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SBS 50부작 ‘육룡이 나르샤’ 키워드 ㆍ권력…여섯의 힘, 어떻게 다른가 ㆍ메시지…이 시대에 던질 화두는 ㆍ캐릭터…누구 하나 약하지 않다
SBS가 50부작 사극 <육룡이 나르샤>를 다음달 5일부터 방송한다. MBC <선덕여왕>(2009)과 SBS <뿌리 깊은 나무>(2011)를 공동 집필했던 김영현·박상연 작가가 다시 뭉쳤다. 김명민·유아인 등 배우들이 정도전·이방원(태종) 등 조선 건국 시기 주요 역사적 인물들을 연기하는 점도 기대를 모으게 한다. 두 작가의 설명을 토대로 하반기 기대작 <육룡이 나르샤>를 살펴봤다.
■정도전·이방원에게 권력이란 무엇이었나
제목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 4대 임금 세종 때 조선 건국을 칭송할 목적으로 편찬한 <용비어천가> 제1장 첫 구절에서 따왔다. 태조(이성계) 등 조선을 세우는 데 앞장선 여섯 인물(육룡)이 주인공인 이야기다. 세종 시기를 다룬 두 작가의 전작 <뿌리 깊은 나무>의 제목이 <용비어천가> 제2장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프리퀄’(원작보다 앞선 시대를 다루는 속편)인 셈이다.
이성계 역|천호진(왼쪽) 정도전 역|김명민(가운데) 땅새 역|변요한
두 작가는 “<뿌리 깊은 나무>를 제작하며 ‘정도전과 이방원이 무슨 생각으로 힘을 합쳐 새 나라를 세웠을까’란 궁금증이 생겼다”고 밝혔다.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극의 구도 역시 달라졌다. <뿌리 깊은 나무>가 ‘군주 정치’를 왕과 신하, 백성 등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봤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여섯 권력자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 작가는 “전작에선 권력과 정치의 본질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개개인에게 정치와 권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 정치에 메시지 던지는 ‘팩션’ 될까
그간 고려 말~조선 초기를 그린 사극은 꾸준히 나왔다. 구체제의 악습에 대항하는 신진 세력의 투쟁이 전개됐던 당시의 시대적 흐름 자체가 극의 기본 요소인 ‘갈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들이 주장했던 ‘개혁’이란 화두는 자연스럽게 현재형으로 해석돼 화제를 낳곤 했다.
지난해 인기를 끈 KBS1 <정도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도전>은 ‘선과 악’이란 추상적인 대립보다는 이념과 실리를 달리하는 정치 권력이 서로 충돌하는 과정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방원 역|유아인(왼쪽) 분이 역|신세경(가운데) 무휼 역|윤균상
그런 점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과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인물 및 의상·말투 설정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정통 사극’보다는 ‘팩션’(역사적 사실에 상상을 입힌 사극)에 가깝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팩션인 <뿌리 깊은 나무>를 두고도 극중 일부 인물이 현실 정치인과 비교된다는 말이 나온 바 있다. 김 작가는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쓰다보니 평소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명배우 ‘육룡’이 펼치는 ‘캐릭터 대결’
두 작가는 <육룡이 나르샤>를 ‘캐릭터극’으로 정의한다. 김 작가는 “‘육룡’은 조선 건국이라는 큰 틀에서는 함께 가지만, 저마다 각기 사연과 드라마, 존재 이유를 가진 인물들”이라고 말했다. 어느 한 주인공이 크게 도드라지기보다는 여섯 인물들의 각각의 내면과 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이야기다. 김명민·유아인·천호진 등 강한 인상의 배우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극중 ‘육룡’ 중 실제 역사적으로도 처절하게 대립했던 정도전(김명민)과 이방원(유아인)에 관심이 쏠린다. 김명민은 KBS1 <불멸의 이순신> 등을 통해 시청자들 사이에서 ‘사극본좌’로 불리고, 유아인은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사도>에서 ‘비운의 사도세자’ 연기로 호평을 얻고 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통한 치열한 ‘기싸움’이 재미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자주 술을 먹여 신하들의 진심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1466년 세조는 누구가 진심을 말하자 죽여버렸다. 더 조사하여 올려놓을 것.
- 메두사 호의 조난자자에게 바치는 한 잔의 물과도 같았다.
- 이 문은 들어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이름을 묻지 않고, 다만 괴로움이 있는가 물어볼 뿐입니다. 당신이 괴로움을 겪고 굶주림과 목마름을 느끼고 있다면, 잘 찾아오셨습니다. 빅토르 위고 제미제다블.
-인류는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눈다. 자본가와 노동자. 이것이 서로 바뀐다. 생산방식이 바뀌면 이득/손해가 바뀐다.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프랑스 혁명이다.
