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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시인세계> 신인상 시 당선작
베스트셀러 읽어 보세요 외 4편 / 하여진
세상의 모든 저녁 외 4편 / 노지연
베스트셀러 읽어 보세요 / 하여진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나면 시속 80으로 넘겨주는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 고르지 못함 고인물 튐 과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은 마음일랑 한번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리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
나도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거든요.
산다는 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
봄, 익스프레스 / 하여진
바람 팽팽한 날
신대방동 버짐 샛길로 묵은 봄 싣고
가릉가릉 1.5톤 용달차 달려오네
앞좌석에 앉은 노부부
희나리진 얼굴 위로 벚꽃 휘날리는데
서로 부딪치어
그냥저냥 더 깨질 것도 없는
저 지는 봄 송이 좀 보소
뿌리 불거진 주름살 손 꼭 붙잡고
언제 아랫목 한번 탐한 적 있었던가
그저 시린 윗목에서 굳은살 박이도록
허드렛일 궁시렁 한번 해본 적 없던 일평생
풀었다 쌓다 헐거워진 고샅길
단스 서랍 열리고 닫히는 옹이 속
꽃샘잎샘에 아차! 얼어버린 삶의 고랭지
꾹꾹 눌러 밟은 풋보리 누렇게
빛바랜 시절도 묶여 있겠네
테이프로 박은 깨진 거울 사이
오글오글 봄빛 스며드는 봄에는
봄에는 말여, 손 없는 날 꼽지 않아도
아무 때고 저승으로 옮겨가도 좋제
설 지난 쑥떡에 곰팡이 핀 봄 언덕 어디
전입한 주소에 새순 돋듯
늘그막에 또 물오르것다.
부서진 오아시스* / 하여진
스무 개의 젖꼭지를 가진 여자를 나는 알고 있어 물만 먹고 사는 시한부 인생인 그녀, 썩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부서지는 거였어. 그녀에게 달라붙어 젖을 빨고 있는 한 아름의 꽃, 그녀는 몸에 묻어나는 이슬의 냄새며 바람의 무늬를 보고 내일쯤은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알아, 톱밥과 모래로 태어난 몸뚱어리 구멍 뚫어 자신의 젖을 남김없이 주는 게 그녀의 소망이었어 “거기 누구 없어요 이름 없는 풀꽃이라도 괜찮아요 나는 아직 젖이 남아 있어요” 골목을 지나다 들었어 쓰레기통에 부서진 오아시스가 울고 있었어. 세상에서 가장 목마른 이름이 오아시스였어.
* 오아시스 : 꽃집에서 꽃꽂이용으로 사용하는 초록색 수반. 모래와 톱밥으로 만든다.
몸뻬꽃 / 하여진
가난에는 사이즈가 없어요
줄였다 늘였다 입을 수 있는 몸
입다 보면 뒤가 앞이 되기도 하지요
앞뒤 없는 사람은 가랑이 사이 덧댄
지느러미 한 장씩 가지고 있어요
선창가 새벽부터 소독차 지나가고
갈매기 울음도 하얗게 소독되고 있어요
새벽을 싣고 온 배에 올라
병어, 조기, 선별해주고 일당 외에 받은 고기로
모퉁이 난전에 생선 팔던 여자
뒷 생선 받고 준 몸값에 아이까지 얻었지요
젖 물릴 때면 옆구리까지 흘러내린 아이 머리통이
갈라진 토마토 같았어요
반평생 핏대 세워 지킨 그늘 아래
절망의 때가 번들거려요
마수 없어 헐렁해진 몸
암막새 수막새 생의 파도 휘적휘적 가르며
영혼까지 덤으로 담아주는 여자
단속반 실랑이에 나자빠져
흩어진 고등어를 주워 담는 그녀
시든 몸에도 꽃이 피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저 꽃무늬 몸뻬
물 위의 빈집 / 하여진
이제 충돌할 것 없다. 난간을 잃은 뱃머리 군데군데 자란 버섯못, 정박한 배에 일곱시가 켜진다 필라멘트 끊긴 항해등에 빛이 들고, 풍향계는 늙은 귀로 덜커덕 덜커덕 파도를 읽는다 낮은 선실 밑, 피가 돌지 않는 전선은 스파크 일던 그날처럼 얽혀 있다. 빳빳이 날 세운 펄럭이는 풀 한 포기 내려앉은 모든 것들의 버팀목이다. 갑판 찌그러진 통발에 아침 햇살이 잡혀 들썩거리고, 바람은 깨진 유리창을 들락거린다.
