등과 신자도 사이의 장자도에 우물을 파고 농사를 지은 사람 스멀스멀 생각이 난다. 지금은 어디에 살까. 더 큰 진우도에도 우물이 있었겠지. 우물 없는 곳에서 살 수 있나. 마음은 섬으로 달려간다.
순우분의 회화나무 등걸 꿈과 복사꽃 핀 곳을 찾아 헤맸다는 무릉도원 얘기며 예불 중 잠깐 졸았던 조신의 법당 꿈까지 한없이 좋다. 붕붕 떠다니는 구름 같은 아늑함이 스민다. 그런 곳이 있기나 했나. 저 앞 섬마을이 그런 곳이 아닐까.
비행장이 들어선다고 야단이던 건너편 가덕도 끝자락 외양포 구석진 곳에 우물이 몇 개 있다. 일본군이 파놓은 포병부대 진지이다. 그곳에서도 멍하니 들여다봤다. 하얗게 내 얼굴이 보였다. 왁자지껄하던 군인들은 다 어디 가고 없다. 포신이며 병기도 뜯겨나가고 빈터가 휑하니 남았다. 창고와 막사는 겨우 백 년 세월에 낡고 삭아서 땜질한 양철지붕과 비늘 판자벽이 여기저기 덧칠해 군데군데 남아있다.
“녹 슬은 두레박만 대롱대롱 매달렸다.”
“정유식을 찾아 나서자.”
한참 오래 지나서 연락이 될까.
“어디 사나 살아나 있을까.”
박 교장이 준 전화번호로 여러 번 걸었다. 서낙동강 끝자락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손짓하면 보일 진우도가 건너다보이는 가까운 곳이다. 내 사는 아파트 맞은편이다. 버스로 서너 정거장 거리이다. 강 건너이다.
아버지마저 돌아가자 의지할 곳 없이 길거리를 떠돌다 보육원으로 들어가 생활했다.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줬다. 친구들과 사귀며 열심히 배웠다. 그렇게 다니다가 그만 육이오전쟁이 터지자 갈팡질팡했다. 또 버려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운영하는 목사와 전도사, 선생님들이 트럭을 갖고 와 태웠다. 고향 해주에서 인천으로 내려왔다. 의지하던 목사와 전도사는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하곤 제주도로 떠났다.
이곳저곳의 보육원으로 나눠 수용되었다. 학년에 맞춰 학교에도 들어가 배웠다. 유식은 잘하진 못해도 중간은 따라갔다. 고마운 보육원이다. 먹이고 입히는가 하면 상급학교로도 가게 해줬다. 중학을 진학하기 위해 시험을 쳤다. 인천에서 제일가는 중학인데 합격할까. 조마조마했다. 나는 합격하고 반에서 성적 좋은 친구는 떨어졌다. 무엇을 비교해서 설명하라는 문제를 잘 푼 것 같다.
얼마 지나서 들뜨게 되었다. 대학을 보내주는 보육원이 있어 그곳을 가잔다. 여기는 오래 머물 수 없는가 보다. 때 되면 나가야 하니 천애 고아가 어디로 가나. 막막하니 의지할 데만 있으면 기대보려 한다.
“왜 그러는데.”
“부산 어느 고아원은 그렇게 해준데.”
“여경 선생님도 그곳 부원장으로 간다는 말이 있어.”
인천 여자 경찰이 운영하는 보육원이었다. 열한 명이 탈출하여 부산 진우도에 있는 보육원으로 갔다. 원생이 적어 시로부터 지원받기가 어려웠던 곳이 수월해졌다. 거기다 보내주는 원생들까지 생겨 많을 때는 일백 명이 넘었다. 여기서 박인국 선생을 만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태풍 때 견디라고 벽돌로 지은 기와집이었다.
“예가 천국이지.”
“날씨는 왜 이리 푸근하나.”
십여 채로 자고 먹고 공부하는 귀한 보금자리였다. 또 위험할 때 피신할 수 있도록 슬라브 2층도 세웠다. 저학년은 여기서 가르치고 고학년과 중학생은 통학 배편으로 가덕도 천가에 건너가서 배워왔다. 늦가을에 내려와서 중학교에 편입됐다. 계속 다니게 도와준다니 정말 그렇게 해 줄까. 기대가 크다. 무엇보다 따뜻해서 살기가 그저 그만이다.
“배 타고 건너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차 타고 인천 내려갈 때와 배로 가덕도에 들어가며 파도 가르는 게 좋다.”
