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3)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경외하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찌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3)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경외하라
이 말씀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은 인생의 마음을 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여자들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남자들은 존경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존경해주는 것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랑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남편들은 리더의 기질이 있기 때문에 아내로부터 사랑받는 것보다 존경을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즉 성경은 아내와 남편이 원하는 것을 서로 상대방을 위해 해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부부관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본문은 부부관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제도인 부부관계를 통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경외하였는지를 남편의 아내를 향한 사랑과,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영적 간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사랑하거나 그리스도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을 '간음을 행한다' 또는 '간음하는 여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따라서 부부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된 것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다고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 것도 영적인 간음이며, 남편을 경외하라고 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남편의 잘못된 말에 복종하는 것도 영적인 간음행위입니다. 따라서 올바른 분별력을 갖고 말씀을 해석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벌을 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해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또는 아내를 소유하기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아내가 감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존경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피조물의 무릎을 꺾어서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이세상을 잘 다스리고 번성하며 살 수 있도록 인간을 위해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초목이 잘 자라도록 해와 비를 선한 사람만이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골고루 내려주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쉬지않고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느끼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신 분입니다. 전혀 자격도 갖추지 않은 나무조각을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섬길 수 없듯이 경외의 대상은 경외할만한 조건이 갖추어져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 술취한 남자들 즉 육적이며 이기적인 남자들은, 경외할 조건은 갖추려고 하지 않고 아내가 복종하기만을 기다립니다. 때로는 충동적으로 약간의 희생을 하는듯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 결코 오래가지 않고 지속되지 않습니다. 아내가 조금이라도 눈밖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반드시 지적하여 다스리려고 합니다. "먼저 복종해. 그러면 당신의 태도를 보고 결정할거야. 복종하지 않으려면 사랑받을 생각도 하지마"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남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아무리 복종할지라도 전혀 태도가 달라지지 않고, 착한 아내를 종처럼 부리고("복종해!") 자신은 왕처럼 군림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남자들은 아내를 불쌍히 여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예수님의 마음)이 있으면 "먼저 복종해"라는 말을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코너에 물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라는 말처럼 아내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면("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 3:17)) 아무리 착한 아내들도 결국은 반기를 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문제아가 되어 점점 사회는 마귀가 원하는 악한 사회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원하는 가정의 파괴를 통한 [마귀의 왕국 확장 전략]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하와가 권한 선악과를 받아먹은 것처럼, 마귀의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끊임없이 남자들을 '권위주의'나 '가장'이라는 말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그럴듯하게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먼저 수그러들지 마. 성경에도 봐~ 여자보러 먼저 복종하라고 되어있잖아? 남자가 사랑하는 것은 여자가 먼저 복종할 때 하는 거야. 복종하지도 않는 여자는 사랑할 필요도 없어. 뭣하러 손해나는 짓을 해? 여자들은 먼저 기를 팍 죽여놔야 된다니까!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네가 평생 잡혀서 살아야 돼~ 잡혀서 살고싶어?"라며 자꾸만 부추깁니다.
그래서 [해와 바람의 내기]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을 자랑하는 바람과 지혜로운 해가 있었습니다. 바람은 "나보다 힘센 것은 없을거야"라고 말하자 해가 "힘만 세면 뭐해? 지혜가 있어야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바람은 "그까짓 지혜로 뭐에 써먹으려고? 나는 입김 한 번으로 큰 나무도 넘어뜨릴 수 있고, 배도 엎어버릴 수 있단 말이야"라며 자랑했습니다. 바람과 해는 만날 때마다 이렇게 언쟁을 벌였습니다.
어느날 바람은 맨날 이렇게 싸울게 아니라 누가 더 힘이 센지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본 바람은 누가 그 사람의 옷을 벗길 수 있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바람이 시도를 했습니다. 바람을 세게 불자 그 사람의 모자가 날아갔습니다. 그래서 의기양양해진 바람은 더욱 세게 바람을 불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옷이 벗겨질까봐 단추를 잠그고 옷깃을 여의었습니다. 약이 오른 바람은 더욱 세게 바람을 불어서 나무가지들을 꺾었지만, 그 사람은 더욱 옷을 꼭잡고 있어서 옷이 벗길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불다 불다 지친 바람이 포기했습니다.
