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여러분은 청보식품이나 청보라면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청보 핀토스라고 사라진 비운의 프로야구단도
아시는지요?
지금은 알려졌으나 5공화국 전두환
정권 내내 쉬쉬
거렸고 20~30년이 지나서 밝혀진
최악의 사건이 있습니다.
조준희 일병 월북사건입니다.
때는 1984년 6월 26일
오전 10시에서 11시경.
강원도8 동부전선 까치봉에 있는
육군 22사단 56연대 4대대
TOC (Tactical of Commander
전술 지휘소)상황실로
522GP로부터 아비규환의 보고와
수류탄 폭음이 들리며 이 사건이 당시
군대내에서 알려집니다 .
초기에는 북한측의 기습
강습으로 판단했으나,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총기를 난사한 뒤 휴전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습니다.
사건 바로 다음 날 조 일병의
대남월북권유 방송을 통해
조 일병의 월북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사실 계급으로는 조일병
월북은 높은 계급의
월북은 아니었지요.
1977년 20사단 유운학 중령의 월북.
(이 일로 인해 당시 화가 난 박정희가
20사단과 5사단의 위치를 서로
바꾸어 버립니다.)
유운학 중령이 월북한것이
보안사(보안사령부
훗날에는 기무사령부이고
이 기무사도 얼마전 해체되었죠)가
갈구어서 . .
(즉 보안사의 부대 파견 간부들이
월권해서 참다 못해 월북한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 .
박정희가 디바이드 앤 룰에
따라 보안사 손좀 보라고 보낸 양반이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기춘 대원군 김기춘이고
이때 앙심을 품은 보안사에서 10.26이후
김기춘을 조질라고 중앙정보부에 갔지만
이미 김기춘은 중정에 근무하지 않고
없었다는 이야기는
워낙 유명하죠)
1978년 6월 육군 12사단 정보장교였던
이준광 소령의 월북,
1981년 8월 육군 1사단 GP
담당 중대장이였던 석정현
대위(단기사관 12기)의 월북이
있었기때문에 . .
조준희 일병의 월북은
높은 계급의 월북은 아니었죠.
조 일병은 충북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가 22사단에 입대해
군 복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고 당일
새벽 치밀한 계획하에
내무반에서 잠을 자던
사병들에게 M16A1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했으며 총에 맞은
피해자들은 즉사하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한편 도주하던 조준희 일병을
추적하던 13전초중대 수색대원들이
지뢰를 밟거나 오발 사고로
사망하는 등의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모두 1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해당 GP 신임 소대장 소위는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살아남았으며
이 사건으로 당시 22사단장 장기하 소장,
이하 연대장,
대대장 곽근용 중령등이 모두 보직해임과
전역 조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기하 소장은 전역후에도
뻐꺼 전두환의 와이프인
턱주가리 영부인(?)이순자의 비호아래
청보식품 사장으로 취임합니다.
22사단56연대 4대대 특공
13중대 522GP 소속인
조준희 일병은 충북대학교
건축학과(83학번) 2학년에
재학 중 군에 입대했습니다.
조준희의 입대 배경은 여러
추측만 있었습니다.
당시 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입대시킨 녹화사업의
희생자중 한명이란 설도
있었지만 모릅니다.
조 일병은 소대원들을 죽이고
월북하겠다고 마음먹고
1984년 6월26일 새벽을
행동개시일(D-Day)로 잡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북한은
대북·대남방송으로 치열한
체제선전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확성기에서 들리는
소리는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음이 심했습니다.
조 일병은 이런 것까지 계산에 두고
있었지요.
이날 새벽 경계근무를 선 조 일병은
다음 근무자들과 교대했습니다.
먼저 경계근무를 함께 섰던
소대원을 막사 앞에서
소총으로 사살했습니다.
총 소리에 놀란 상황병이
막사 밖으로 뛰쳐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준 사격으로
사살했습니다.
조 일병은 수류탄 1발을 꺼내
막사 안 내무반에 투척하고.
그런 다음 막사 앞 풀숲에
엎드려 사격자세를 취했습니다.
