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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 부자 진짜 부럽다 – 지리산 화대종주 이야기(3)
8일(토)
전날 저녁 9시경에 잠이 든 것 같은데 눈을 떠 보니 자정이 막 지난 시간이다. 아, 이제 오늘 마지막 날이고 지리산의 상봉인 1915m 천왕봉을 오르는 날이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는 데 볼 수 있을까? 못 본다면 덕을 부족하게 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하나? 뒤척이다가 새벽 3시경에 화장실엘 다녀오기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이 뒤쪽 건물에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밖에 나오자마자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세찬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순간 일출은커녕 입산 자체를 금지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얼른 볼 일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아침을 기다렸다.
오늘 일정은 비교적 단순하나 이번 산행의 하이라이트인 천왕봉 등정이 있어 기대감으로 설레게 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1.7km), 천왕봉에서 중봉, 써리봉을 지나 치밭목대피소까지(4.0km), 치밭목대피소에서 대원사까지(7.7km), 대원사에서 대원사주차장까지(2.2km) 총 15.6km 구간이다.
새벽 5시 30분이 되자 여기저기서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예보에 의하면 오늘은 일출 시간이 07시 20분이란다. 보통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50분~70분 정도 시간이 소요된다니 대략 6시경에 출발하면 되겠다 싶었다. 주변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니 덩달아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챙겨입었다. 옆에서 아들이 걱정을 한다. 새벽에 화장실 가면서 밖에 나가 보니 너무 추워서 옷을 단단히 챙겨 입어야 하는데 아빠 옷이 너무 얇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 옷을 입으라는 둥 걱정이 많다. 결국 제가 준비해 온 핫팩을 내 속옷에 붙여주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도 서로 가져온 핫팩을 안주머니에 넣어서 보온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숙소 로비에 나서니 05시 50분. 밖을 내다보니 너무 세찬 바람에 눈보라가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해드랜턴을 착용하고 길을 나서고 있거나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일출을 볼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해드랜턴도 없이 일출 시간에 맞춰 갈 것이 아니라 밖이 좀 훤해지면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로비에서 잠시 대기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 마지막 코스와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새길과 함께 천왕봉 등정에 성공할 수 있도록, 또 새길과 동행하는 새로운 부자(父子)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 예약된 예식장에서 양가의 어머니들과 예비 신랑신부의 시식 오찬 만남을 위해, 나아가 내가 속해 있는 무진교회와 하하문화센터, 광주YMCA, 일움학교, 광주교육시민참여단을 비롯한 여러 기관 단체에서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내가 하는 일과 하고자 하는 일이 참 좋은 사람 되게 하는 과정이 되도록’
드디어 06시 15분.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첫 번째는 1950m의 한라산으로 이미 오른 바가 있고)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보라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또 너무 어두워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잠시 주춤거리고 있노라니 앞서가던 두 분 형제가 우리를 가운데 세우고 앞뒤에서 해드랜턴 조명으로 호위해 주어 간신히 갈 수 있었다. 눈보라와 어둠 속에서 오로지 발자국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걷고 오르고 또 오르고. 가끔 좁은 통행로가 눈에 덮여 발을 헛디뎌 눈속 깊이 발이 푹 빠져 긴장하게 하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걷고 오르기를 계속하였다. 너무 힘이 들어 천왕봉 오르다가 기운이 다 빠져 만만치 않은 오늘 나머지 구간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어찌어찌 제석봉을 지난 듯하고, 이어서 바위굴을 통과하였다. 여기가 개천문인가 통천문인가 모르겠다. 개천문은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뜻으로, 지금은 개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통천문은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통천문은 천연 암굴로 사다리를 타야 지날 수 있는데,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출입할 수 없고 신선들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통천문을 지난 듯하다.
* ”와, 다 왔다. 천왕봉이다“ - 천왕봉 정상에 도착하여 아들과 함께 셀카로 인증샷
*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 천왕봉 표지석의 뒷면을 사이에 두고
곧이어 문득 어슴프레한 속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너 나가 없이 어둠 속에서, 눈보라 속에서, 거칠고 찬 바람 속에서, 인파들 속에서
”와, 다 왔다. 천왕봉이다“
를 속으로 혹은 겉으로 외쳤다.
07시 10분이다. 해돋이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소곳이 차례를 기다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어둠 속의 천왕봉 표지석을 사이에 두고 앞뒤에서 서성대었다.
천왕봉은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고 하는 자료를 읽은 적이 있으나 찾아볼 수 없었다. 정상에는 1982년에 세운 높이 1.5m의 표지석이 서 있다. 함양 방면으로는 칠선계곡을 이루고, 산청 방면으로는 통신골·천왕골(상봉골)을 이루어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진다.