이 어려움 속에 이게 어딘가. 거리를 헤매지 않아서 좋다. 추운 겨울이 닥치는데 어찌 지나겠나. 여기가 바로 아늑한 내 집이 아니고 뭐겠나. 따뜻한 남쪽이다. 정성껏 보살펴주는 선생님들이 한없이 고맙고 고맙다. 기독교에서 재단을 만들고 시와 유엔군, 외국 자선 기관, 각 종교 단체에서 돕는다. 식량, 빵, 과자 등 구호품이 넘쳐난다.
“맛있는 빵이다.”
“과자를 다 먹어보네.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녹아.”
여기도 문제가 생겨 원장이 바뀌었다. 그래도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따뜻한 손길이 간다. 먹이고 입히는 일이 간단하나. 거기다 가르치는 일도 쉽지 않다. 겨울 감기나 여름 장 탈이 나면 치료하고 약 먹여야 한다. 교사와 취사 세탁 일을 맡은 사람들의 급료도 나가야 했다. 도선비와 교육비 등 잡다한 것이 자질구레하게 많다.
“먹고 돌아서면 식사 때다.”
이것들을 쓰고도 남으니 문제가 생긴다. 세계 여러 나라와 각계의 넘치는 온정으로 넉넉한 살림인데도 줄여서 헐벗게 한 것이 밉살스러운 일이다. 전란 때 외국 종교와 자선가, 독지가들의 도움이 적극적이고 많았다. 더욱이 피 흘리며 공산군을 물리쳐준 유엔군이 감사하다. 우리 힘으로 어찌했겠나. 거리를 헤매고 굶주리다 죽을 수밖에 없다.
“어린이가 나라의 장래다.”
울부짖고 굶주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사진으로 나가자 그만 돕는 손길이 이어졌다.
해주에서 인천으로 다시 진우도 남녘으로 내려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닷가로만 내려왔나. 살아날 팔자이다. 그 콩 튀기듯 오르내리며 볶아치는 전란 속에 견딘 것이 천행이다. 보육원 아니면 내가 어디서 은신할 수 있겠나. 누가 날 거둬주었겠나. 가는 곳마다 알뜰한 보살핌으로 이 목숨이 질기게 살았다.
“고아원과 국민학교가 커다란 희망이다.”
목사의 주선으로 군용트럭을 타고 북한을 빠져나온 것과 종교 단체 시설인 진우도 보육원에 이른 것이다. 그저 감사함이 가득하다. 열심히 배우고 믿으며 살아간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들어가야 한다. 남구에 있는 공업고등학교에 시험을 봤다. 합격해서 다닐 수 있게 됐다. 학교 주위에 방을 구해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다.
“함께 하다가 혼자 누워 자고 밥을 지어 먹으니 꿈같다.”
모든 비용을 보육원에서 대 줬다. 아아 감사해라. 정말 계속 학업을 이룰 수 있어 더없이 기쁘다. 막막하기만 한 남한에서 이리 많은 도움으로 살아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배곯아 죽는 줄로만 알았다. 추운 겨울이 오면 온몸이 시려 감당을 못한다. 이래도 춥고 저래도 떨린다. 손을 호호 불고 비비며 양달에 웅크리고 지나야 한다.
“학교는 무슨 언감생심이지.”
“먹고 입히고 재워만 줘도 어딘데.”
몇 가지 기술 자격증을 땄다. 이제 사회에 나가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못 할 게 뭐 있나. 양정에 있는 창고에서 일했다. 의류를 보관했다가 때 되면 내다 넘기는 도매업이다. 수입품과 국내 제품을 구해 뒀다가 계절이 되면 매장으로 넣어주는 일이다. 속옷들이다. 엄준남 사장과 나 둘이서 하다가 은행에 넣고 가져오는 계산을 해야 하므로 서경혜 경리를 두었다.
“북적거리지 않고 오붓해서 좋다.”
의류 상자가 많을 때는 흔한 지게꾼과 달구지 일꾼들을 불렀다. 그래도 바쁠 땐 임시 사람을 썼다. 배달할 때 차에 실어서 거래처로 날라야 했다. 딸릴 땐 가지러 오지만 공장에도 모자랄 땐 일본제 수입품을 구해 넣어주기도 한다. 꽤 남는 장사였다. 잘 돼 바쁘게 창고에 들어왔다간 이내 나갔다. 불이 났다. 수지맞는 일이다.
“엄준남은 회장 나 정유식은 사장이다.”
