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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시인세계> 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나들목 외 4편
장 인 수
나들목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샛길로 빠지고 싶은 유혹은 너무 크다
대전행을 잊고 그만 일죽 나들목으로 휭! 빨려들어가
홀린 듯 칠장사로 가고 있었다
칠장사 거의 다 가서 길 오른편
단지 빨간 함석 지붕으로 오르는 능소화 넝쿨 때문에
남의 집을 훔쳐보았다
주인도 없이 외양간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목에 걸린 종소리 땡그랑 울리며
암소의 엉덩이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콧등에는 왕방울 땀송이가 소복소복
잠시 후 쿵!
송아지가 지상에 첫도장을 찍었다
돼지머리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가마솥이 마당에서 끓고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이놈 삶은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고 있다
소주 한 잔 벌컥 들이켜며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캬! 죽을 때는 요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접시마다 귀도 웃고 코도 웃고 눈도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껄껄껄 돼지 웃음을 먹고 있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산다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너무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포도알은 아내의 손가락에 매달리고
어느새 넝쿨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덮는다
아내의 봉긋한 가슴은 시큼한 포도가 된다
자궁 속에는 아직 덜 익은
청포도가 자라고 있다
탄 천
신도시 분당 사람들이 나와서 뛰고 걷는다
건강을 위해 분주하게 뛰거나 걷는다
애완견들도 열심히 뛴다
불야성을 이루며 자정이 넘도록 분주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 보기 힘들다
자갈밭에 서 있는 해오라기만
골똘히 강을 잊고 사색에 잠긴 표정이다
세상을 뜬 듯 부동자세인
해오라기 너만이
마음과 영혼에 군살이 없으리라
공 범
순찰차가 아파트를 순회하고 있다
응급차가 조용히 머물다가
시신을 거두어 갔다
주민들은 동요하지도 않았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수사관은
주민 몇 명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등록증이 여섯 조각 나 있었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수사해야죠
세상 모든 곳이 범죄 현장입니다
흉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낙엽 떨어지듯 그렇게 추락한 걸까요
아닙니다 누군가 밀었습니다
주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기자 왔나요? 보도 안 되죠?
반장 아줌마는 냉정하게 물었다
모두들 소문을 막기로 했다
당선소감
꼭 해보고 싶던 소원 한 가지
장인수
1968년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에서 나고 자람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충남 당진군 호서고등학교, 서울 강남구 일원동 중산고등학교 교사
2001년 한국교원문학상 수상(교총 주관)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재학중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 이매촌 진흥아파트 809동 303호
문학 수업을 하면서 꼭 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인을 직접 만나 그분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 소리내어 마셔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면 술자리에서 그런 큰 시인과 대판 인생 얘기를 주고받았다는 둥, 어깨동무를 해봤다는 둥 허세를 떨면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문학을 좀더 폼나게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진짜로 그런 기회가 나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인가! 황동규, 김종해, 김승희 이런 큰 시인들이 내 작품을 읽고 신인상 당선작으로 뽑아 주시다니! 세상에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내가 시인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내 나이 30대 중반, 혹 늦깎이는 아닐까. 그래서 감수성이 무디어진 것은 아닐까. 자괴감이 앞선다. 과연 내가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늘 배우는 자세로 시를 쓰겠다고 다짐해 본다. 늘 불치하문不恥下問의 자세로 시를 쓰고 싶다.
기존의 시들이 산, 강, 바다 등을 많이 노래했다. 그러나 넓은 들판을 노래한 시는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나의 아버지는 들판에서 평생을 사셨다. 나 또한 들판을 뻔질나게 쏘다녔다. 땅을 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들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산에는 정상이 있지만 들판에는 정상이 없다. 들판은 시작도 끝도 없다. 단지 들판으로 걸어 들어가 들판을 통과하는 몸짓만 있을 뿐이다. 들판에는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길이 있을 것 같다. 그런 자세로 시인의 길을 가고 싶다.
다시 한 번 심사위원들과 《시인세계》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학창시절 저에게 시심詩心이 있음을 일깨워 주신 오탁번, 이남호, 정진규, 유성호 은사님, 내 습작시를 여러 번 지도해 준 젊은 시인 윤성택님께도 감사드린다.
심사평
앞날의 시인들
황 동 규 | 시인
‘빗장 걸린 입 하나 쓸쓸히 서 있다’(「폐문」 제1행)처럼 김재운의 시는 때로 놀라운 이미지를 보여준다. 거의 모든 시행마다 메타포나 의인화 표현이 들어 있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다 강조되는 음악처럼 지나친 수사학적 비유 장치는 시의 초점을 흐리게 한다. 게다가 「산복도로」 「제3부두 근처」 「폐문」 「빈집」 등 제목이 보여주듯이 회색 일변도의 색채도 긴장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언어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얼마 안 가 독특한 시인 하나가 새로 탄생할 것 같다.
장혜승의 작품은 소재를 다루는 재주도 정열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전태련의 작품에는 맑음이 있으나 필요없는 감상이 비집고 들어와 시를 평범하게 만들곤 한다. 이 두 사람 모두 앞날의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장인수는 언어를 다루는 노련한 솜씨와 냉정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묶어 보낸 작품 11편 어디에도 군살이 없다. 그러나 호흡이 좀 짧아 시를 모두 소품으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게 만든다. 길이가 짧다는 뜻이 아니다. 4행시에 긴 호흡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포도를 임신한 여자」 「돼지머리」 「나들목」에서처럼 ‘신선한’ 생각의 얼개가 마음을 끌고 놓지 않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호흡에 대해 걱정했으나 쉽게 숨쉬는 법을 바꾸려 말고 지금 현재 자기가 획득한 것을 계속 밀고 나가기 바란다. 끈질김이 길을 새로 뚫을 것이다. 타자들이 부산히 걷고 뛰고 있을 때 “세상을 뜬 듯 부동자세인/해오라기 너만이/마음과 영혼에 군살이 없으리라”(「탄천」 마지막 3행).