천왕봉 정상은 항상 구름에 싸여 있어 예로부터 3대에 걸쳐 선행을 쌓아야 해돋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전해지며, 지리산 8경 가운데 제1경이 천왕일출일 만큼 해돋이가 아름답다고 한다. 정상에 1칸 크기의 돌담벽이 있고, 그 안의 너와집 사당에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빨치산에 의해 파손된 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는데 어디에 있는지 오늘은 분간할 수 없다. 정상 아래에는 바위 틈새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 천왕샘도 있다는데 어딘지 찾아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천왕봉 정상의 표지석은 정면에 「智異山 天王峰 1915m」, 후면에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국인인 이계양, 이새길의 기상의 진원지가 여기서 발원하였는가.
더이상 오래 지체할 수 없는 물리적 상황(인파와 강추위)에 따라 곧장 하산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13.9km를 더 가야 한다.
*천왕봉 바로 아래에 있는 대원사까지 11.7km를 알려주는 이정표
아침 식사를 거른 채 용을 써서 천왕봉에 올랐으니 허기와 갈증이 느껴진다. 치밭목대피소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기로 예정해 두었던 터라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뿔싸, 아들의 신발에 문제가 생겼다. 어제부터 시원찮았는데 오늘은 아주 탈이 나버린 것이다. 신발 밑바닥 부분이 윗부분과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간신히 아이젠에 힘입어 유지해 왔는데 더 심한 상태로 분리되어 버렸다. 배낭을 내려놓고 장갑을 벗어버리고 맨손으로 아들 신발의 아이젠을 벗기고 아이젠을 고정하는 끈으로 신발을 통째로 발등에 묶어 고정을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아이젠을 착용하고 보니 그래도 우선은 견딜만하다고 했다. 아들의 신발을 고쳐매는데 손이 꽁꽁 얼었다. 그 모습이 미안했는지 ”아빠 이젠 괜찮아요“ 한다. ‘짜~식. 야, 아빠는 그거라도 해 줄 수 있어 얼마나 좋은데, 임마’ 하며 속으로 흐뭇했다.
이렇게 한참을 씨름한 후 계속해서 눈길을 걷는데 많은 눈이 쌓인 통행로가 매우 좁아 걸핏하면 오른쪽 다리, 또는 왼쪽 다리가 허벅지까지 빠지게 되어 정말 힘들었다. 눈에 덮힌 좁은 길이 사라져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한참을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동행자도 없어 고중하기까지 하였다. 가끔씩 나오는 이정표는 그래서 구세주처럼 반가웠다. 누군가에게 구세주같은 사람이란 이렇게 온 길과 갈 길을 안내하는 자가 아닐까.
09시 40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온몸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치밭목대피소에 도착했다. 먼저 아들의 신발 상태를 보니 말이 아니다.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와 완전히 발이 얼음덩어리다. 먼저 신발을 벗게 하고 최대한 다시 수습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50m쯤 떨어져 있는 샘터에 가서 물을 길어와 아점식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신발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이번엔 내가 물 떠오는 것을 자청하였다. 물 뜨러 오가는 길도 눈이 쌓여 조심스럽기 짝이 없고, 물도 졸졸졸 아이들 오줌 줄기처럼 조금씩 나와서 물을 받는 코펠이 금방 얼어붙어 버렸다.
* 치밭목대피소에 이르는 길 - 겉보기엔 좋아도 걷는 이는 보이지 않게 힘든 길
*그래도 아들과 함께라서, 끝없는 눈길이라서 참 좋은 지리산길, 인생길
* 고장난 신발을 고쳐매고, 엎어진 김에 쉬어가는 순간
* 다시는 못 볼 것같은, 아름답고 호복하게 쌓인 눈들
점심으로 아들이 준비해 온 곰탕 컵밥을 먹는데 너무 기온이 낮아 뜨거운 물을 부어도 컵 바닥은 차서 밥이 퍼지지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였다. 그것도 얼른 먹어야지 그렇지않으면 그것도 차가워져서 먹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그렇게 하고 있는데 첫날 만났던 충청도 중년 셋이 돌아가지 않고 우리의 코스대로 뒤따라왔다. 그러면서 남은 비상식량이 있냐고 물었다. 마침 라면과 햇반이 있어 주었더니 ‘이제 살았다’며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또 ”아들과 함께 산행하는 모습이 정말 부럽습니다“며 진심이 뭉텅이로 느껴지게 부러워하였다. 그리고 고맙다며 인삼정과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치밭목대피소에서 대원사까지 9.9km다. 다시 하산길에 올랐다.