너스레를 떨었다.
엄 사장은 함경도에서 백화점을 경영했다. 청년들이 죽창에 살생부를 들고 다녔다. 자본가와 일본 부역자들을 찾아 헤맸다. 거기에 이름이 올랐다. 그 등쌀을 피해 육이오 전에 탈출했다. 통통배를 준비해서 가족과 친척을 태우고 몸서리치는 고향을 등졌다. 보름 동안 내려왔다. 연료가 떨어져 포항에서 하룻밤 지낸 뒤 부산에 무사히 닿았다.
“엄산옥 선생도 함께 그 배를 탔다.”
월남한 사람들은 교육열이 대단하다. 잘 나가는 장사를 접고 학원을 경영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서구와 중구 사이의 중·고등학교가 부실해 어려움을 겪자 재단 이사로 들어갔다. 부지를 사들여 넓히고 교실을 더 지은 뒤 비 새고 찬 바람 들어오는 곳을 정비했다. 다시 이사장의 자리에 올라 학교를 가꿔 나갔다. 배우지 못한 한을 이렇게 풀었다.
전쟁통에 남쪽 부산으로 밀려 내려온 피란민들 속에서 선생과 학생들이 만나 임시학교를 곳곳에 세웠다. 보수동 길가에 생선 몇 마리를 놓고 팔다가
“차 교장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여학생들을 만났다. 미술 이 선생과 터를 찾아 여러 날 헤맨 끝에 복병산 중턱 언덕바지 자락에 한 자리 잡았다. 살기 어려운 북적거리는 속에서도 천막 학교를 세워 간판 걸고 교육을 해나갔다. 잠자고 먹고 사는 것이 당장 어려운데 대단한 일이다.
눈이 내리면 찌그러지고 바람 불면 날아가 형편없는 시설이다. 의자도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 무릎을 책상으로 썼다. 더울 땐 떡갈나무 그늘 밑이 교실이었다.
“장용학 선생의 함경도 사투리 흉내가 재밌었다.”
국어와 한문을 담당했는데 책이 없어 신문 사설을 잘라 와 가르쳤다. 한 자가 넘는 눈에 묻혀 짓눌린 천막 교실을 보고 깔깔 웃었다. 세울 생각은 뒷전이고 눈 싸움질이다.
보수동 낮은 지역은 자리가 없다. 벌써 다른 학교가 차지해 수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아산」에서 남항을 내려다보며 공부했으니 가관이다. 뿔뿔이 흩어졌던 교사와 학생들이 다시 만나 기쁨의 재회로 모두 열의가 있었다. 많을 땐 수백 명이나 됐다. 전쟁이 끝나자 3년간 정들었던 교정을 두고 가을에 모두 서울로 올라갔다.
“잘 있어.”
뒤돌아보며 떠났다.
피난 여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엄 사장을 따라 학교에도 여러 번 올라갔다. 이제 나는 하릴없어 진우도로 들어갔다. 고등학교를 다닌 것과 실습을 잘한 것들이 자랑이었다. 어딜 내놔도 살아갈 자신이 생긴 모습에 다들 부러워했다. 인천서 내려온 여경은 사정이 여의치 않았는가 다른 곳으로 갔다. 같이 온 친구들은 모두 잘 있었다. 우리의 보금자릴 잘 다듬자.
“형아야”
부르며 따르는 원생들에게 내가 앞장서서 일하고 다독여야 했다. 교실 주위와 다니는 길에 꽃나무를 심고 풀꽃을 가꾸자. 긴 섬에 갈대와 억새 풀만 무성한데 상록수 소나무를 심어서 겨울에도 푸르게 하자. 고향 생각과 보고픈 부모 형제, 친구들이 그립다. 조용할 때면 떠올라 멍할 때가 있다. 이를 부지런을 피우며 눌러나가야 한다. 그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친구와 동생들에게 잊도록 도와주고 다가가야 한다. 가끔 도망하는 일이 생겨 걱정이다. 여기보다 좋은 데가 어딨다고.
올 때 용원에서 배 타고 건너 가덕도로 다시 진우도를 들어온다. 섬들이어서 나가기 어렵다. 그래도 가는 길이 있다. 바닷물이 빠지면 바닥 펄이 드러나는데 질퍽한 데를 밟고 건넜다. 어디 소리가 들려서 보면 몸이 잠겨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잘못 늪지대로 가면 그렇게 된다. 양발이 자꾸 들어가 꼼짝없이 갇힌다. 데려와 야단을 치고 벌서야 한다. 완장 찬 나이 든 형들이 질서를 지켜나간다.
