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새벽, 이세현 회장은 여느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새벽 일찍 출근해서 전용엘리베이터를 타고 48층에서 내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출근한 직원들은 거의 없었다.
"오늘 웬일이야. 최 실장이 직접 현관까지 마중을 다 나와 주고.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이 회장이 밝은 얼굴로 농을 던졌으나 최 실장은 무어라 대꾸를 할 수 없었다. 곧 벌어질 사태만이 눈에 아른거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박 과장! 윤 팀장 출근하는 대로 같이 내방으로 와서 차 한 잔 하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성규 과장은 이 회장 수행을 마치고 경호실로 향하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박 과장!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거 같아."
어제저녁 윤태수 팀장은 평소와 달리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모하메드 하산을 입에 올리며 특별히 이세현 회장의 신변경호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윤 팀장이 서초경찰서에 대승빌딩의 경비강화를 위한 공문서를 직접 접수하고 출근하겠다는 걸 보면 하산이라는 자가 한국에 들어왔거나 곧 들어올 태세인 듯하다.
성규가 월요 경호팀미팅자료를 준비하는데 회장직통 인터폰이 울렸다. 이 회장이다.
"김 과장! 지금 경호실에 또 누가 있나?"
"저 뿐입니다. 회장님!"
이 회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성규도 당황스러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당장 사무실에서 나와 건물 밖으로 나가게."
"회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의문 가득한 성규의 말을 이 회장의 낮고 빠른 목소리가 잘라버렸다.
"하산이 지금 내 방에 있어."
"네에?"
"탕!'
순간 총소리가 나며 모하메드 하산의 음성이 들렸다.
"경호팀 과장이라고 했나. 경호실로 가서 자넬 죽일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 걸 고맙게 생각하게. 이 회장은 다시 내 인질이 됐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다음 총성을 들었을 때는 네 보스머리에 구멍이 난 걸로 알아라."
"모하메드 하산이라고? 당신이 IS의…"
"시간이 없다."
성규의 말을 하산이 다시 끊었다.
"이 건물에 여섯 개의 폭탄이 설치됐고, 정확히 30분 후 평택에 있는 대승화학공장이 폭발할 거다. 네가 할 일은 이 건물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통제해서 아까운 목숨 잃는 걸 최대한 막는 거다."
다시 이세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박 과장! 시키는 대로 해. 빨리 내려가서 직원들의 출입을 막아."
"회장님! 반드시 구해낼게요. 침착하게 대처하세요."
"그래, 나도 우리 경호팀을 믿어."
숨이 막혔다. 전화를 끊은 성규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으로 내려와 프런트안내원과 경비원에게 임무를 지시하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으나 이미 가동이 중단됐다.
비상계단을 통해 다시 올라가려 했으나 세 군데의 비상문이 모두 잠겼다. 어쩔 수 없었다. 방송을 통해 이미 출근한 사람들을 모두 나가도록 하고 빌딩을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빌딩에 여섯 개의 폭탄이 설치되고 대승화학 평택공장이 30분 후에 폭발한다고 했다.
- 사실일까. 이럴 때 팀장님이 있어야….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성규는 윤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문접수를 위해 서초경찰서에 온 태수는 박 과장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예상보다 빠른 하산의 움직임에 놀라면서도 최상민 비서실장을 지목했다.
"최 실장이 비서실직원들도 없이 직접 현관까지 내려와 회장님을 맞이했다는 게 이상해.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랬다. 아침 출근길의 최 실장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지금 생각하니 무언가에 쫓기는 듯 긴장한 모습이었다.
- 아직 멀었어, 나는.
성규는 윤 팀장의 상황습득능력과 예리한 판단력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면서도 그를 따라가려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걸 자책했다.
태수는 박진철 팀장에게 상황을 전달하고 최 실장 자택으로 병력파견을 요청했다. 아무리 귀신같은 하산이라도 내부인의 협조 없이 건물을 장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박 과장! 직접 최 실장 집으로 출동해. 서초경찰서에서도 지금 출동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난 곧바로 회사로 갈게."