빈집은 빈집이 되고부터 녹슨 시간을 밖으로 퍼냈던가, 卍자로 금이 간 사이마다 아침 햇살이 깁고 있다. 삐걱 삐이걱 낮은 휘파람소리, 선실 벽시계는 언제나 7시, 담배를 붙여 물던 그을린 팔뚝은 어디로 갔는가, 뒤집힌 구두 한 짝이 소라껍질처럼 선실에 뒹굴고.
비를 피해 다녀간 새 발자국이 어지럽다 쇠말뚝에 묶인 닻처럼 가라앉은 그림자들, 먼 수평선에서 달려온 파도가 “편지요, 편지,” 자꾸만 빈집을 두드린다.
하여진 시인
1960년 광주출생 광주여자대학 문창과 중퇴. 방통대 국문과 수업
세상의 모든 저녁 / 노지연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
나는 따끈한 달과 바람을 넣고 달콤한 구름을 만들 거야
당신의 신전이 모든 어둠을 어둑어둑 집어먹기 전에
1
복제품, 달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
움푹 패인 달이 휘청거리며
느릿느릿 자신의 늘어난 태엽을 감아올린다
윤기나는 밤이 감은 눈을 번쩍 뜨며
헐렁한 그림자들의 나사를 조인다
차곡차곡 진열된 어둠들이 짧게 흔들린다
복제된 달의 그림자들이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신전의 허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어둠의 입술에 흥건한 침이 고인다
복제된 달이 담쟁이넝쿨처럼 일제히
신전의 기둥을 휘감는다
어둠이 휘발성이 되어
비닐봉지처럼 붕붕 날아오른다
허공으로 후드득 증발한다
2
바람의 신전
당신이 당신의 신전에 앉아 기도를 할 때
나는 당신의 신전에 걸린 바람들을 걸쳐 입고
당신을 복제하지
점점 달이 떠올라
나는 자꾸만 기침이 나와
사실, 이건 오래 전
우리 몸 속에 내재된 어둠의 본능이지
나는 당신을 입고
당신은 나를 입고
우리를 스쳐 지나가던 바람들이
끊임없이 당신과 나를 복제하지
매일매일 당신과 내가 늘어나지
어둠이 늑대처럼 갸르릉
기침을 하며 몰려오지
3
구름 BASKIN ROBBINS 31
복제된 달을 좋아해
차가운 핏방울 냄새를 사랑해
이 세상 모든 복제품들을 구워줘
모락모락 피어나는 바람을 넣고
뭉텅뭉텅해진 구름을 먹을 테야
입 한 가득 번져오는 차가운 핏방울!
낡은 태양을 구워 넣은 체리주빌레와
그림자들을 노릇노릇 구워 넣은
피스타치오 아몬드를 먹어봐
점점 모호해지는 어둠의 경계
눈 녹듯 사라지는 구름들을
한 입 가득 털어 넣고
신전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
당신의 신전 속에는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이 있지
* 김중일의 시 「구름이 구워지는 상점」에서 인용.
달의 뒤편 / 노지연
나는 전생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을지도 몰라 매일 매일이 새롭지 모든 것이 지루할 때면 비틀즈의 음악을 틀고 뜨개질을 해, 한올 한올, 나는 지금 당신을 엮고 있는 거야 아니 나와 당신을 엮고 있는 거야
당신은 자꾸 안녕이라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내가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 저 달의 뒤편 어딘가에 당신이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을 것만 같아
비릿한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 나는 당신이 감아올린 컵라면 면발들에 대해 생각하지 점점 가벼워지는 것은 내 생生이야 당신이 감아올린 것은 내 생生이야 점점 늘어나는 당신의 그림자 어쩌면 나는 전생에 당신의 마론인형이었을까?