왕
귀족(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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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농업)
르네상스
무역
상업발달- 땅이 없는 사람도 돈을 번다. 즉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생산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돈을 낼 수 있다. 이들이 시민이고 브르죠아라고 한다.
정치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입장을 밝히시오.(15점)
~가 있고, 어떤 내용이다. 어떤 것을 정치라고 부르는가 즉 본질에 대한 규명을 하는 것이다.
형제/실/기/관이/경기/국/집/계/가
1)형식적 제도론이다.이 이론은 국가나 정부가 사회 공공적인 조직을 만들어 통제하고 규제(통치)하는 권력의 강제 행위를 정치라고 규정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단점은 개인간에도 정치 현상이 존재하는데 이 부분을 잘 잡아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친구 모임, 아파트 회의, 동창 모임에도 정치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실력론(권력론)이다.남이 싫어하는 데도 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지배, 복종관계라는 권력이 있어야 이를 정치라고 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정치란 지배자와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현상으로 이해하는 이론으로 러셀(Bertrand Russell)과 베버(Max Weber)가 이를 주장한다. 그러나 대등합 합의라는 부분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전통과 관습, 합리성에 기초한 합의 라는 현실정치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3)기능론이다.이 이론은 최근의 입장으로 정치가 수행하는 다양한 사회적 기능에 초첨을 두고 있다. 인간의 협력관계의 조직화, 집단의 통제 및 지도,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 조정 등과 같이 사회 내에서 정치가 수행하는 다양한 기능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힘으로써 정치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이론으로 데이스톤이 이에 해당한다.
정치의 본질을 관념이나 이상, 또는 경험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검토할 수 있다. 먼저 4)관념론, 이상주의적 입장이다. 어떤 정치가 좋은 것이냐, 라는 정치는 무엇이어냐 하는가 즉, 당위성 측면의 접근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이상적인 국가의 내용에서 그 예를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이성과 합리성 도덕적 판단에 따른 관념적인 접근을 통한다. 이 이론은 형태주의나 과학연구를 어렵게 할 수 있다. 5)경험론적 접근이다.이 이론은 근현대에 어울리는 이론이다. 어떤 현상과 행동이 정치냐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시도다. 예를 들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강력하고 현실적인 군주를 세워 이탈리아를 세우려는 예에서 알 수 있다. 실력론과 서로 중복이 될 수 있다.
다음은 국가의 강조여부에 따른 구분이다. 6)국가현상설이다.이 이론은 형식적 제도론과 중복될 위험이 있다. 국가의 목적, 기능, 그리고 존재양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정치라고 보는 전통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정치는 본질적으로 국가와 정부 또는 통치체와 같은 공적 사회구조의 작용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현상만을 대상으로 한다. 7)집단현상설이다.진보적이며 현대적인 이론이다. 국가를 포함해서 가정과 정당, 교회 농촌 이익집단 등 사회전반의 관계에서 정치현상과 정치형태가 존재한다고 본다. 따라서 당연한 논리귀결로서 이 이론은 반국가적, 국가비판적 인간행위도 정치로 간주하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투쟁성에 대한 강조여부로 나눌 수 있다. 8)계급투쟁설이다.인간행위에서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힘 있는 자, 없는 자 등의 계급적 갈등과 대립 투쟁을 강조하고 이러한 측면이 정치의 본질이라고 보는 이론이다. 생산수단(생산방식)을 확보한 지주와 노동근로자 사이에 주인이 바뀌고 서로 뺏고 뺏는 관계가 계속되는데 이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맑스의 공산주의~이 그것이다. 9)가치창조설이다.공동생활을 통해 보다 나은 공동체의 발전을 이루어 내고, 궁극적을고 자유, 평등, 박애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인간가치를 구현하고, 경제적 풍요와 사회복지를 극대화를 달성하는 것이 정치라고 보는 견해이다. 관념론과 걸치는 면이 있다.
며칠 전 10주기를 맞은 고 정운영 선생의 칼럼 선집 <시선>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때마침 그 근처에서는 노동개혁(개악) 저지를 위한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 집회가 진행되었다. 훤칠한 키에 잘 어울리는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교실 안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내가 <자본론>을 들고 종로에 간 까닭은…”이라며 강의를 시작하던 정운영 선생에 대한 기억이 아득한데,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그치지 않고 있다. ‘인간적 세상’을 향한 선생의 꿈은 정녕 꿈이던가.