성규와 통화를 마친 태수는 회사로 차를 몰면서도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하산이 말한 대로라면 5분 이내에 대승화학 평택공장이 폭발한다. 단순 협박성경고가 아닐 것이다.
모하메드 하산의 선전포고,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그의 무력도발이 공개적으로 개시될 거라는 걸 태수는 직감했다.
방배동 주택단지를 서초서의 강력팀과 기동타격대가 에워싸고 조심스럽게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역시 윤 팀장이 예견한 대로였다. 목표한 바를 이루려고 인질을 수단으로 삼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놈들이다.
최 실장 자택 가까이 진입하기 무섭게 기관소총이 발사되었다. 전열에서 상황을 살피며 다가서던 타격대원들이 진입을 멈추고 몸을 굽혔다.
최 실장의 아내와 두 딸을 한데 포박한 복면의 괴한은 세 모녀를 창가에 세우고 당당하게 소리쳤다.
"물러서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이들과 함께 자폭하겠다."
성규는 IS의 자살특공대에 대해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복면아랍인의 경고가 허튼 소리가 아님을 안다. 여기서 최 실장의 가족이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된다.
밀집된 주택가라 저격수를 배치할 곳도 마땅치 않다. 최 실장 자택의 측면에 위치한 빌라옥상에서 망원경으로 집안을 살피던 성규는 2층으로 오르는 배관과 뜯어진 창틀을 보았다.
성규는 진철에게 다가가 최 실장 집의 배관을 가리키며 낮게 속삭였다.
"박 팀장님! 모른 척 지켜만 봐주십시오.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배관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간 성규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박진철 팀장에게 보낸 시그널이다. 괴한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그 틈을 노려 제압하기로 한 것이다.
10여 분 후 무장아랍인은 성규에 의해 생포되어 집 밖으로 끌려나왔다. 복면이 벗겨진 아랍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성규에게 가격당한 옆구리와 복부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했다.
무장한 아랍인 한 명을 제압하기까지 약간의 소란이 있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최 실장의 가족을 안전하게 구할 수 있었다.
하산의 부하로 보이는 아랍인이 서초서로 압송되는 걸 보고 성규는 다시 회사로 왔다.
"여기서도 시리아에서처럼 날 기만하고 이 사태를 벗어날 거라고 생각하나?"
모하메드 하산이 냉소를 흘리며 지시봉으로 이세현 회장의 머리를 두드렸다. 촬영을 마친 하산은 최상민 비서실장과 방송국에서 온 두 사람을 비서실에 가두고 회장실에 이세현 회장을 묶어 앉혔다.
"당신 방이지만 여기선 내가 갑이야. 하하하! 이번엔 내가 확실하게 칼자루를 쥔 거지."
웃음을 거둔 하산의 복면 속 동공이 더욱 크게 보였다.
"난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여기까지 침투했을 때는 내가 어떤 심정으로 왔겠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겠어. 더 이상 살상만큼은 하지 마."
"또 나한테 지시하는군. IS에 잡혀왔을 때처럼."
"부탁하는 거야."
하산의 이죽거림에 세현은 자세를 바로 하며 정색을 했다.
"윤태수는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을 IS에 넘겼는데도 계속 경호책임자로 고용하고 있다는 게 놀랍군."
"결과론이지만 그가 날 구출했으니까."
"그때 다마스쿠스 아파트에 온 게 윤태수였나?"
"맞아."
"참수 당하고 남을 짓을 했는데도 옆에 두고 일하다니 참으로 대단해. 언론엔 동반납치 됐다가 둘 다 탈출했다고 둘러대고 말이야."
"윤태수 팀장을 아나?"
세현은 혹시라도 윤 팀장이 하산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걸 하산도 아는 건지 그의 속을 떠보았다.
"당신이 총애하고 아끼는 훌륭한 경호팀장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나를 목표로 삼았으면서 윤 팀장의 가족을 먼저 납치하다니. 당신 생각이었겠지?"