뜨개질된 탯줄 속에서 모유냄새가 나, 당신이 달 속으로 들어가 늘어난 당신의 그림자를 쓰다듬을 때 나는 뜨개질된 당신과 나의 탯줄을 쓰다듬지 당신의 입 속에는 자꾸만 마른 침이 고이고
* 비틀즈의 노래 가사 인용.
국경의 여인숙 / 노지연
1
저 타오르는 지평선
국경의 여인숙이 불을 켜는 시간*
물레를 돌리던 공주가
백 년을 하루처럼 자고 있는 동안
태양의 뒤편 어딘가에서
밀봉되지 않은 눈동자들이 몰려와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며
여인숙 앞을 지나갈 때
저 지평선 사이로 번져오는 붉은 노을
이곳에 불시착한 바람들이 허방에 매달려
잠자는 공주를 훔쳐보고 돌아갈 때
공주의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회오리바람 같은 파문이 일고
중심을 잃은 새들이 자신의 중심을 찾아
달의 뒤편으로 후드득 날아오를 때
백마 탄 왕자의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고
물레위로 목쉰 마녀의 노랫소리가
삐걱삐걱 흘러나오는 사이
공주의 몸 속에서 풀려나온
무수한 꿈의 장면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지평선 속으로 사라지고
2
저 태양의 뒤편
국경의 여인숙이 불을 끄는 시간**
붉은 석양이 벙글어진 꽃잎처럼
하나 둘 떨어지고
백 년이 하루가 되어
물레 위에서 돌아갈 때
왕자가 성문을 열어젖히고
삐걱거리는 계단 위로
어둠의 입자들을 우수수 쏟아낼 때
무수한 꿈의 장면들이 몸을 섞으며
지평선 사이로 번져 오르는 저녁
점점 뚜렷해지는
태양과 태양의 뒤편의 경계
** 김선재의 시 「태양의 서쪽」에서 인용
모던타임스 / 노지연
파란대문을 사랑했다 누나는 매일 분꽃을 따 머리 위에 꽂고 다녔다 사람들은 누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밤이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누나의 배를 발로 뻥 차보고 싶었다 그 사이 내가 벗긴 양파껍질들은 점점 늘어나 양배추처럼 풍성해졌다 자꾸만 눈이 따가웠다
파란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다 파란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본드냄새가 났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파란대문 앞에서 매일 줄넘기를 했다 그 사이에도 내가 벗겨야 할 양파껍질들은 날로 늘어나 나는 자꾸만 배가 고팠다 폴짝폴짝 뛰어오를 때마다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분꽃이 떨어지던 계절이었다
더 이상 누나는 분꽃을 머리에 꽂지 않았다 누나 몫의 양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자꾸만 눈이 매웠다 나는 폴짝폴짝 줄넘기를 하며 뜨끈뜨끈한 녹색 위액을 내 몫의 양파 위에 뱉어내었다 자꾸만 하늘의 색깔이 바뀌었다 도시에는 파란 네온사인이 대문 대신 박혀 있었다
나는 파란대문을 찾으러 네온사인이 번뜩이는 거리로 걸어갔다 누나가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유리창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폴짝폴짝 줄넘기 줄을 넘지 않았다 내가 레고인형처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흉내낼 때마다 얼굴의 근육이 일그러졌다 나는 여전히 파란대문을 사랑했다
Snapshot / 노지연
사내가 비닐봉지 속에 고등어 몇 마리를 담고 뛴다
사내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밀착시킨다
사내의 왼쪽다리가 앞으로 튕겨져 나갈 듯 지상을 향하고 있다
허공으로 치켜든 사내의 오른쪽 발바닥이 허방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 뒤를 사내의 왼쪽 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쫓는다
검게 매몰된 시간들이 잘 당겨진 북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토막난 고등어가 다문 입을 활짝 열고 비린내를 우수수 쏟아낸다
사내의 몸이 검고 윤기 나는 밤 속으로 밀폐된다
사내가 점점 둥글어진다
순식간에 사내가 희미해진다
노지연 시인
1991년 출생. 고양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학과 2학년 재학 중. 추계예술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장원. 명지대학교 고교생 박일장 차상. 전북대학교 고교생 백일장 차상등
□ 심사평
[김종해]
경쾌한 시와 상상력의 시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명의 투고작 가운데 우리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다섯 명의 작품으로 압축하는 데 합의했다. 최종심에 남은 다섯 명은 임봄의 「당신의 연애사」, 이정훈의 「밤나무집 가계」, 정학명의 「구름정원의 기억」, 노지연의 「세상의 모든 저녁」, 하여진의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이상이다. 이 가운데 임봄, 이정훈, 정학영 세 분은 당선작을 5편으로 뽑는 《시인세계》 신인 공모 규정 때문에, 한두 편은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나머지 작품의 미비로 탈락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으로 하여진의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외 9편)와 노지연의 「세상의 모든 저녁」(외 11편) 이상 두 사람이 경합했다.