규율부를 만들어 질펀하게 지나지 못하도록 엄격함을 보여줬다. 형들이 앞장서 이곳에 있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줘야 한다. 서로 싸우기도 한다. 약한 자는 맞아 피탈이 나고 구석에 앉아 슬피 우는 게 안 됐다. 방에 데려와 보듬고 위로해 준다. 빵과 달콤한 과자를 먹이면 금새 밝아져 언제 그랬나 뛰어다녔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ʻ행복합니다ʼ를 마음속으로 외치도록 일렀다.
섬이지만 높은 곳도 있는데 산이라 불렀다. 나무도 하고 나물도 캤다. 길쭉해서 저 서쪽 가덕도 가까운 곳까지 이어졌다. 신자도가 건너다뵈는 펀펀한 곳 동쪽에 자리 잡았다. 배 들어와 내리고 탈 수 있는 푹 파진 머물 곳이 있다. 신기하게 살기 좋도록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이웃은 없어도 배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어서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기 좋다.
“여긴 섬나라.”
“눈 서리 안 내리는 따뜻한 남쪽 지방.”
무더운 여름날은 백사장에 나가 철벅거리며 수영을 즐긴다. 파도가 세어 깊은 데 들어가지 않도록 보살피고 수영하는 걸 가르쳐준다. 개헤엄을 하는 친구도 있다. 물에 뜨는 게 중요하다. 눈을 꽂고 지나야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모래사장은 길어서 맘껏 뜀박질하고 뒹굴며 놀 수 있는 한없이 즐거운 곳이다.
“접영은 나비처럼.”
“배영은 누워서 머리 들고 발과 팔로 젓기.”
“쉬운 개헤엄은 양팔로 번갈아 끌어당겨 젓고 두 발을 차올려야 한다.”
공고생 때 해운대 해수욕장 여름 학교에서 배운 걸 가르쳐줬다. 신자도에 건너가 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들이다. 진우도보다 더 길다. 다대포가 보인다. 장자도가 가까이 붙어있고 대마등도 나무가 자라 둥글게 보인다. 진우도와 맞닿을 듯 가까이 있어 건너다보이는 곳에 백사장이 길다. 미친 듯 뛰어다니며 소리친다. 저편에서도 듣고 친구들이 달려와 맞장구친다. 소리치고 흔들며 야단이다. 헤엄쳐 건너려는 아이도 있다. 오지 못하게 팔을 휘저었다.
물살이 세다. 갇힌 강물이 바다로 흘러나가고 밀물 땐 바닷물이 넘실대며 들어온다. 너무 좋은 하얀 모래사장이다. 그런데 위태하다. 물살에 휩쓸릴 수 있다. 좀 밖으로 나가면 깊다. 여기서도 사고가 났고 도망가려던 아이들이 개펄에 빠져 허우적대다 물이 들어오면서 기진해 목숨을 잃는 일이 생겼다.
반달 조금 때 물이 많이 나간다. 이때를 기다렸다가 몇이 달아난다. 한밤중이니 다 잠든 사이여서 아침이 되어야 알게 된다. 빠지는 곳을 피해 잘 나간 아이도 있지만 어려움을 당한 아이도 있다. 그들의 무덤이 멀지 않는 곳 언덕에 있다. 발버둥 치며 살아볼 거라 여기까지 왔다가 이 모양이 됐다. 나는 봄꽃이 피면 무덤을 찾아 앞에 한 묶음씩 놔 준다.
형아! 형아! 하고 따르던 게 쟁쟁하고 눈에 선하다.
“물살 센데, 깊은 곳에 가지 말라 했잖나.”
“여기가 어때서 달아났나 이넘들아.”
풀을 뽑아주고 어루만졌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여름이 지나고 조금씩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분다 아침저녁으로. 섬의 풀들도 갈잎으로 변해가는 때이다. 추석이 다가와 모두 들뜬 세상인데 여긴 갈데없는 신세이다. 출렁출렁 파도가 일고 빗줄기가 굵어진다. 구름이 몰려오며 어슴푸레한 날이 음산하다.
“태풍이 온다며.”
“이리 조용한데 뭐가 오겠나.”
“저 멀리 하얗게 까치놀이 보여.”