그러자 해가 빙그레 웃으며 따스한 햇빛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날씨가 더워지자 그 사람은 "왜 이렇게 덥지~"라며 외투를 스스로 벗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다가 물가에 가서 입고있던 옷을 다 벗어던지고 물 속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러자 해는 바람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고, 자기의 힘만 믿고 교만하던 바람은 지혜로운 해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남자는 힘과 권위로 무엇을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즉 하늘의 참된 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권세를 자랑하며 왕관을 쓰고 구름을 타고 힘을 쓰러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존경을 받으러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반대로 예수님은 섬겨주러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하러 이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고 죽으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들을 불쌍히여기는 마음을 갖고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아내를 향해 해야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 떄문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만약 오늘 밤이나 내일 죽는다면, 그래도 아내에게 "복종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남은 하루만큼은 아내를 위해 봉사하겠습니까?
"네 힘을 여자들에게 쓰지 말며 왕들을 멸망시키는 일을 행치 말찌어다"(잠 31: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에 이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라며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나오는 것은,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환상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면서 부부관계는 예전과 똑같이 엉망이라면, 그가 아무리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며 귀신을 내쫓고 능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한 몸인 부부관계부터가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몸을 사랑하지 못하고 학대하는 사람을 보며 우리는 "정신 나간 거 아니야?"라고 표현합니다. 정신이 나간 사람을 우리는 성령과 관련지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귀와 관련지어서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he would cry out and cut himself with stones)"(막 5:1-5)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에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이 부부관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사랑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무관심(I don't care)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즉 아내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내가 아프다고 해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아내가 못하는 것만 보면서 지적하기에 바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아내의 몸과 마음을 상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인 자기의 몸(아내)에 상처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느라 자신을 돌볼 시간이 없이 희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루종일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자는 시간에 밤이 새도록 기도하기도 하시며, 다른 사람들이 곤히 자고있는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희생과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운동을 하여 건강해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건강의 비결은 '기도'와 '전도'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찬송과 감사가 나오기 때문에 건강해지지만, 미움이 있으면 금방 우울해지며 온 몸이 아파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거나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려는 마음은 그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때에 생깁니다. 그리고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기도도 전도도 할 수 없습니다. 또 비전이 없는 사람도 기도나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즉 기도를 하면 에너지가 생기고 비전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열심히 운동하는 운동선수들보다 전혀 운동을 하지 않아도 기도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입니다.
노벨상을 수상한 의학자 알렉시스 카렐(1873-1944)은 기도에 대해 의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기도가 인간의 심신에 미치는 영향은 호르몬의 영향과 같다. 기도를 꾸준히 하면 지적 활력이 증대되고 인간관계에 대한 넒은 이해력을 갖게되고, 온전한 인격 형성에 필수 불가결하다.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마음과 몸 그리고 우리의 필요에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알수없는 존재, 인간] 중에서)
성경에서도 운동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인간의 몸을 우상화 하면서 극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경건한 유대인들은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운동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육체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자신의 육체를 위해 연습해봤자 그것은 약간의 도움만 있을 뿐이므로 경건한 삶을 위해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마가복음 5장을 보면, 귀신들려서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보자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막 5:6-7). 그리고 그의 부르짖음을 들은 예수님은 그를 마귀의 결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몸인 아내에게 상처를 주며 가정을 무덤처럼 만들고 살아가는 수많은 남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해 달려와 엎드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를 해야합니다. 이러한 상태로 살아가는 남편들의 문제는 고고하게 묵상기도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과거에는 아내를 향해 큰 소리를 질러댔지만, 이제는 그 소리가 주님을 향한 간구의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며 아내를 죽이는 소리를 냈지만, 이제는 주님께 나 자신을 죽여달라는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아내를 향해 명령과 비난의 큰 소리를 내었지만, 이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르치며 위로하며 격려하는 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넘어져있는 아내를 혼자 일어서지 못한다고 비난하고 지적하는 손가락질을 통하여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이제는 아내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아내의 눈물을 닦아주며, 아내의 더러운 것을 씻어주며, 아내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며, 넘어져있는 아내를 일으켜 줄 수 있는 손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무덤과 같은 가정생활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죽음으로 천국을 이루어가는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못했지만, 즉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자기의 몸이 귀한 줄 모르고 상하게 한 것처럼 아내를 무시하며 큰소리를 지르며 폭언과 폭력을 가하며 끊임없이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서 예수님께 부르짖으므로 마귀의 지배에서 놓임을 받게 되자 그는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어떻게 된것을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막 5:14-15).
