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링 (외 1편)
박 정 보
무지갯빛 잉크가 잉어처럼 헤엄친다
안을 수 없는 몸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맴돈다
물위를 걸어간 초서草書의 길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빛나는 우연의 한 순간을 잡아채려고
촘촘한 백지의 그물을 들고 길목을 지킨다
눈부신 뭉게구름 푸른 하늘에 올이 풀리 듯
맴도는 저 잉크들 점성의 끈을 풀기 전에
백지 뭍에 누이고자 한다
빛깔과 빛깔이 만나고 스쳐가는 길이다
겹겹의 등고선이 그려지고 무너지는
미로의 저 소용돌이
꽃무늬와 얼룩의 경계선이 출렁일 때마다
빙빙, 어지럽게 돌기만 하다가
반짝 빛나는 한 순간이 유성처럼 스쳐가고
물위에서 만나고 묽어져 가는 무늬들……
뭍으로 오르지 못한 얼룩의 알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 포옹을 한다
*마블링(marbling) : 물과 유성물감을 이용하여 종이나 헝겊에
아름다운 무늬를 얻는 미술 기법의 한 가지.
백미러
앙상한 뼈대가 돌아보는 거울을 쥐고 있다
핸들을 잃어버린 시간들이 죄다 묶인 문서
길 위의 속도에서 화살이 빠져나간 순간
불수不隨의 속력은,
비포장 외진 길모퉁이에 유기됐다
충혈된 전조등은 소실점까지
화살의 꼬리를 좇아간 후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바퀴에 머물던 바람도 슬슬 집을 나서자
곧 이어 길을 잃은 빗물들이 우르르
괄약이 느슨해진 창문으로 들어섰다
길 위에 고인 물을 마시며
미분微粉 되어가는 제 살의 옷을 한 겹씩 벗는 동안
다 태우지 못하고 식어가는 심장은 조만간 정지될 것이고
온갖 염증이 우글대는 혈관들이 먼저 문을 닫을 것이다
통증은 최후의 하나가 작동될 때까지 작동되었고
그것들이 흘린 신음은 부록의 문장이다
검은 문신처럼 지우기 힘든 그리움이
지순한 문장으로 퇴고 된 반세기……
지나가던 햇살이 반짝, 거울 속 문장을 흔들면
가끔 뒤척이거나 돌아눕는 지난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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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보 : 대구 출생, 2013년 [시선]으로 등단, 시집 아버지가 있음.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문협, 삼척문협, 삼척두타문학 회원으로 활동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