뭐가 잘못된 건가. 가장 일반적인 답은 ‘정치’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박한 경제학자’로서 정치를 논할 능력도 없고 아예 관심도 갖지 않으려 하지만, 특히나 요즘은 신문의 정치면을 들춰보기가 겁부터 난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로 접어드는데, 야당발 뉴스는 가히 절망적이다. 아무리 내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정치판이라고는 하지만, ‘이러다 다음 선거에서도…’라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식하니 용감하다고, 내키는 대로 지껄여보겠다. 현재 야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리더십 붕괴라고 생각한다. 2012년 대선 당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여당은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도 보스가 딱 결정하면 모두 그리로 달려가는 DNA를 가진 조직’이라고 촌평했다.
여기에 대구를 맞춘다면, ‘야당은 자기네들이 보스를 뽑아놓고도 절대 그 보스를 따라가지 않는 DNA를 가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대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붕괴된 리더십을 다시 세우는 길은 무엇인가. 혁신? 통합? 비전? 다 좋다. 문재인 대표의 소득주도성장론, 안철수 의원의 공정성장론, 정세균 의원의 분수경제론, 손학규 전 대표의 ‘저녁이 있는 삶’ 등, 뭐라도 좋다. 문제는, 대중이 그걸 믿게 만드는 거 아닌가. 내가 정치에는 문외한이지만, 정치적 슬로건은 참과 거짓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미사여구로 얼기설기 엮은 정치적 슬로건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바로 리더십일 게다.
내지른 김에 갈 데까지 가보자. 리더십은 그때그때의 현안을 ‘마무리하는’ 능력에서 길러진다고 본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눈앞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설득하고 결단하고 종결하면서 다음 문제로 넘어가는 과정의 누적을 통해, 먼 미래의 거창한 슬로건을 실현할 ‘유능한 경제정당’이 만들어지는 것이다.야당의 리더십 붕괴는 비전과 정책의 부재가 아니라 현안을 매듭짓는 능력의 결여에서 연유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자는 거냐고? 당내 혁신을 놓고 싸울 땐 싸우더라도, 야당이 집중해서 매듭지어야 할 경제 현안이 널려 있다. 예를 들어, 금융산업의 급선무는 우리은행 민영화다. 공적자금 투입으로 국유화된 지 15년이 지났고, 과거 네 차례의 매각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헐값매각 시비에 걸려 청문회에 불려갈 우려 때문에, 관료들이 마냥 시간을 죽이고 있는 탓이다. 그 결과 우리은행은 산업은행보다 더 국책은행스러워졌고, 자산 280조원짜리 은행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이래선 안된다. “빨리 팔아라. 사후 문책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특히 야당이 결단해야 할 일이다.
한편 최근 자본시장의 화젯거리는 단연 한화투자증권의 주진형 사장이다. 삼성물산 합병 때 반대 취지의 보고서를 냈고,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들이 100% 지분을 가진 한화S&C에 대한 일감몰아주기 관행에 제동을 걸다가 경질설에 휘말렸다. 롯데의 ‘손가락 해임’과 다를 바 없다. 재벌개혁의 모든 이슈가 응축된 이 사건이 ‘증권업계의 실패한 이단아’로 소비되는 걸 보고만 있을 건가. ‘15대 경제민주화 법안’을 발표하는 걸로 선명성 내세울 때가 아니다. 현안에서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예산안 및 부속 세법 개정안을 보면, 1600만 근로소득자 중 절반인 800만명이 세금을 단돈 1원도 안 내게 되어 있다. 여기엔 침묵하면서, 부자·대기업 증세로 보편적 복지 하자고 주장하는 건 사기극이다. 최저임금에 해당하는 연 1300만원 초과 소득자는 최소한 월 1만원의 세금은 반드시 내게 하는 ‘근로소득 최저한세’ 도입을 주장할 용기는 없는가. 서민의 세금으로 국공립 보육원 더 짓자고 설득하고, 여기에 매칭해서 부자들도 세금 더 내라고 압박할 용기는 없는가. 금기에 도전해서 현안의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하도 답답해서 지껄여봤다.
“문학을 지키려면 각오가 필요…문학 같은 문학을 해보려는 욕망을 가진 사람 찾아볼 것” - 이인성 ‘문학실험실’ 대표·소설가 “문학은 삶의 진정성과 관련…자주 만나서 싸우고 떠들고 안 읽히는 작품 많이 나와야” - 정과리 ‘쓺’ 편집위원·문학평론가
디지털 문명, 세계화, 정보화, 신자유주의 경제. 현 세계 체제와 문화적 조류를 대표하는 거의 모든 것에 저항하겠다고, 그들의 실험이 실패를 거듭할 것을 알면서도 문예지 ‘쓺_문학의 이름으로’ 창간호는 공표했다. ‘문학실험실’이 만든 ‘쓺’은 창간호 특집으로 ‘묻는다, 한국문학의 존재 이유를’을 내걸고, 기존 문예지에서 보기 어려운 수준으로 풍부하고 탄탄한 글들을 선보였다. 김태환·정과리·함돈균·정홍수·김형중·조형석·김나영 평론가와 김숨·박상수·박인성·정용준·정한아가 글을 실었고, 포럼 ‘김현 비평의 역동성’ 발제문, ‘텍스트 실험 공간’, ‘그때 그 실험’ 등 ‘쓺’만의 개성이 엿보이는 코너를 마련했다.