간결하고 경쾌한 시의 보법
김 종 해 | 시인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 사람의 작품 가운데 전태련의 「별」(외 14편), 장혜승의 「십자수 뜨다」(외 9편), 김재운의 「산복도로」(외 10편), 장인수의 「나들목」(외 10편)을 주목하여 읽었다. 신인으로서의 당당함과 당돌함, 기성시인의 화법이 아닌 새로운 엇박자의 자기화법, 자기만 만들어 낼 수 있는 목소리와 컬러, 이런 것을 기대하고 최종심에 남은 네 사람의 작품에 주목하였다.
각자 일정한 수준치와 함량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단계의 평이함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시 형식을 빌린 ‘시 같은 시’보다, 좀더 낯선 시, 시의 몸속에 피가 흐르는 ‘살아 있는 시’, ‘생동하는 시’를 쓰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같은 선자의 생각에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신인이 장인수의 「돼지머리」(외 10편)였다. 장인수의 작품들은 모두 화법이 독특하고, 쉽고, 간결하고, 경쾌하다. 주제가 뚜렷하고 주제를 표현하는 사물과 존재 이미지의 복사기법이 노련하다. 하나의 사물, 삶의 미세한 부분을 적시해내는 듯하면서도 삶과 존재의 가장 중요한 여러 부분을 부담없이 환기시킨다. 시를 읽는 즐거움과 재미를 깨닫게 한다.
동네 어른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갔다면, 그래서 시인이 시를 썼다면 죽음에 대한 추모와 망자에 대한 애도가 우선이겠지만 이 신인의 시각은 그렇지 않다.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어서 소주와 함께 돼지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집의 슬픈 분위기는 그림자처럼 이 시의 뒷전에서 페이소스로 남아 있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도 시적 성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는 시, 환상과 신비가 담겨 있는 시, ‘포도’라는 어줍지 않은 작은 자연 속에서 끌어낸 또다른 상상력이 시로 그려져 있다.
새로운 시인 장인수의 등장을 축하하며, 그의 색다른 시의 보법에 기대를 건다.
은유의 힘과 변용의 싱싱함
김 승 희 | 시인
예심을 통과해 넘어온 시들을 읽으며 심사자는 아주 잘 차려진 조촐한 밥상들을 연상했다. 조촐한 밥상이란 유능한 요리사가 이모저모 잘 설계한, 맛과 안정감과 칼로리의 균형감각을 갖춘 밥상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逆으로 말해본다면 신인다운 역량과 패기가 분출되지 않고 머뭇대는, 덜 터진, 뜨거운 ‘마그마의 부족 현상’을 가진 평이한 밥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좀더 강렬한 무엇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전기가 좀 강하게 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인 응모작들을 읽는 버릇이 있다. 현실에 대한 오만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 자기만의 목소리, 전압이 높은 위험한 비유, 새로운 철학을 배경에 깔고 낯설게 튕겨져 나오는 언어의 힘― 이런 것들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인에게 그러한 미학적 위험과 용기의 과잉을 원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대 이름은 ‘신인新人’이니까.
신인들은 좀더 독특하고 위험해질 필요가 있다. 독특한 언어, 위험한 정신, 첨예한 갈등, 독특한 충돌― 이런 것들을 양 날개에 적재하고 위험하게 좀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어디로 뛰어드느냐고? 체험 속으로, 언어 속으로, 언어 속의 음악 속으로, 현실을 보는 시각의 개성 속으로 좀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즉 백 번의 안타보다는 한 번의 홈런을 갈구하는 그런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범속한 감동을 백 번 주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체험에 대해 쓰더라도 체험의 그라운드를 아슬아슬 넘어가는 심미적 쾌감의 언어가 터져야 한다. 심미적 쾌감이라 해도 그것은 지성과 감성에 함께 맞닿아 있어야만 생겨날 수 있는 혼합의 울림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의 시인은 감성과 더불어 탄탄한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시각에서 나는 장인수의 「포도를 임신한 여자」, 「공범」, 「나들목」, 「탄천」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 소품적이라는 지적도 있었으나 그 소품성이 포괄하는 영역이 결코 소품적이지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여 당선작으로 오르게 되었다. 특히 「공범」에서는 현대 사회의 모순과 생리를 직시하는 시각이 날카롭고 탄탄하다. 현대인의 생리를 일방적인 도덕적 비판으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은연함으로 보여주면서 독자에게 “어때, 당신도 그렇지 않아?”라고 끌어들이는 공감의 묘미를 가진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도 작지만 상상력과 은유의 힘이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아내는 시인의 상상력과 은유에 의해 몸의 외부와 내부에 포도를 장착한 ‘포도 여인’으로 변형된다. 현실의 순식간적인 변용이 싱싱하다.
「나들목」에서 암소의 분만을 “잠시 후 쿵!/송아지가 지상에 첫 도장을 찍었다”라고 표현한 대목도 이 시인의 은유적 역량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소품적인 듯 보이지만 은유적 역량에 의해 함의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장인수의 재능이 아닌가 생각한다. 축하를 보내며 자신의 개성과 더불어 대성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