오랜 논의와 토의를 거치며, 심사 장소를 인근 음식점의 저녁 식탁으로 바꿔가면서 선자들은 의견을 조율했다. 결과, 선자들은 두 사람 모두를 당선시키기로 전원 합의했다.
하여진의 시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는 시행詩行이 매끄럽고 이미지의 흐름이 막힘이 없이 시원스럽게 읽혀지는 시다. 시속 60km~80km를 달리는 한 드라이버의 운전감각과, 속독으로 읽는 독서의 길찾기가 연관을 지으며 시로 잘 짜여져 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풍광과 끼어드는 문장, 일월과 계절의 흐름이 있는가 하면, 과속 방지턱이 있고,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는 독서의 묘미가 있다.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혀진다. 오랜 언어 수행을 닦은 사람으로 보인다.
노지연의 시 「세상의 모든 저녁」은 상상력의 공간이 넓고 언어운용이 활달하다. 환상과 상상력이 빚어내는 독특한 우주의 요리법을 구미 당기게 ‘당신의 신전’ 안에 펼쳐보인다.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먹음직한 음식― ‘따끈한 달과 바람’,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을 잘 체현해 낸다. 우주와 천체의 움직임을 사람의 미각과 결합시켜 저녁 식탁 위에 먹음직스럽게 올려놓은 이 시인의 상상력은 믿을 만하다. 그러나 이런 류의 시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은 관념이다. 환상과 가공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좀더 현실의식과 실체감에 시의 무게를 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두 시인의 전도를 축원한다.
[강은교]
부드럽게 이어진 시의 맥
문제는 맥脈이었다. 소리의 맥, 의미의 맥, 이미지의 맥이 객관화를 이루면서 극사極私에서 초극사超極私를 이루는 시를 찾아 이번에도 시읽기의 여행을 하였다.
마지막 독회를 통해 남은 시들은 「밤나무집 가계」 외(이정훈), 「당신의 연애사」 외(임봄), 「세상의 모든 저녁」 외(노지연), 「구름정원의 기억」 외(정학명),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외(하여진)의 시편들이었다. 「밤나무집 가계」 외(이정훈)의 시들은 발랄한 이미지가 아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었으나, 소리와 소리심이 없었다. 즉 그 이미지들이 얹혀 출렁일 육화肉化된 소리-소리심과 이미지들을 받칠 의미의 핵이 없었다. 그에 비해 「당신의 연애사」 외(임봄)의 시편들은 시들을 관통하는 소리심(그 시인만의 리듬)이 있었을 뿐 아니라, 신선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부드러워 시의 맥이 잘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의미의 핵’이 약했으며 이는 곧 절규라고 할 수 있는 소리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읽는 이를 맥빠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시 전체를 받칠 ‘발견’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구름정원의 기억」 외(정학명)의 시편들도 위에 언급한 시의 장점과 단점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있었다. 개개의 이미지들은 아름답고 현란했으나, 맥이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객관화를 통해 읽는 이와 연결되어, 극히 개인에서 출발하는 ‘극사’의 시가 ‘초극사의 시’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위의 시편들을 다시 읽으며 토의한 결과 「세상의 모든 저녁」(노지연)과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하여진)의 시편들이 남게 되어 심사자들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두 시인의 시들은 경향은 아주 달랐으나, 응모시 10편이 아주 고른 수준을 지니고 있었고, 부드럽게 시의 맥이 이어졌으며 소리와 소리심에 얹힌 이미지들은 ‘발견’의 ‘객관화’에 이르고 있었다. 시적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는 ‘의미의 핵’도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두 시인의 시편들을 다 당선작으로 하기로 하였다. 더구나 한 시인은 50대가 되는 시인이었으며 반면 한 시인은 아직 10대 후반의 시인이었으므로 그 두 시인의 시적 가능성은 그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둘 수 없게 하였다. 정진을 바란다. 두 시인 모두 그 ‘울림의 시들’을 앞으로의 시단에 펼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문인수]