도란도란 얘길 나누는 아이들에다 형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수다를 떨고 아양 부리는가 하면 떼를 쓰는 아이도 있다. 낮에 날 끼우지 않고 제기차기와 범 구멍 넣기를 했다며 앙앙거린다. 깜박 잊고 도시락을 책상에 두고 온 아이는 내일 어쩌면 좋아 걱정이다. 한 아이는 필통을 두고 그냥 왔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내일은 배가 안 다닌다.”
“추석이다.”
“물이 넘쳐 들어와요.”
한 아이가 소리쳤다. 마당에 넘실대며 들락거린다. 바람도 꽤 인다. 구름이 점점 쏟아질 듯 무겁게 내리누른다. 조금씩 오던 비도 세차다. 굵어져 ʻ후두둑ʼ 소리가 들린다. 나뭇가지가 펄럭이듯 흔들렸다.
“괜찮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가.”
나는 안심시키려 말했다. 태풍 올 때마다 마당에 넘쳤기 때문이다. 바닷가여서 바람은 거침없이 분다.
좀 낮은 집에선 야단났다. 뛰어나와 다른 집 처마로 들어가면서 소리친다.
“파도가 부엌으로 들어와요.”
박 선생이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뛴다.
“빨리 높은 방으로 가라.”
막 소리 질렀다. 놀라 튀어나온 선생들이 서둘러 대피시킨다. 나도 높은 곳으로 안내하며 도왔다. 얼떨떨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가끔 낮은 곳에 물이 들어와도 이리 많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보름과 그믐 사리 때 불어도 조금 올라오지 여기까지 넘친 것을 보지 못했다. 비바람도 거칠다. 내일이 추석인데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지나려는데---.
“심상찮네.”
“마구 넘실댄다.”
엉엉 울며 책가방과 옷이 있단다. 아랫방에 두고 몸만 빠져나와 다시 가려니 물속에 반이나 잠겨 어찌해 볼 수 없다. 달래며 들어가려 해도 파도가 세차게 들이닥쳐 어렵다. 지붕이 ʻ지직지직ʼ 거리며 기왓장이 ʻ휘뜩휘뜩ʼ 뒤집혀 바람에 날아간다. 진흙과 서까래가 나오고 확 밀려올 땐 집 안에 있는 것들이 둘둘 말려 파도 위로 휩쓸려 올라왔다간 가라앉으며 흩어졌다.
“저거 내 공이---.”
“교복 바지야 건져 도.”
들어가려 해도 이내 비바람이 몰아쳐 얼씬하기 힘들다. 위에 있는 집들에도 물이 들어온다. 박인국 선생과 식당 일하는 분들이 2층으로 올라가란다. 언제 위로 갔는지 손짓하며 빨리 오라는 친구도 있다. 혹시 방에 남아있는 원생이 있나 다니면서 살폈다. ʻ와장창ʼ 창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와 갈대가 ʻ내 죽네ʼ 하며 찢어지게 흔들린다.
“저런- 집들이 잠겼다.”
“언덕 넘어 쓸려가네.”
ʻ우수수ʼ 기와 부딪는 소리와 아이들 울부짖는 게 비바람에 섞여 진동한다. 때리듯 바람이 몰아친다. 급히 나오느라 속옷 바람 차림의 아이와 더께더께 겨울옷까지 걸쳐 입고 나온 아이도 있다. 아랫집에서 올라온 원생들은 있다가 들어가려나 하고 몸만 나왔는데 저리 집이 부서져 내려 흩어지는 걸 눈으로 본다.
“점점 심하네.”
“우리 살 수 있나.”
“이대로 죽겠구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찾아오니 불안하다. 저 건넛마을 불빛만 비바람에 희미하게 껌벅인다. 잠자던 집과 식당이 무너졌다. 배우던 교실과 잠자는 집도 커다란 파도가 삼켜 엎어지고 자빠져 막 떠내려간다. 가재도구와 옷가지는 제멋대로 나뒹굴고 퍽석 깨지는 옹기 단지와 그릇 소리가 ʻ쨍그랑 짜그랑ʼ 난다.
“어실어실 추워라.”
“배고프다.”
내일 먹을 맛있는 음식이 모두 파도 속으로 쓸려갔다. 젖었던 옷이 몸 열에 마를 사이 없이 들이치는 비에 또 젖는다. 몇 시간을 불안에 떨고 울며 지나다 이젠 정말 추워서 견디기 어렵다. 온몸이 덜덜거린다. 이가 딱딱 부딪친다. 선생들과 형들이 서로 안고 어린 원생들을 보듬어서 기댄 채였다. 몰아치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샌다. 2층까지 물보라가 튄다.
