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선지 양산속엔 바람이 불었다. 그늘속도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맞은편에서 젊은 여자가 털 복숭이를 안고 오고 있었다. 눈살이 찌쁘려지고 속으로 욕설을 내밷었다. 그리고 웃었다. 누가 더 미친년인지 모르겠다고. 왕복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는 도서관엘 다녀오는 길이다. 이 더운날, 누가 부탁을 한다거나 시켰으면 가능했을까. 절대 아니다. 소설 나부랭이를 빌릴려고 이 더위속을 다녀오는 늙은 나나, 털 복숭이를 켜안고 산책을 나온 젊은 년이나, 한심하기는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정말 나는 이대로 시간을 쓸대가 없는 존제로 끝나는 것일까. 집 청소를 말끔히 하거나 맛난 반찬을 만드는게 더 효율적일텐데, 그런 생각을 무수히 해본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빈둥데며 나의 일상을 즐기고 있다. 아니, 즐기는게 아니라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참 친절하고 부드럽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택배 아저씨의 수고가 아름답게 보이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할수있는 일이 없다. 그래서 수고하는 모든분들과 마주칠때면 그분들을 축복한다. 저분들의 수고와 땀이 좋은 결실을 맺개하여 주시길!하고. 잘 걷지 못하는 어른들을 보면, 나는 저기까지 가지않게 하여주시길, 그리고 마즈막 순간까지 건강하게 하여주시길 축복한다. 재앙이라고 할수밖에 없을만끔 더웠던 이 여름도 드디어 가고있나보다. 매미소리가 멀어지고 귀뜨라미 소리가 가까운걸 보면 그렇다. 그 귀뜨라미 소리마저 지처있는 걸 보면 이 여름이 덥긴 더웠나 보다. 내년에는 더 덥단다. 아마도 우리 생전에는 가장 시원한 여름이 이번 여름이 될거라는 불길한 예보도 있다. 주님, 그럼에도 견디어내야 합니까. 할일이 다 끝낫고, 숙제도 했다. 가방도 거이 다 쌌다. 이제 가보라는 한마디만 있으면 된다. 그 한마디가 왜 이처럼 더딜까. 그만 집에 가라는 한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허영심으로 가득찬 지난날들이 부끄럽고 못난 내모습이 감추고 싶다. 이제와서 다시 뭘 할수있는 것도 아니다. 비겁할수는 있지만 어서 어서 이자리를 떠나는게 최선이다. 뭐하려고 여기에 왔을까. 남의 성공에 침 흘리려고? 내것이 아닌 부귀영화를 힐끔거려서 어떻하려고? 가까히 구경도 해본일이 없다. 나는 발치 근처에도 이르러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판타지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속엔 다 있으니까. 그속엔 다 있으니까. 하나님은 실패가 없으시다니까, 어쩌면 내 인생도 실패는 아닐지 모른다. 그렇게 위로하면서 오늘 하루도 살아보자. 나를 위해서 꽈배기를 샀다. 어제는 옥수수도 샀다. 아들은 늘 좋은것으로 사서 아이들에게 준다. 나는 늘 싼것을 산다. 그 차이는 뭘까. 아들이 경제능력이 있어서? 아님 아이들을 더 사랑해서? 더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럼 나는 덜 사랑해선가? 아니, 내가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무조건 아끼는 것만을 최선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것으로도 충분다는 생각을 해서가 아닐까. 나를 고집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나, 아들은 아들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들이 나처럼 싼것만 밝힌다면 그보다 더 속상한 일은 없으리라. 아들이 사랑이 오래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