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걸음으로 걸어서 30분 정도면 먼 거리는 아니다. 교회가는 거리와 비슷할까, 조금 더 멀까. 그런데도 거이 발을 끊다 싶이하고 지냈다. 변명을 하자면 '빈손으로 못가서'라고 해야할까. 더 솔직히 말해서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라고 해야할까. 친밀한 사이라고 할수는 없을수도 있다. 아니다. 봐온 햇수가 있는데,,, 50년도 넘게 함께 시집 문화를 살아온 동지라면 동지 아닌가. 아이들끼리는 사촌관계다. 이보다 더 친밀한 관계가 또 있을까. 왕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개무시를 당한적도 없었다. 내가 고군분투를 하며 천지분간도 못했을때, 형님들도 자신들의 생활전선에서 분주해서 내게 어떤 도움이나 배려를 못해주었을 뿐이다. 아니, 그 누가 내남편의 무책임과 불성실과 불량함에 대하여 간섭할수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부모까지도 어쩔수 없는 문제도 있는 것이니까. 내 앞에 펼처진 황무함은 그냥 내 몫일 뿐이었다. 아니, 친정형제가 아닌이상 부끄럽고 민망해서 실상을 다 얘기할수도 없었다. 하찮고 비루한 내 인생에 스스로 침 밷는게 다 였다. 사실 친밀하고 말고는 내 스스로가 긋는 선이었을 뿐인지 모른다. 형님은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은 안하셨다. 가 뵙는게 내끼지 않아서 지어낸 말이다. 형님도 많이 뇌쇠하셨다. 90을 바라보는 연세니까. 그리고 병원을 드나들기도 하시니까. 휠체어까지 대여해 놓고 지내신다고 했다. 평일과 주말에는 다른 도우미가 오고 있다고 했다. 거동은 하지만 일상을 챙길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다. 활기차고 멋쟁이 셨는데,,, 세월과는 누구도 싸워 이길수가 없다는게 맞는 말이라는 것을 또 실감했다. 대충 안부가 끝나고 더는 할얘기가 없지 싶었을때, 일어났다. 비가 왔다. 아들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발이 젖었고, 거기다가 시장에서 생선포를 샀고, 시간도 너무 빠르다 싶어서 집으로 오게되었다. 아들이 집에 있으니까 부담없이 문자를 넣어 안가겠다고 했다. 안가는데 익숙해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중이다.
형님과는 주로 '갈 얘기'였다. 형님도 절박할수 있는 얘기니까. 그래도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좀 나을것 같다. 나처럼 자식들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의 절박함과는 또 다를테니까 말이다. 끝이 날수가 없는 얘기다. 따라서 희망적인 얘기일수도 없는 얘기다. 우린 다 외롭다. 돈돈거리며 분주하게 살다보니 어느세 고령이라는 재앙을 앞에두게 되었다. 여기서 또 기도가 답이라고 해야하나 보다.
딸이 보내준 과일 선물은 요긴하게 나누었다. 이웃집 집사님과는 물물교환을 했고, 쌍문동 형님께도 과자 한봉지와 과일 두개를(배와 망고)들고 갈수있었다. 명절은 즐겁고 기쁜게 맞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외롭고도 쓸쓸한 날이 되기도 한다. 이제 나에게 명절은 여느날이나 똑같은 날이다. 싸울필요도 섭섭할 필요도 없다. 그냥 소꼽놀이가 끝났을 뿐이고 돌아갈 날이 가까워 진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