과거에 어둠속에서 살고있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여 마귀의 종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곧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어느날 성령 체험을 하면, 사람들은 선교사로 나가겠다거나 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그 동안 마귀의 종노릇을 하느라 주위를 어둡게 하면서 주위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며 힘들게 했던 것부터 해결하고 정리하라고 하십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가족들 앞에서 증명해 보이라고 하십니다. 즉 성령을 받았으면, 마귀로부터 놓임을 받았으면, 그 증거를 다른 곳이 아니라 먼저 집에서 실천하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우선순위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에서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고 하시면서 땅끝이 아니라 예루살렘 즉 우리가 속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군대 귀신들렸다가 놓임을 받은 자가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자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먼저 해야할 일을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지 아니하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신대"(막 5:18-19)
예수님은 항상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산위에 올라가셔서 많은 이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에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임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 속에서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었어도 그 화를 절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화를 내는 순간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를 놓치게 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놓치는 순간, 우리의 다음 삶도 엉망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화를 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인간이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 복종을 보시고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반역하여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원수짓을 하고있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먼저 용납하시고, 용서하신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로 양육시켜서 원수된 것을 화해시키기 위해 평화의 도구로 오신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남편된 자들은, 아내의 복종을 먼저 요구하면 안 됩니다. 남편된 자들이 먼저 할 일은 예수님처럼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높아지고 싶어하는 아내를 위해 아무 말없이 종처럼 물을 떠와서 아내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기 위해 아내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남편을 보면서 남편의 가장의 자리를 형편없이 보는 아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한 남편을 보며 '종'이라고 생각하는 아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류했던 것처럼, 오히려 남편 위에 서려고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서 몸둘바를 모르게 됩니다. 그러한 남편을 볼 때 가슴이 뭉클해지며 더욱더 존경심이 마음속에서 우러러 나오게 되어 존경하지 말라고 해도 존경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남편을 존경하지도 않고 그런 남편에게 복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남편을 종처럼 부려먹는 그런 아내가 있다면 그런 아내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예외적인 아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내들은 세상말로 "업고 다니고, 이고 다니고 싶은" "보기만 해도 아까운"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존경스러운 남편 때문에 건강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받는 화초가 건강하게 자라듯 사랑을 받는 아내들은 얼굴빛부터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존경하라고 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사람들을 섬겨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께서도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피조물인 사람이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반역인 것입니다. 반역자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그러나 자신을 죽이며 섬김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섬겨주며 희생의 사랑을 베풀었던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세상의 모든 만물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꿇게 되는 영광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아내와 남편의 부부 생활을 통해 우리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존경을 받는 비결은 권위주의와 힘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평화의 도구가 되어 먼저 용납하여 아내를 희생으로 사랑해 줄 때에, 그 아내는 남편을 하나님처럼 받들어 섬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교회가 경외하고 섬기듯이 집안의 머리인 남편을 아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며 복종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먼저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먼저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죽으셨습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셨기에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아담도 죽었다 살아난 뒤에 아내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하셨기에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죄인들이 회개하며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33절을 시작할 때에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의 헬라어 'πλήν 플렌'은 반대말을 나타내는 접속사이지만, 여기에서는 "앞에서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 '아무튼' '어쨌든' '하여간' 등의 의미입니다. 즉 "앞에서 여러 가지 말을 했지만, 아무튼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남편이 먼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내들이 해야할 의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존경할 수 없는 남편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계속해서 아내를 자녀들 앞에서 무시하고 욕하며 저주하는 그러한 남편을 존경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남편을 경외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에 있는 남편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종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숭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성경을 볼 때에 문자 그대로만 해석해서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런 남편을 존경을 할 수는 없지만, 그런 남편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며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가 아볼로라는 목회자를 불러서 성령에 대해 가르쳤듯이 남편을 끊임없이 말씀으로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돕는 베필입니다.
