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독일계 미국인인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이런 인간의 자유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다루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사회 기류는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낙관적인 사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우주의 원리를 밝혀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 판단과 합리주의에 도취해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계대전은 그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전쟁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전쟁을 마주하고 드러난 이탈리아의 파시즘이나 독일의 나치즘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논쟁거리였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포기하고 집단, 더 크게는 국가의 부속품처럼 존재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에서 인간은 오히려 안정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에리히 프롬이 이런 인간의 자유와 불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런 요인은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사회적 원인과 심리적 이유에 대해 고찰한 책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개인의 출현을 중세 이후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중세는 신과 교회의 시대로 신 아래의 종교성과 교회의 공동체성이 인간을 정의하던 시대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사회체제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묶여 있었습니다. 계급의 이동도 불가능했고 다른 도시나 나라로 이동도 어려웠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은 규칙과 의무의 지배를 받았으며 개인의 활동 영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연유로 인간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립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고독으로부터의 도피
그러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통해 중세 사회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아를 가진 개인, 즉 개체로서의 자유가 확보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통해 신에게 벗어난 인간은 자립할 수 있었고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요구가 아닌 개인의 신앙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신과 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은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하지만 개인이 많은 부분에서 성장하고, 정신적으로도 진보를 이루고,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위한 자유' 사이의 불균형도 커졌습니다.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적극적으로 실현할 가능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은 인간을 불안에 떨게 했습니다. 결국 불안해진 인간은 자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속박으로 기꺼이 들어가거나 아예 무관심 속으로 도피했습니다.
개체화 과정은 고독의 증대입니다. 사람은 개인을 벗어난 외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유대감을 느끼며 안정감을 받습니다. 개인에서 벗어날수록 자기가 혼자라는 것,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했던 강한 체재와의 분리되는 것은 불안감과 무력감을 낳습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는 고독 속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고 다시금 강한 집단에 들어감으로써 소속감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어찌 보면 고독으로부터의 도피가 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정의한 자유와 현대인이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를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에 방해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구애받지 않는, 타인의 생각과 시선에 관여치 않고 집단이나 공동체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알며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자아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양태는 결국 결국 인정욕구와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욕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회가 도시화, 집단화될수록 개인은 더욱 고립감과 고독 속에 남겨집니다. 그렇기에 소셜미디어와 같은 네트워크에 묶여있기를 원하고 자신의 행동에 타인의 '좋아요'에 집착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결국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했던 '무엇을 위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에 필요조건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개인의 진정한 자유는 자아의 실현이 아닌 집단이나 공동체 안에서 소속감과 유대감으로 자유를 기꺼이 반납해 버리고 안도감을 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개인은 사회활동을 해야 하고 정치가 현실 속으로 들어오면서 개인의 자유는 더욱더 도전받습니다. 물론 어떤 분야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마음껏 표현되고 받아들여지지만 대부분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집단의 관계보다 우선시 되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염려했던 집단의 소속감을 위해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로의 회기는 되지 않을지언정 불평등이 증가하는 현실 속에서 세대별, 지역별, 연령별 갈등은 특정 계층에 편입되어 개인을 대변하는 또 다른 도구의 수단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혈연과 지역으로 묶였던 고전적 부족주의에서 인종으로 강화된 새로운 부족주의 출현, 좁게는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문화그룹의 집단인 신부족주의의 탄생은 규모의 차이일 뿐 형식은 여전히 고독으로부터의 도피이지 않나 싶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여전히 현대에도 읽히는, 그래서 고전으로 남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