지천명의 신인과 17세의 노시인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온전히 제것인 말은 없다”는 일갈은 진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사물에 대한 재발견을 위해 끊임없이 관찰하고 자문자답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영판 달리 적으려 노력한다. 그 결실이 곧 한 편의 시다. 따라서 이 시에 담긴 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생각)이어야 하며, 그러나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 적 없는 말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 새로운 시가 될 것이며, 또한 시인과 독자가 잘 통하는 시가 될 것이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들을 읽으면서 내내 안타깝고 답답하게 느낀 점은 시를 쓰느라고 참 너무 불필요한 고생을 하는구나 싶은 것이었다. 다수의 작품이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시의 기본 요건인 ‘소통’을 무슨 ‘낡은 것’쯤으로 치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소위 낯설게 하기에, 멋들어지게 표현하기에만 골몰한 나머지 오히려 요령부득의 생경한 ‘혼잣말’에 빠져버린 시가 많았다. 이 같은 ‘오버’는 자신의 소중한 공부며 사유가 시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하게 된 요인인 것이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다섯 분의 작품,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외, 「세상의 모든 저녁」 외, 「당신의 연애사」 외, 「구름 정원의 기억」 외, 「밤나무집 가계」 외 등의 작품을 다시 돌려 읽었다. 그리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불통’의 문제에서 비교적 혐의가 없거나 적은 하여진 씨와 노지연 양을 당선의 자리에 함께 올린 것. 지천명에 시력 30년의 저력, 이미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여는…” 장관을 읽어내는 하여진 씨의 큰 스케일과 안정된 어조를 샀으며, 기발하게도 “잘 익은 달을 허공에 깨뜨려 먹는 맛!”을 보는, 아직은 고등학교 2학년 신분인 묘령, 노지연 양의 재기에 넘치는 발랄함과 그 무한한 가능성을 샀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모두 하여진 씨에겐 시인이라는 자리에 안주해버리지는 않을까 하고 우려했으며, 노지연 양에겐 시인이라는 영예가 오히려 무슨 족쇄가 되거나 자만에 빠지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바 있음을 귀띔해 둔다. 두 시인을 내보내는 설렘과 기쁨이 크다. 축하드린다.
[예심평 - 권혁웅]
고른 수준의 응모작들
심사를 하다 보면 때로 지나친 훈련이 시를 망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시에도 훈련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습작이란 사실 문턱과 같은 것이다. 문턱을 지나면 문이 닫히고, 우리는 애써 그 다음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문턱 이전을 잊을수록 시에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되풀이된 훈련은 감수성을 깎고 다듬어 평균적인 수준으로 만들어버린다. 가르친 스승을 닮고, 나누는 동료를 닮고, 좋아하는 시편들을 닮는다. 닮은꼴을 벗어나기 위해서 시인이 되는 것인데, 시인이 되기 위해 닮아간다는 것은 슬픈 역설이다. 물론 미학은 강압을 필요로 하지만, 이때의 강압은 미의식의 몫이지, 스승의 몫이 아니다. 미의식은 대상과 교감하는 자의식이기 때문이다. 《시인세계》의 명성 덕분인지, 투고된 작품들은 거의가 수준급이었다. 이만큼 고른 수준의 응모자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눈길을 잡아채는 단 한 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고심 끝에 열다섯 명을 골라서 본심에 올렸다. 우리보다 훨씬 눈이 밝은 본심위원들께서 잘 찾으실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