세상에서는 남자를 일컬어 "동물의 본성을 갖고 있는 수컷"이라고 표현합니다. 스데반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남자는 천사의 얼굴을 하며 어떠한 핍박 속에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용서하며 살아가지만,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남자들은 세상에서 말하는 그 말 그대로 살아갑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갈 수가 없고, 대신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며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아내가 하늘의 지혜를 말해주더라도 그 지식을 듣기 싫어합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잠 12:1)
간혹가다가 "오죽하면 남편이 아내를 때리겠느냐?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리지"라고 설교시간에 망언을 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맞을 짓을 하지 않아도 성질을 못이기는 남편 때문에 맞고 사는 아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전에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부흥회를 할 때, 부흥 강사로 오신 분 중에 두 분이 그런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집회 후에 3명의 여성도가 저를 찾아와서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자기들이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사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목사님은 그런 말씀을 강대상에서 웃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울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여성은 믿지 않는 남편과 살다보니 교회에 간다고 그런 것이며, 또 한 사람은 교회는 같이 다니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은 성질이 고약한 남편이기에 맞고살고 있었습니다. 또 한 명은 중직을 맡고있어서 모두가 성령 충만한 줄로 알고있는 남편에게 맞고살아서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함께 들은 손버릇 나쁜 남편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때부터 화가 나면 때릴 구실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말한 것은 너같은 것은 때려도 된다는 말이야, 알았어?"라며 아내를 구타했고, 아내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맞을 때마다 그 목사님을 목사님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말 한 마디로 전도의 방해가 되며 마귀의 종노릇하는 이들에게 더욱 어둠의 지배를 받도록 빌미를 준 것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도 벌써 20년전에 미국 목사님들을 상대로 앙케이트 조사를 한 결과, 맞고 사는 사모님들이 거의 반을 차지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모님들이 이것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말을 하면 목회를 그만 두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에 어떤 목회자는 김치병을 사모님에게 던져서 발이 찢어져서 응급실에 실려가서 목발을 짚고 교회에 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모님은 남편이 너무 무서워서 심장병과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며 심장약을 제시간에 먹지 않으면 손발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목사들이 더욱 떵떵거리고 잘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남편들은 아무리 목사, 장로, 안수집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남편들은 돼지처럼 굽이 갈라져서 외모는 크리스천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새김질을 하지 않는 즉 말씀을 순종하며 말씀대로 살지않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레 11:7).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를 하며 부르짖어 기도도 잘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다시는 강단 위에서 "오죽하면 남편이 아내를 때리겠느냐?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리지!"라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비록 그런 여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선의의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뒤집는 말이며 따라서 지극히 교만한 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아내를 학대하는 자와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말라기 2장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일이 안될 때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때리실까? 맞을 짓을 하니까 때리시지"라고 빈정거린다면 "아멘'하고 받아들일까요?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어떠한 생각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를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귀로부터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인지를 먼저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력이 없을 때, 한 몸인 아내에게 자꾸만 상처를 주며 귀신들린 사람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가정을 무덤으로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분별력을 가질 때에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한 몸인 아내와 가정을 위하여 큰 소리를 내지 않고 부드럽고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남편된 자들은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와 같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남편된 자들은 매사에 자기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기 자신의 언행과 생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없다면 빨리 엎드려야 합니다.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지속하다보면 결국 가정은 또다시 무덤과 같은 상태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연약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당장에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매우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처럼 남편된 자는 아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내를 깨어지기 쉬운 그릇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그릇은 애지중지 다룹니다. 깨어질까봐 운반할 때에도 포장지로 싸고 또 싸서 깨지지 않도록 보호합니다. 과연 남편들도 아내가 혹시나 상처받고 마음이 다치지나 않을까를 염려하여 싸고 또 싸서 깨지지 않는 것들과 구별하여 귀하게 보호하며 살아가는 지 점검해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작은 천국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아내를 진정으로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남편은 반드시 아내의 존경을 받게 되어있으며, 자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며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입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제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것을 화목시키기 위하여 저의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사실은 언제 생각해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처럼 평화의 도구가 되기위해 제 자아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은 너무나도 쉽지가 않음을 고백합니다.