‘쾅’하는 수류탄 폭발음을 듣고
주간 경계초소에서 2명이
계단으로 뛰어내려왔고
조 일병은 이들에게
조준 사격을 가했고,
병사들은 그 자리에
꼬꾸라지며 사망했습니다.
조준희는 월북후 아래와 같은
기자회견을 합니다.
☞저(조준희)는 남조선괴뢰군
고참으로부터 모진 학대와
구타 가혹행위를 받았습니다.
특히 저는 충북대학교 2년
재학중 입대하였기 때문에
특히나 데모를 했지 않았냐
하면서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남조선괴뢰군을
까부시고 의거월북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월북당일 저는 남조선 GP에서
주간경계를 서고 근무교대를
마쳤습니다.
초소 계단을 내려와서
괴뢰군 막사로 들어갈때
저는 행동을 했습니다.
우선 같이 근무를 섰던
남조선괴뢰군 한놈을
막사앞에서 사살했습니다.
총소리에 놀라 막사에서
괴뢰군 1명(아마 상황병이겠죠)
이 나오길래 마저 총으로
사격하여 죽였습니다.
그 즉시 저는 저에게 있던
수류탄1발을 까서 막사 내부로
던진후 막사앞 풀숲에
바짝 엎드려서 사격준비를
했습니다.
꽝 소리와 함께 주간경계초소에서
근무서던 괴뢰군 2명이
계단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괴뢰군 2명을
정조준사격으로 정확하게
쏴서 죽였습니다.
잠시후 막사안에서 살아남은
괴뢰군 몇명이 비틀대면서
나오길래 탄창을 즉시
교체한후 반자동으로
정확하게 조준사격을
해서 죽이고 막사내부로
진입했습니다.
수류탄1발을 챙긴후 철통문을
폭파시키고 저는
북조선의 품으로 안겼습니다.
이상 조준희의 기자회견 내용.
(북한 기자회견 내용으로는 사살 22명 ,
중상 10여명으로 발표)
이 월북 사건이 큰 이유는 그동안
월북은 비록 장교들이라도
무전병이나 운전병을 위협하고
총상을 입혀도 부상 정도인것에 비해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사건이었죠.
(북한 주장처럼 22명 사망이거나 우리측
조사결과처럼 15명 사망이거나)
1998년 평양방송에 출연하였다하고
그후 사라져서 강제수용소로 갔다는둥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북한내 소식이야 알수 없죠.
열받는것은 이 사건을 전두환 정권은
쉬쉬해서 당시 희생자 보상도 제대로
하지도 않았죠.
일반 군사고로 처리하고 언론통제를
하는 바람에 이 사건이 일반에 알려진것은
21세기 들어와서입니다.
그것도 22사단이 계속 사고가 나자
22사단 역대 사고들에서 밝혀진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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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난 GP 지역.
이런 최악의 사고에도 장기하 22사단장은
청보식품 사장이 되고 군납도 척척합니다.
하나회 출신이기도 했고 .
그래서 청보가 "청와대 보물"의 준말이라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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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에서 나온 모모라면 .
당시 청춘스타 최재성 배우를 모델로 기용.
전두환이 알츠하이머라는것은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편하게 누워서 죽으면 안되는 새끼인데..
첫댓글 가려면 그냥 조용히 가지 사람들은 왜 죽이고~~ㅠㅠ
그러게말입니다. 하긴 저 정도였으면
월북 안했으면 총살형집행이죠
(군인은
총살이니) 살벌한 전두환때니.
2000년대 중반 GP530
총기난사병사는 사형선고는 받았습니다.
다만 1997년 이후
사형집행은 없어져서 대한민국
군형법상 총살형은 이 사건 이후
화학대 총기난사 병사가 1986년
총살형 집행된 이후 없습니다.
다만 총기난사를 하다보니 월북을 할수밖에 없게 된것인지 (남쪽에는
있을수 없으니) 아니면 월북을 하려고
총기난사를 하게 된것인지는 아직
명확하지는 않죠.
결론은 월북하기 위해 " 남조선 괴뢰군"
죽이고 왔다고 북한에서 기자회견 했지만요.
장교들과 달리 사병이 월북하는데는
더 제약이 있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