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渚文集 卷之二/편지(書)/ 이 주정만승에게 드리다與李主政晩承

[배종찬(29대)]

이 주정만승에게 드리다與李主政晩承

동환(東煥)은 궁벽한 시골에서 뒤늦게 태어난 사람으로 서울에 더러 나의 선대에 교분이 있는 고가(故家)가 있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나 본디 용렬한 성품에다 시국의 형상이 막히고 집안의 일이 이어져 서울에 가서 사방의 사군자(士君子)와 종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개성의 모임에서 주정(主政)의 풍범을 뵙게 되었으니, 선대의 좋은 세의(世誼)를 말씀해주시고 온화한 안색을 내려주시어 정성스럽고 두터운 뜻이 저를 기쁘고 감복하게 하여 공경심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이에 진실로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세가(世家)의 자질을 대함이 응당 이와 같아야 함을 알게 되어 제 마음에 감격스러워 오랜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고 책심(責沈)의 한을 면하게 됨을 스스로 기뻐하였으니, 못난 제 주제에 영광스럽고 다행함이 마땅히 어떠했겠습니까? 다만 사람들이 많고 어수선하여 형세상 좋은 말씀을 편안히 받들 수가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 문후할 때에 또한 주정께서 행차할 즈음이라 대강 이별을 고하고 물러나오게 되었으니, 제 마음이 서글퍼서 저도 모르게 망연자실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제 때에 한 통의 편지를 올려야 했지만, 근심과 잡다한 일에 골몰하느라 이제껏 미루었으니 정성이 박한 죄를 또한 꾸짖을 만합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데, 삼가 생각건대 경전을 공부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시는 가운데 기거가 신의 가호가 있으시며 책을 보고 이치를 완미하는 공부가 더욱 높고 깊으신지요? 삼가 주정을 향해 내달리는 저의 마음에 축원하는 지극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세하생(世下生)은 지난 번 호서 등의 지역을 두루 다니다가 월초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여든을 바라보는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늘 편안하신 날이 없어 저의 일상이 다만 깊은 못에 임하고 얕은 얼음을 밟는 듯 조심스러울 뿐입니다. 이밖에도 근심스런 일이 또 한둘이 아니니, 족히 집사의 귀를 더럽힐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도리어 이 용렬하고 나약한 자질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학업을 놓아 헤매며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생각건대 선대의 아름다움이 점점 멀어지고 옛날의 법도가 남은 것이 없어져 가문의 위태로운 형상을 수립하거나 진작할 형세가 전혀 없으니,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때를 잘못 만난 탄식만 할 뿐입니다. 친분이 무겁고 사랑이 두터운 하집사(下執事)와 같으신 분이 만약 저의 이러한 실상을 아신다면 어찌 혜탄(蕙嘆)을 하지 않겠습니까?

주정의 선대 문충(文忠) 선생의 문집을 읽은 적이 없으니 저의 고루함이 부끄럽습니다. 저희 선조의 묘지(墓誌)는 이미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한(內翰) 선조에 대한 문충 선생의 만사가 있는 것을 지난번에 이미 말씀드렸었는데, 향후에 문집에서 혹 살펴주실 수 있는지요? 만약 빠졌다면 진실로 후배의 유감이 비록 미칠 수는 없겠으나, 뒤에 마땅히 기록해 올릴 계획입니다.

두문동(杜門洞)의 이번 거사는 진실로 오래도록 거행되지 않던 전례(典禮)입니다. 그러나 다만 생각건대 사체(事體)의 중대함과 의절(儀節)의 신중함이 결코 크게 동떨어져서는 안 되거늘, 위계와 차례의 정당함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생이 또한 당일 좌중에서 힘써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일은 좇을 수 없으니 어찌 다시 말하겠습니까? 이 일 때문에 어른 앞에서 망령된 말을 많이 뱉은 것을 지금까지도 떠올리면 송구하여 땀이 납니다.