특히 가정에서 예수님께서 채찍을 맞으시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히면서도 신부인 교회를 위해 묵묵히 참고 견디셨던 것처럼 제 아내를 위해 저의 아픔과 고통을 감수하며 산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어렵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같고, 저 혼자서만 희생하는 것 같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마 제 마음이 너무 교만하고 강퍅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제 아내가 저를 위해 참아주고 고생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저는 그것을 고맙다고 아내에게 말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라면 당연히 남편의 말에 복종하고, 남편의 명령에 따르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실 때에 당연히 어떻게 해야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몸소 섬김의 자세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뒤에 증인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께서 세우실 교회를 위해 사랑과 긍휼한 마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가르치시며 또한 보호하시며 성장시켜주셨습니다.
그것이 남편이 아내를 위해 해야할 일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예수님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저는 인간이기에 잘 못해도 괜찮다는 자기 합리화에 스스로 빠져서 살아왔습니다.
떄로는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처럼 아내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아내가 몹시 괴로와하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 상처를 주며, 그 상처주는 것을 정당화하며 합리화하며 살았습니다.
스데반의 얼굴처럼 천사의 얼굴보다는 성내며 명령하는 엄한 군주의 얼굴로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옥처럼 또는 무덤처럼 만들 때도 많이(가끔)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먼저 죽으려고 하지 않았고, 먼저 섬겨주려고 하지 않았고 항상 먼저 복종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아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항상 제 앞에서 완벽한 아내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제 취향과 다르거나, 제 맘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그것을 틀렸다고 지적하기 바빴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는대로 아내가 항상 움직여주기만을 바랬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제가 그 동안 완전히 성경과 반대로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먼저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인 제가 먼저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가 먼저 회개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먼저 용납해 주시고 섬겨주심으로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 감격하여 하나님께 돌아와 경외하게 된 것처럼 남자인 제가 먼저 아내를 받아주고 연약한 아내가 조금이라도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히 보살펴주고 보호해주며 아내를 살리기 위해 제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존경을 받으려고 섬겨주신 것이 아니지만, 그러한 겸손함 때문에 존경과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남편된 저로서는 아내의 존경을 받으려고 애쓰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내를 사랑해 줄 때에 자연스럽게 권위와 존경과 영광이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동안 너무 청개구리처럼 잘못 살아왔고, 바람처럼 제 힘만 의지하고 힘으로 아내를 누르려고 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해처럼 따스한 사랑을 베풀 때에 스스로 옷을 벗은 사람의 예처럼 이제부터는 하늘의 지혜를 갖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바람처럼 제 힘과 지식만 믿고 교만하게 살다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아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우울해하며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갖기를 원합니다.
제 아내가 복종하지 않고 저를 존경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착하던 아내의 입에서 거칠은 말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에, 그 동안 제가 얼마나 아내에게 강퍅하게 굴었는지를 느끼게 됩니다. 제가 했던 말들을 이제는 아내와 자식들이 저를 향해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저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내가 저에게 복종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것은 완전히 도둑놈 심보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도둑놈 심보를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저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의 증거가 첫번째로 가정에서 나온다고 하셨사오니, 교회일을 한답시고 또는 직장에서 높아지겠다고 아내와 가정을 뒷전에 두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아내를 사랑할 수 있도록 저의 마음을 온전히 주장하여 주옵소서.
제가 아내를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사랑하게 될 때에 아내의 상처난 모든 것들이 치유가 되고 온전해짐으로 아름다운 천국과 같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음을 알았사오니, 저를 먼저 변화시켜 주옵소서.
저를 온전히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옵소서.
복종하지 않는 아내를 버리고 교회 일만 열심히 하라는 거짓 영에게 속아서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주님은 아내를 통해서만 복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아내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복을 차버리는 것을 습관처럼 반복하며 살아온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아내를 방과 마음에서 내쫓고 저 혼자 기도하면서 기도의 응답을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살아온 어리석은 죄인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아내를 존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아내를 사랑함으로 제 주위에 돋아난 가시덤불과 엉겅퀴들이 제거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말고, 아내가 말을 듣지 않을 수록 더욱 아내를 사랑해주고 섬겨줌으로 아내의 마음이 저의 사랑에 녹아져서 스스로 순종하는 가운데 아름다운 천국을 이루는 저희 가정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저에게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을 가르쳐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저를 위해 희생의 사랑으로 죽기까지 하시고 또 저를 살리시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 퀸즈 리폼드 교회
Rev. Esther Soo-Gyung Kim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