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기독교의 이단 형태
역사적으로 볼 때 초대교회는 강한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단합과 일치를 이루었지만 교리적 측면에서는 처음부터 다양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약성서 시대에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신앙의 강조점과 특징이 달랐으며, 기독교가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 나갔을 때 희랍문화권에 속한 동방교회와 라틴문화권에 속한 서방교회는 언어와 사고방식, 그리고 교리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지역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이 나타났으며 교회는 교인들간의 결속과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 시켰고 감독을 중심으로 바른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교회의 신앙을 위협하는 운동이나 가르침이 나타났을 때 교회의 지도자인 교부들은 그것을 반박하고 성서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정통교리를 정립하려고 했고, 때로는 교회회의를 개최하여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1) 유대주의 기독교
초기 기독교 시대는 율법을 고수하던 유대 기독교는 바울을 배척하며 복음적 기독교와 대립하였다. 이들은 기독교의 확장을 방해하며 교묘히 괴롭혔는데 70년 예수살렘의 함락 후 세 파로 나뉘어졌다.
(1) 에비온파(Ebionites)는 유대교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했다. 이들은 예수가 단순한 사람이지만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예언자요 교사로서 구약 성경의 율법을 엄격하고 확대하였고 이적 행위를 자랑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예수가 단지 율법을 엄수한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며, 또 그의 율법적 경건 때문에 메시아로 피택되었다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사도로 인정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율법의 배반자로 취급했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주장했다.
(2) 나사렛파(Nazarenes)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서 유대적 전통을 계승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에비온파와는 다르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의무일 뿐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히브리 마태복음만을 사용했으며 바울을 진정한 사도로 인정하였다.
(3) 엘카사파(Elke-saites) 2세기 초 이교적인 교훈과 유대주의를 혼합하여 만들었다. 이들은 요단강 하류 사해 동편에 거주했으며, 접신론적 사색과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조하는 유대적 기독교 단체였다. 이들에 의하면 엘카사이가 페르시아에 있을 때 무서운 힘을 가진 천사 그리스도가 여성 천사 성령을 동반하고 그에게 임하신 새로운 계시의 책을 주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그 아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2의 세례를 주어 모든 죄를 다 사하신다고 믿었다. 이들은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할례는 받아야 하지만 유대적 안식일 준수와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희생 제사는 금지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정하고 바울을 배척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계속 성육신하는 원형인이라고 믿었다. 점성술과 마술을 믿었으며 빵과 소금에 의한 성례식을 주창했다. 이같은 유대주의 기독교는 5세기에 사라졌다.
2) 단일신론 (Monarchianism)
초대 교회가 부흥, 발전해 감에 따라 신자들의 유일신 신앙은 보편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성부와 성자가 사실 동일한 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단일신론파(뫄키안) 들이다. 성부가 성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을 함으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3) 마니교 (Manichaeism)
마니교는 본래 헬라 콥트어인 Manichaios에서 유래되었다. 처음에 기독교와 상관없이 발흥했으나 서방으로 확산되면서 기독교와 접촉하여 기독교적인 요소를 흡수하게 되었다. 창시자 마니는 216년 바빌로니아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후 아버지와 바벨론 남부의 엘카사이 숭배자들 가운데서 성장하였다. 마니교는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색체를 가미한 신화적 성격의 기독교 이단 종파이다. 이들에 따르면 마니 이전에 있었던 선지자들이 단편적으로 알려준 계시를 마니가 보다 완전하게 알려 준다. 마니교는 본질상 영지주의로 극단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선악이 영원히 대립되어 있다고 믿고 악을 물질과 동일시 하였다. 인간은 이 물질 속에서 타락하였으나 빛의 한 미립자로서 신적 신체의 일부분이므로 영혼이 물질로부터 오염되지 않고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다. 이들은 두 원칙, 빛과 어둠, 신과 물질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이들은 육체를 정복하는 금욕 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은 자칭 선택된 의인으로 생각하여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결혼과 성생활을 삼갔고 망령된 말을 금했다. 이들의 최고의 덕은 세 가지 인봉으로, 입의 인봉은 육식과 망령된 말을 금하는 것, 손의 인봉은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 가슴의 인봉은 정욕과 모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4) 영지주의(그노시스: gnosticism)
