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눈 덮힌 북한산 오봉이 마치 알프스 설산으로 스치는 느낌으로 3월20일을 펼쳐간다.
한강 물줄기 따라 이어지는 88도로의 교통체증을 피하여 의정부 외곽 순환도로를 접어들며 절기를 외면한 새로운 대자연의 설경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조용히 흐름을 이어가는 남한강은 화창한 빛으로 흠뻑 적시는 조용한 수면위로 윤슬의 눈부신 날개짓이 해동기 맞은 나비떼 되어 시선을 가득 채워가고, 간혹 불어오는 춘풍이 새싹 움트이는 숲의 향을 코밑으로 흘려 가슴속 깊히 담긴다.
영릉 제례 준비를 위하여 세워졌던 신륵사 정자에 올라 작은 미생물 태동하는 수면을 바라보며, 여주 탐방의 첫발을 딛는다.
오늘은 여주의 오일장 날!
농협마트 뒷편 이어지는 장시장 규모가 도로를 이어 이어 대여섯 블럭 건너 길게 늘어져 이루어지고, 소도시임을 의심할 정도로 수많은 인파로 법섞인다.
긴 인파의 대기 줄 호기심에 판매되는 물건 확인은 만두!
매장안에서 쉼없이 만들어 지는 만두는 두개의 즉석 찜 큰 가마솥으로 들어가 나오고 좌판에서 1회용 도시락에 10개씩 포장하여 판매하는 중년 여인의 손놀림은 쉴 틈 없이 분주하다.
만두 10개 가격이 불과 5천원!
어제 석바위 순이네 만두 7개 7천원에 비교하여 너무 착한 가격에 호기심으로 4펙을 주문 포장한다.
과연 그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
뒤 이어 찾은 영릉!
이조시대 영릉은 두 곳이 있다.
소현황후와 세종대왕을 모신 첫번째 합장이였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다.
세종대왕은 사후 선친 태종의 헌릉 옆 묻히길 원하여, 소현왕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헌릉의 서북쪽 위치한 곳에 묘를 모시게 한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에 밝았던 최양선은 이곳 묘자리가 절사손장자 자리로 부적성을 지적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세종의 장남 문종은 즉위 2년만에 승하하고, 문종의 장남 단종은 계유정란의 비운으로 떠났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은 요절하는 일들이 발생하였다.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인 절사손장자자리의 묘터를 예종은 할아버지 내외분 왕릉을 세종대왕면 왕대리인 이곳으로 영릉을 이전했다.
적송으로 가득찬 영릉입구 한글 전시관 들러 매표소를 지나니, 넓은 뜰은 세종대왕의 업적들이 가득 진열되어있다.
세종 23~24년에 개발품인 水標.
우기시 청계천과 한강의 물 높이를 측정하였던 수표는 나무 기둥으로 세웠으나 부식으로 수명의 한계성이 있어 돌로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測雨器는 세종 23년에 만들어진 원통형으로 당시 땅속 스며든 물의 높이를 측정하던 것보다 매우 효과적이고 지금의 측우량을 측정하는 기구와 같은 원리이다.
앙부일구(仰釜日咎)세종16년(1434)년 가마솥처럼 오목한 부분을 하늘로 향하여 안쪽 영침(쇠바늘)이 달력 역할을 하는 13줄과 시각을 알려주는 48줄 표시되어 영침의 그림자가 하지에서 동지에 이르는 24절기 시각을 알려주는 기구를 보며, 대단한 발견과 창의성에 감탄을 한다.
그 외로 휴대용 해시계인 천평일구(天平日咎)의 문맹인을 위한 십이지상 표시 및 해시계와 별시계인 일성정사의(日星定射倚).시간과 절기를 알려주는 정남일구(定南日咎), 휴대용 시계인 현주일구등 수많은 민생을 염두에 집념하였던 업적을 확인하며, 현 정치인 윤모시라는 인물 됨됨이와 비교해 현군의 정치에 감사하는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