“우리 이제 어쩌나.”
“천지가 물로 넘실대네. 여기까지 오르면 어찌해.”
긴 섬도 간 곳이 없다. 언제 이렇게 물바다가 됐나. 온 세상이 흥건하다. 앞도 뒤도 전부 물뿐이다. 손전등 비칠 때마다 넘실대는 거센 파도와 물보라가 사방으로 출렁인다. 산더미 같은 물결이 몰아쳐 등줄기를 후려갈긴다. 온천지가 넘치는 물바다다. 정신이 좀 드는가. 누구 있나. 어디 있나 하면서 출석 점호이다. 그래도 박 선생이 내 이름을 자주 불러 본다. 있는가 확인한다.
“날은 언제 새나.”
“2층이 무너지려 한다.”
무슨 밤이 이리 길까. 태풍 땐 시간이 안 가는 것 같다. 더디기만 하다. 심하게 비바람이 길게 이어질 땐 집이 흔들린다. 옹기종기 구겨 앉아서 무거운가. 휘청거리는 것 같다. 훌쩍거리며 우는 아이들이 있다. 두고 나온 것 중에 필요한 것이 있는가. 자꾸 내 것은 내 것은 한다. 밤새도록 혼났다. 죽을 고생을 겪었다. 조금씩 밝아온다. 비바람이 멎어간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술렁이던 엄청난 물바다가 가라앉고 등성이 드러난다. 나무는 뽑혀 뒤집히고 갈대는 쓰러져 누웠다. 흩어진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가라앉아 널브러졌다.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가르치고 배우던 흑판과 책걸상들이 일그러져 나뒹군다. 밥 먹던 식탁과 의자들이 물속에 들락날락 떴다 가라앉았다 한다. 이불과 옷가지들이 춤을 추며 떠다녔다.
“아침을 어찌 먹을거나.”
장독대와 식량창고며 부식 곳간도 으깨지고 무너져 흔적 없이 쓸려갔다. 밥을 짓던 가마솥들이 펄에 내동댕이쳐 박혔다. 곡식 자루가 구르다 터져 낱알들이 희끗희끗 보이는 게 죄스럽다. 날아간 집들과 교실을 보며 천지개벽한 모습에 휘둥그레 내려다보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선생과 형들은 작은 원생들을 하나둘씩 부둥켜안고 말없이 멀뚱멀뚱 쳐다보며 숨 쉬고 있다.
“사라호가 지나갔대.”
찍찍거리는 라디오를 갖고 있었는가 소리가 들린다. 먼동이 트고 확연히 드러난 주위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났다. 타고 다니던 배도 어디로 가고 없다. 우리를 구해 줄 사람은 언제 오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기나 하나. 목포에서 강릉 쪽으로 지나 동해로 빠져나갔단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마구 할퀴고 삼키며 밟고 갔다. 익어가던 과일은 떨어지고 논밭의 곡식은 ʻ내 죽네ʼ 드러눕고 말았다.
“추석날 이게 뭔가.”
수십 년 아름드리 밤나무가 통째로 부러져 나가떨어졌다. 그리 바람이 거세었다는 소식을 들으며 하나둘 내려가 남은 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세월은 흘러 산수를 넘긴 정유식이다. 서면 쪽 교회로 옮겨 은신하다가 진영으로 갔다. 해주에서 인천으로 다시 부산 진우도에 왔다가 낯선 곳으로 가 머물게 됐다.
한쪽 눈은 눈물이 자꾸 나와 반창고를 붙였고 볼은 터져 붕대를 댔다. 발음이 정확지 않아 듣는 데 애를 먹었다. 집 앞 농협 2층 한의원에서 침을 맞기 위해 기다리는 중에 만났다. 몸은 성한 데가 없어 곳곳이 아프단다. 서구의 대학병원을 자주 다니고 치료하며 마을에선 침도 맞는다. 아픈 몸을 겨우 지탱하며 힘들게 살아가는데 얼마나 견디겠나. 마실 두유를 꽂아 주었더니 입힘이 없어 빨대를 댕길 수 없단다.
그를 만나 들은 얘기가 버릴 게 없는 모두 귀한 역사이다. 이제 바라뵈는 창밖 진우도가 조금 선명하게 보인다. 폐허가 된 교실과 목숨을 구했던 2층을 올라가 보자.
건너 가덕도 연대봉에 얹힌 동그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