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
8월 11일 토요일 대구의 병원에 치료를 받고 난 후 가창의 유명한 우리밀 손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난 후 청도에 있는 운문사를 들렀습니다..구불구불 국도 지방도를 따라서 청도 운문사에 들르니 아주 아늑한 곳에 사찰이 웅장하게 나타났습니다...
맨날 말로만 듣던 운문사로 늘 가보지 못함에 아쉬움을 가졌어 처음으로 갔다 온 운문사인데 가보길 참 잘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문사의 내력을 잠시 들러보면 운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서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신승(神僧)이 창건한 절로 608년(진평왕 30)에는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이 절에는 특이하게도 대웅전이 두군데 있어 의아해 했었는데 오래된 대웅전이 오히려 더 웅장해 보였습니다...운문사내에는 조계종 운문승가대학이 설치되어 많은 비구니들의 교육과 연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운문사는 앉음새가 특이했는데 모든 건물이 돌아앉았습니다. 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산을 바라보며 등을 내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산세에 따르다 보니 모든 건물을 북향으로 앉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운문사의 두시;모습부터 보게 되는데 이는 풍수적으로 풀면 호거산을 마주할 때 생기는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 이랍니다..
호거산이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운문사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고 또 북향하면 골짜기의 물이 흘러가는 지켜보게 되어 재화나 부와는 인연이 멜게 된다고 합니다...
풍수에서 물은 곧 재화를 뜻하니 항상 물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인다면 낭패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향한 집이 살기 좋은 것은 일반화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디.
지금부터는 제가 운문사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어서 다른 곳에서 써놓은 자료를 이리로 옴겨 적어 보았습니다
『삼국유사』는 그 전설적인 애기를 이렇게 전한다. 그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로 서해를 건너자니 용왕이 그를 용궁으로 청하여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주면서 그의 아들 이목을 데리고 가 작갑에 절을 지으라고 당부했다. 보양스님이 절을 세우려고 북쪽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니 산 아래 5층 황탑이 보였다.
그래서 내려와 찾아보았는데 아무 흔적도 없었다.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까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다. 그러자 용왕이 ‘작갑’, 곧 ‘까치곶’이라 한 말이 떠올랐다. 다시 내려와 그곳을 파 보니 무수한 벽돌이 묻혀 있었고, 마침내 그 벽돌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은 게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작갑사라 하였다.
태조 왕건이 산적의 무리를 쉽게 제압 할 수 있는 묘책을 일러줌으로써 인연을 맺은 왕건이 보양스님이 세운 작갑사에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서 부치도록 했으며, 태조20년(937)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다.
운문사는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다. 절 동쪽으로 길게 이어진 담장의 중간쯤, 범종이 걸린 이층누각의 아래가 정문이며 첫문이자 마지막문이 된다. 문을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이 절의 서쪽을 감돌아 흐르는 계곡, 약야계까지 그대로 이러진다.
그 길의 오른편에 새로 지은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비로전, 만세루, 그밖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왼편의로는 2기의 석탑과 오백전, 작압전, 관음전, 기타 몇 채의 전각이 나란하다. 운문사의 예배공간과 신앙공간이다. 그 나머지 건물군은 일상생활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생활공간과 수행공간이다.
이밖에도 운문사는 해마다 봄 가을로 막걸리를 열두 말씩 받아 마시며 청청하게 자라는 천연기념물 제180호 처진 소나무, 비로전 꽃살문보다 더 아름다운 꽃살문을 안팎으로 달고 있는 금다, 500의 나한상이 빼곡한 오백전 등 볼거리가 더 있지만 이목소의 설화를 넘지는 못한다.
이목은 늘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보양스님의 법화를 남모르게 도왔다. 어느 해 날이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들이 모두 타들어가자 스님이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해 흡족히 해갈되었다.
그러자 천제가 하늘의 일을 함부로 가로챈 이목을 죽이려 하였다. 이목이 스님에게 위급을 고하니 스님은 이목을 침상 밑에 숨겨주었다. 뒤이어 하늘의 사자가 뜰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했다.
스님이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이라고 하니 하늘의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배나무가 시들시들 죽어가게 되었으나 이목이 어루만지자 금세 소생했다.
『삼국유사』「보양이목」에 나오는 얘기다.
이목이 보양스님이 용궁에서 데리고 온 용왕의 아들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오백전 뒤편 극락교 아래에 맑은 물이 고였다 흐르는 깊은 곳이 설화 속의 이목이 살았다는 이목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