영지주의란 말은 '지식'을 뜻하는 희랍어 gnosis에서 유래하였다. 영지주의는 운동이라기 보다는 기독교, 유대교, 고대 희랍철학, 동양 신비종교가 뒤섞인 일종의 혼합주의적 사상체계(syncretism)로서 2세기부터 5세기까지 번성하였다. 영지주의 자들은 신의 계시와 구원의 비밀을 일반인들과 같은 육적 인간들(somatics)이나 기독교인들과 같은 혼적 인간들(psychics)은 알 수 없으며 오직 영적 인간들(pneumatics), 즉 영지주의자들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질과 육체를 열등하고 악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에 근거해서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오직 영혼과 신과의 연합만을 중시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영적 존재로서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몸에 들어왔으나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그의 몸을 떠났으며 따라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은 인간 예수이지 그리스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단지 허상(dokesis : appearance)에 불과하다는 가현설(假現設 : docetism)을 주장했다
교회들은 영지주의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성을 지닌 분으로서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했으며 우리의 부활은 육체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유출설에 맞서서 우주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에 의해서 '무로부터 창조(creatio ex nihilo : creation out of nothing)'되었으며 물질과 육체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것임을 가르쳤다.
이들은 거룩하시고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이 결코 인간의 썩어질 육체를 입으실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인간과는 다른 차원의 하나님은 영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이신데, 어찌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악하고, 저급해 보이는 물질세계에 속한 인간의 썩어질 육체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고 그럴듯한 논리로 당시의 교인들을 미혹했다.
바울은 영지주의의 혼합적인 거짓교훈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그는 지식으로 교만하게 된 고린도교회의 대적들, 비교적인 지혜를 강조하고, 엘리트 부류(고전 2:6-7)로 자처하는 그들에 대해서 편지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세워주는 사랑이며 (고전8:1, 13:8), 부분적으로 폐하게 되는 지혜는 십자가 앞의 어리석음이며(고전1:18, 2:7-8), 참 지식은 영적우월주의가 아닌 그리스도의 마음(2:16, 빌2:5)이라고 주장한다.
5) 말시온주의
마르시온은 극단적인 바울 추종자였다. 그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분리시켰다. 왜냐하면 구약성서는 율법서에 불과하고 신약성서는 복음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서 일뿐이며 구약성서의 신은 지고한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nurgos)라는 열등한 창조신에 불과하며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신이다. 반면에 신약성서의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나님이며 우주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 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현설을 주장하면서 물질과 육체는 악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적 존재라고 가르쳤다. 마르시온은 구약성서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신약성서 중에서도 목회서신을 제외한10권의 바울서신과 사랑을 강조한 누가복음의 일부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유대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울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라고 여겼다.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 외에는 모두 유대교의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교부들은 마르시온의 가르침에 대항해서 구약성서의 창조주 하나님과 신약성서의 사랑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시며, 구약성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담긴 책이기 때문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마르시온의 정서 편집에 자극을 받은 정통교회는 성서의 정경화(canonization)작업을 진행시켰고 393년 북아프리카의 히포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서 정경목록을 확정하였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적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6) 몬타누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몬타누스는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고 하는 종말론자였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177년 몬타누스를 정죄하였고, 교회의 결속을 위하여 감독의 지위와 권한을 강화시켰다. 교부들은 몬타누스주의자들의 방언과 열광적 엑스타시의 체험을 비기독교적이라 비판했고, 특히 여사제들의 지도적 역할과 여성에 의한 성찬식과 세례식이 교회의 전통에 어긋난다고 비판하였다. 몬타누스주의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성령운동이라 불리 울 수 있다. 그 후 비슷한 유형의 성령운동이나 예언운동이 계속 나타났으며 감독의 권한과 사도전통을 지키려는 기존 교회와는 계속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현대의 여성신학자들은 특히 몬타누스주의에 나타난 여성의 사제직과 지도적 역할을 중시하고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