시간은 11시 7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하산길엔 여전히 눈길, 또 눈길이었다. 1915m에서 내려 또 내려가는 길을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1000m 정도를 내려왔는지 900m고도 지점까지 오니 눈이 없는 길이 나타났다. 꼬박 이틀 동안 아이젠을 착용한 채 길을 재촉하였기에 어서 벗어버리고 싶었다. ‘더 내려가면 눈이 아얘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아이젠을 벗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벗어서 바위에 올려놓은 아이젠 한짝이 안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바위 사이로 난 굴(통로)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스르륵 빠져버린 것이다. 깊은 곳이어서 어찌해 볼 방법 없이 지리산 신령님께 바치고 그냥 하산길에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가다 보니 다시 눈길이 나타난 것이다. 할 수 없이 한짝만 착용한 채 조심스럽게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마지막에 긴장을 풀가 봐 한짝만 신고 조심하여 내려오도록 지리산 하나님이 미리 손 쓰신 것이라 여기니 마음이 편안하였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하산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대원사 유평마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두 다리로 오로지 한 걸음씩만 내디디며 걷고 또 걷다 보니 오후 2시 20분. 마침내 대원사에 도착하였다. 총 48km의 지리산 화대종주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 다 왔다" - 종점인 대원사 일주문 앞 계단에 서서 셀카로 기념하다
이 마침, 안전하고 완벽한 마침을 기념해야 했다. 대원사 일주문 앞 계단에서 서로 기념사진을 찍다 보니 지나는 사람이 있어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참 좋아 보입니다. 부럽습니다“- 산행 내내 들어온, 산행을 마치면서 들은 기분 좋은 말로 어깨 동무하고
”화대종주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고자 합니다. 도와주세요.“하니 두말없이 다가와
”참 좋아 보입니다. 부럽습니다“하며 기분 좋게 사진을 찍어 주었다.
피곤과 힘듦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새로운 기운을 얻어 대원사주차장까지 2.2km를 더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서 막걸리로 자축의 자리를 갖기로 하였다. 마침 주차장에서 진주시외버스 터미널 가는 버스가 3시 50분에 출발한다니 서두르면 3시경에 주차장에 도착하면 잠시 시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축하며 "고맙다", "감사해요" - ‘야, 느그 부자 진짜 부럽다’
예정대로 대원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선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파전에 막걸리를 한 병 시켜놓고 아들의 신발과 발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엄지발가락이 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발톱이 빠지게 될 것 같다. 그제서야 발가락이 아프다고 했다. 다른 방법이 없어 주인께 부탁하여 슬리퍼도 하나 구입하여 우선 신게 하였다. 조금이라도 발을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자축하는 건배를 하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세상이, 지리산 하나님이 말하는 듯 싶다.
‘야, 느그 부자 진짜 부럽다’
*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진주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굳게 잡은 손을 놓고 아들은 서울로, 나는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날마다 ‘부러운’날들이 기다리는 일상의 현장으로.
첫댓글 1.2편보다 읽는 이들에게 훨씬 긴장감이 느껴질 듯합니다, 건강을 넘어선 신념.의지없이는 이룰 수 없을 상황들. 카톡에서 보았던 낯익은 풍경들이 더욱 실제로 다가옵니다. 장하십니다. 충청도 중년 세 분들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만나게 된 일도 뜻깊은 일이고, 눈쌓인 지리산. 따스한 몸과 마음의 체온유지..평생 기억에 남겠지요.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이루어내신 부러운 두 분. 한편의 영화를 실감나게 보았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하늘의 도우심도 느껴집니다.
"느그 부자 진짜 부럽다"
1편부터 3펀까지 진짜 감동의 물결로 읽었습니다~
교수님과 아드님 다녀오신 후 몸 회복 잘 하셨는지 궁금합니다^^👍×1000
아드님도 잘 있겠고,어제 운천저수지-무각사 갔다가 길에서 두분을 만났지요.사모님과 이야기 나누며 다정히 걸어오시는 모습을 포착했지요.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하하님들 걱정 안하셔도 될듯해요.
읽으면서 눈시울이 더워져오는건 왜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힘겨웠을 여정에 그러지않았을까요.
눈덮힌 산길...발 아래에 어떤 위함이 도사리고있을지,행여나 미끄러져 크게 다치지나않을지,과연 이겨낼수있을지.
자연에 순응하며 도전하는 산사람들을 저는 정신력이 매우 강하다고생각해요.
도무지 실행하기 어려운 겨울산행 화대종주.
제안해준 아드님과 반갑게 손 그러잡고 눈길 헤쳐나아간 부자간의 하모니.
아름다운 동행에 힘찬 박수 보냅니다.
뒤늦게 알았습니다.
뜨거워진 눈시울은 감동이었다는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