‘실험과 저항’을 내세우는 문학실험실 대표이자 ‘쓺’ 편집인인 소설가 이인성씨(62)와 ‘쓺’ 편집위원인 문학평론가 정과리씨(57)를 지난 24일 만났다. 두 사람은 현 한국문학의 핵심 문제로 ‘상업주의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문화적 위선’ ‘문화의 현장에 비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비평’을 꼽았다.
- 문학에 관한 건강한 담론이 형성된다고 해서 문학이 그 의도대로 뻗어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학실험실과 ‘쓺’이 어떤 역할을 하리라 기대하는가.
소설가 이인성씨(오른쪽)와 평론가 정과리씨가 24일 서울 혜화동 문학실험실 앞 인도를 걸으며 대화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이인성(이하 이)= 작가와 작품이 처음이자 끝이지만, 그들이 발 디디고 있을 ‘자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터가 없거나, 자꾸 제거당하고 있다. 예전에 김현 선생이 상업주의에 대응하는 길은 “좋은 작품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소비재로 전락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작품들을 부추겨, 그런 작품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문화의 자리를 만드는 길뿐이다”라고 쓰신 적이 있다.
정과리(이하 정)= 좋은 문학이 살아남을 터전이 점점 없어지고 20여년간 저열한 상태로 추락해 온 것은 상업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문학으로 자급자족, 최소 생계유지가 어려운 구조적 문제 때문에 상업 시스템에 적응 못하면 굶어 죽게 돼 있다. 대중과 평단의 무관심 속에 자기만의 문학만 하는 사람은 거론조차 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품이 상업논리에 휘말리면 다양한 듯하지만, 획일화된다. 그럼 한국문학 자체가 고사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흐름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의 실험을 시작했다. 읽히지 않는, 외면당하는 작품이 많이 나와야 한다.
- 최근 대다수 작품은 상업적 의도로 쓴 것 같지 않다. 잘 팔리지도 않는다.
정= 한국문학시장의 상업성은 아주 미묘하다. 대중성을 표방하면 안되고, 본격문학에 대한 신비감을 충족시켜야만 인정받는다. 본격문학은 대중과 소통하기 어렵다. 문학의 상업화 경향은 대중의 신비감을 충족시켜주면서 한편으로 대중이 그걸 소비하게 돕는 두 가지 장치로 진행된다. 대중을 유인하는 문체와 기묘한 아이디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작가들이 최고의 작가처럼 부상하고 대중적으로 성공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제 최인훈, 이청준이 줬던 깊은 지적인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본격문학의 지표가 변질된 것이다.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5~10년만 지나도 아무도 안 볼 작품을 쓴다.
이= 최근 직전까지는 상업주의에 편승하는 작품들이 많았고, 그도 스스로 버티기 어려워 자멸의 길을 걸었다고 본다.
- 문학이 오락성이나 상업성, 디지털 문화와 떨어져 지켜져야만 하는 대단한 것일까. ‘쓺’을 보면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굉장한 각오가 필요한 일 같다.
정= 심각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왜 문학만은 자기 세계를 고집하려고 하느냐면, 문학의 태생적 근원이 인류의 순수한 이상과 결부돼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진화 방향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유일한 반성적 장치로 기능하는 게 문학이라 생각한다. 디지털 세상에 꼭 문학만이 존재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꼭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문학만이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정신이 디지털 문화에 이식된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건 없겠다.
이= 문학을 ‘한다’는 것은 자유로움에 기초해 있지만,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위기의식과 관련되기 때문에 각오가 필요하다. 인간 역사에 문학이 없었다고 가정해 보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 하는 사유와 상상력이 발현되는 기제가 없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니, 그 결핍의 크기만큼이나 귀중하고 대단한 것이다.
- 어떤 태도로 문학실험실을 꾸려갈 것인가.
정= 문학은 삶의 진정성과 관련 있는 거라, 자주 만나서 싸우고 떠들어야 한다. 김현과 이청준이 서로 의견이 달라 대판 싸우고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하고 결별했다. 그러다가 이청준 작품을 읽은 김현이 감명 받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런 시대가 와야 한다. 지금은 모두가 싸움을 회피하는데, 그건 결국 자기 언어를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어떤 작품들 속에 있을 것이다. 어딘가 있을 좋은 작품, 못 보거나 안 보고 있는 것들, 정말 문학 같은 문학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볼 것이다. 자꾸 문제를 발견하고 실험하고 대응해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