"알고 싶은 게 많군."
하산이 은빛권총을 꺼내 총구에 입김을 불어넣더니 세현의 머리를 향해 격발자세를 취했다.
"알려주지. 태수와 난 군대에서 함께 있었어."
권총을 케이스에 넣은 하산의 독백이 이어졌다.
"한때 둘도 없는 전우였지."
멋진 놈이었어. 그런 친구를 배신한 건 지금도 마음이 쓰려. 그런데 대승에 대한 파괴욕구를 전우애나 우정이 커버해주지 못하더군. 하산은 태수를 언급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당신이 마이클 리…."
"태수가 마이클 얘기를 하던가."
"윤 팀장은 지금까지도 당신이 IS에서 죽은 걸로 알고 있어. 가족들만 생환시키고 당신을 잃은 걸 무척이나 가슴아파했지."
"……."
마이클은 처음에 태수가 대승에 입사한다고 했을 때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가 지근에서 그룹회장을 지키는 경호팀장의 직책이라는 걸 의식하면서 어쩌면 태수가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징검다리역할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은 현실로 이어졌다.
- 대승, 윤태수 그리고 나. 내가 부둥켜안고 살아온 지난 세월의 한. 어쩌면 이건….
그때 마이클은 이렇게 엮이는 게 알라의 뜻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태수는 제 보스가 두 번씩이나 모하메드 하산의 인질이 된 걸 안타까워하겠지만."
하산은 창가로 다가가 서울의 야경에 시선을 던지더니 "모하메드 하산이 마이클과 동일인물이란 걸 알면 태수의 심정이 어떨까."라며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하산의 혼잣말에 세현은 입을 다물었다.
- 너야말로 IS에서 윤 팀장에게 실체를 모두 보여주고 정작 넌 그걸 모르고 있구나.
윤태수 팀장, 그는 이번에도 모하메드 하산, 옛 전우였던 마이클로부터 자신을 구해줄지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아니 이번에 자신을 구해내지 못하더라도 더 이상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해준다면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다.
IS에서 풀려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과 달리 이번엔 얼마를 지불하더라도 명분이 있다. 수원공장이 폭발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불행이다.
여기 대승빌딩은 또 어떠한가. 놈과 대승의 악연으로 인해 엄한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게 된다. 세현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세현의 불길한 상상을 깨고 하산이 물었다.
"나도 당신 궁금증을 풀어줬으니 당신도 내 의문하나를 풀어줄 게 있어. 내 수배전단이 뿌려졌더군. 대승사장 살인사건몽타주 말이야.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냈지. 난 당신한테 내 얼굴을 보여준 적이 없었어."
"그게 궁금하겠군. 재주 많은 당신이 캐내봐."
세현은 태수가 하산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또 기만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산은 더더욱 길길이 날뛸지 모른다.
"이상한 점이 많아. 여기서 당신과 대화하면서 느꼈어. IS에 잡혀왔을 때와 지금 당신은 느낌이 많이 달라."
하산이 다가오더니 세현의 와이셔츠를 잡아당겨 찢었다. 세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역시 내 예감대로야. 당신은 IS에 오지 않았어. 목소리 억양도 다르고 특히 IS에서의 이세현은 당신보다 근육질이었지. 그리고 말이야."
하산은 가슴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때 다마스쿠스에서 맞은 가슴팍이 지금까지 얼얼해. 양손이 묶인 당신이 그때처럼 나를 공격할 수 있겠나?"
"……."
하산은 리모컨을 꺼내들었다.
"난 궁금해 죽겠거든. 궁금증을 풀려면 이게 필요하겠지. 지금 바로 수원공장을 날려주마."
하산이 냉소를 흘리며 빨간 버튼에 엄지를 올려놓는다.
- 어쩌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세현은 소름이 돋는 걸 의식했다. 가슴의 박동도 울림이 들릴 정도로 컸다.
"당신은 쌍둥이도 아니야. 셋을 세겠다. 하나,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