서원지(書院誌)를 수집하는 일은 이미 분부를 들었습니다만, 지금 착수를 하는 것인지요? 저희 집 선대의 문적을 자세히 기록해 올리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우선 그 편수(編修)의 규모를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후일을 기다리니, 부디 상세히 가르쳐주시어 먼 곳의 쇠잔한 후손으로 하여금 남은 유감이 없게 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집사께서 이미 교감의 직임을 맡고 계시니 오직 이것을 믿고 두려움이 없을 뿐입니다.

길이 이토록 멀어서 달려가 말석에 참여해 의논을 우러러 들을 수 없으니 매우 한스럽습니다. 만나 뵐 기약이 쉽지가 않으니 삼가 바라건대 수시로 가르침을 내려주시어 저의 우매함을 깨우쳐 주신다면, 동환이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지만 감히 절하고 받아들여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러러 보는 나머지에 이것을 공손히 기다릴 뿐입니다.

책심(責沈) : 동시대의 군자를 알지 못한 것을 스스로 책망하는 말이다. 송(宋)나라 진관(陳瓘)이 명도선생(明道先生 : 이름은 顥, 자는 伯淳)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동남에 생장하여 정백순(程伯淳)이 있는 줄 알지 못하였다.”라고 탄식하고, 공자를 알아보지 못한 초(楚)나라 섭공(葉公, 沈諸梁)을 책망하는 뜻으로 〈책심문(責沈文)〉을 지어 자책하였다.

우애……가운데 : 원문의 ‘대피(大被)’를 풀이한 말이다. 대피는 큰 이불이다. 후한(後漢) 때 강굉(姜肱)의 자는 백회(伯淮)인데 두 아우 강중해(姜仲海), 강계강(姜季江)과 함께 우애가 지극해서 잠잘 때 반드시 한 이불을 덮고 잤다고 한다. 강굉의 자는 백해(伯海)이다. 《後漢書 卷53 姜肱列傳》

하집사(下執事) : 상대방을 일컫는 말. 남의 집에 일보는 사람을 집사라고 하는데, 자신이 상대방을 직접 지칭함이 황송하여 그 곁에 모시고 있는 집사 가운데서도 낮은 집사를 상대한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이다.

혜탄(蕙嘆) : 지초가 불타면 혜초가 탄식한다는 뜻으로 동류끼리 서로 슬퍼하는 일을 말한다. 육기(陸機, 261∼303)의 〈비서부(悲逝賦)〉에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아! 지초가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栢悅, 嗟芝焚而蕙嘆.]”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문충(文忠) 선생 : 이정귀(李廷龜, 1564∼1635)를 말한다.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90년(선조3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선 중기 4대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관직은 병조 판서, 예조 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월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조의 묘지(墓誌) :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의 묘지명(墓誌銘)을 말하다. 배용길의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장륙당(藏六堂), 본관은 흥해(興海)이다. 임연재(臨淵齋) 배삼익(裵三益, 1534∼1588)이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2)의 부장으로 활약하고, 정유재란 때는 화친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1602년(선조35)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예문관 검열·대교(待敎), 사헌부 감찰, 충청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천문·지리·율력(律曆)·병전(兵典)·의약 등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저서로는 《금역당집》이 있다.

내한(內翰) 선조 : 금역당을 말한다. 한림(翰林)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내한이라고 말한다.

두문동(杜門洞) :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다. 고려조의 신하 가운데 72인이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고 이곳에 들어가 살았는데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한다.

백저 배동환(白渚 裵東煥) 著, 김홍영·이미진 역, 학민출판사(2018)

[배종찬(29대)]

선조의 묘지(墓誌) : 배용길(裵龍吉, 1556∼1609)의 묘지명(墓誌銘)을 말하다.
-> 이것은 잘못인듯 함. 월사 이정귀가 지은 것은 임연 선조의 묘지명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