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장마의 시작이라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마당을 둘러보았다.
이미 뽑아놓은 양귀비는 이제
메말라 씨방을 툭 건들기만 해도
가루같은 씨앗들이 쏟아져내린다.
도처에 흘린 씨앗들은
가을에 그 자리에서 버젓이 솟아날 것이다.
이젠 누구에게 양귀비 씨앗을
건넬 일도 없는데
무수한 그 씨앗들을 여전히 따서 모은다.
행여나 생각못했던 이에게라도,
갑작스런 그의 방문에
화들짝 놀라며 가는 길에
한 줌 들려 보낼지 모르겠어서.
연관성있게 생각을 이어갈 지 모르겠지만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오고
무성히 잎을 키워
어느날 꽃이 피었거든
아, 저거 가야가 준 양귀비인데..
하며 나를 기억할런지.
##심심하고 심심해서 왜 사는지 모르겠을 때도 위로받기 위해 시를 읽는다. 등 따습고 배불러 정신이 돼지처럼 무디어져 있을 때 시의 가시에 찔려 정신이 번쩍 나고 싶어 시를 읽는다. 나이 드는 게 쓸쓸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무서워서 시를 읽는다. 꽃피고 낙엽 지는 걸 되풀이해서 봐온 햇수를 생각하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년에 뿌릴 꽃씨를 받는 내가 측은해서 시를 읽는다.##
(박완서, 시를 읽는다)
이직 씨앗을 따모으는 내가
측은하지는 않고
더없이 행복한 작업이려니
나는 이대로
내 살아온 날의 절반 까지는 더
살아
씨앗을 모으고 뿌리고
또 나를 찾은 이들에게
기꺼이 한 봉투씩 담아 보낼
그런 날들이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