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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 속의 시 '그 여자네 집'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가 새 교육과정의 시행에 따라 새로 나왔다. 5
년에 한 번씩 교과서가 바뀐다. 나는 그렇게 자주 교과서를
바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리말이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국어 교과서를 잘 만들어서 이십 년, 삼십 년 계속
유지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새 국어 교과서에 이청준의 '눈길', 윤흥길의 '장마',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이 실려 있다. 좋은 현대 소설을 가려 뽑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 중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의 주제야 나무랄 데 없다고 본다. 구성의 치밀성도, 탄탄한 문체도
흠 잡을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이 소설 속에 인용된 김용택 시인의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전개상 그 시 전편을 인용하였으리라고 추측되는데, 기왕에 인용된 시가 소설 못지 않게
수준 높은 작품이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라는 시에 사로잡혀 있었다.
김용택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일 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라고는 말 못 하겠다. 마찬가지로
'그 여자네 집'이 그의 많은 시 중 빼어난 시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면서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이란 시의 전문을 인용하고 있다.
소설과 관계되는 시의 한 부분을 인용한 것도 아니고 전체를 인용한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문제다. 그 시가 '빼어난 시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평가를 유보하였으나 일단 교과서에
'그 여자네 집'이란 시가 소설에 끼여 수록된 건 분명하다. 작가가 인용한 시가 기왕에 잘된 시였다면 좋은 소설과
함께 시 감상을 곁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금상첨화가 될 텐데….
소설은 일제 치하를 배경으로 하여 깐깐한 역사 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인용된
시는 60년대 무렵의 농촌을 배경으로 '그 여자'와 '그 여자네 집'을 잔잔한 어조의 서정으로 풀어내고 있다.
소설 속에 인용된 김용택의 시 '그 여자네 집'은 다음과 같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 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 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 갔다 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크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 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우리 동네 바로 윗 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그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이 시가 그려내는 한국적인 농촌의 어느 마을에 펼쳐지는 사계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고 평화롭다. 봄이면 살구꽃이 피고, 가을에는 감이 익고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며, 겨울에는
소복소복 눈이 내리는 지극히 소박한 서정의 마을이 여기 있다. 제법 긴 이 시 속에 나타나는
인물은 그 여자와 그 여자의 가족, 그리고 관찰자인 서정적 자아가 전부다.
그 여자를 남 모르게
그리워하는 서정적 자아의 보일 듯 말 듯한 연정이 희미하게 비칠 뿐,
농촌 현실의 고달픔도 세계나
사람살이의 갈등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 나라가 산업화와 근대화로 치달으면서 농촌이 붕괴되고
농경생활의 아름다운 정경도 더불어 없어진 것일 테지만 이 시는 지극히 아름답고 순화된
부분만을 보여준다. 시 속의 '그 여자네 집'은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이며 마음 속에만 그려지는 그림이기
때문에 아픔이 순화되고 현실이 배제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으로 보아 시인의 빼어난 작품들 몇 편 속에
충분히 끼일 수 있는 훌륭한 시이다. 지나치게 긴 분량을 좀더 줄여서
절반쯤으로 압축하고, 몇 군데의
눈에 거슬리는 표현들을 잘 다듬으면 교과서에 실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전에 교과서의 소설 속에 인용되는 시로 수록된다는 전제로 시인 자신에게 그 퇴고를 맡기거나
부분 인용 등으로 조율했더라면 싶기도 하다.
소설의 소재로서가 아닌 한 편의 시로서 이제 '그 여자네 집'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먼저 이 시에서는 시인의 의도라 할 수 없는 계절의 혼재를 볼 수 있다.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부터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까지는 '가을'이다.
곧이어 "살구꽃이 피는 집"부터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까지는 봄,
다시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부터 "참새 떼가 지저귀는 집"까지는 '늦가을'의 정경이 그려져 있다. 연의 구분 없이
그 뒤에 바로 이어진 "눈 오는 집"부터는 '겨울'의 정감 있는 풍경이 "그/ 여/ 자/ 네 집"에 까지 펼쳐진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부터 '초여름'에 있었던 그 여자와의 짧은 만남이 "함박꽃 같던 그/ 여자"까지 나타난다.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에서부터 끝까지는 이 시의 종결부로 현재의 서정적
자아가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즉, 이 시에서의 계절은 '과거 시간 속의 가을―봄―가을―겨울―여름―현재'로
뒤섞여 있는 것이다. 계절의 대비를 생각한다면 가을―봄, 겨울―여름으로 배열하거나,
자연적 순서를 따라 봄―여름―가을―겨울로 시상이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부분적으로 시를 검토해 볼 차례다. 첫 시작의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은 아무래도 중복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은행나무에 단풍잎이
돋는 법은 없을 것이니 "가을이면 은행나무 노랗게 물드는 집"이라 해도 좋으리라 본다.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은 어디서 많이 들은 유행가의 한 구절 같은 느낌이 든다. 밤에 검은
산을 배경으로 불빛이 따뜻하게 비쳐 나오는 집, 그 불빛 아래 수를 놓고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떠올리는 부분은 무척 감미롭다.
봄철에 벚꽃이 하얗게 핀다는 것은 말이 되지만 연분홍의 '살구꽃이 하얗게' 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무튼 살구꽃이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동이를 이고
오는 그 여자의 순박한 모습에는 고향의 정취가 물씬하다. 꽃잎이 잔잔한 물 위에 떨어져 일으키는
파문을 생각하고 시인은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다고 썼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조심스레 걸어가는 그 여자의 머리 위에 놓인 물동이 속의 물이 호수처럼
잔잔할까. 다만 아름다운 상상을 살려 보려다가 시인이 과욕을 부린 표현이다.
은행잎이 진 뒤 초가 지붕 위에 그 여자의 아버지와 큰오빠가
이엉을 이는 대목은 참으로 가슴이 훈훈하고 아름다운 정경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자네 집 열린
대문 사이를 슬쩍 지나치며 눈여겨 바라보는 표현 가운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언듯언듯 보이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시인은 고사하고 그가 국어를 제대로 쓰는 문인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말소리와 옷자락이 보인다는 이 부분의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은 그 앞의 엇비슷한
중복 표현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중 한 구절을 빼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리고"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또 '언듯언듯'이라는 의태어도 '언뜻언뜻'으로 바로잡아져야 한다.
겨울철 눈이 내리는 그 여자네 집을 그린 다음과 같은
이미지는 단연 이 시의 압권이다.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허리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얼마나
긴 속눈썹이기에 목화송이 같은 흰눈이 그 속눈썹에 걸린다는 건지 적이 의심스럽긴 하나 그 여자의
눈이 예쁘다는 표현으로 접어 생각할 수 있겠다. 눈송이가 속눈썹에 '걸린다'기보다 '묻는다'는 표현도
생각해 봄 직하다.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에서도 '하얀', '하얗게 하얗게'의
중복은 피하고 싶다. "내가 목화송이 같은 눈이 되어 내리고 싶"다는 간절함은 정말 감동적이다.
못밥을 이고 가는 그 여자와 서정적 자아가 만나는
초여름의 정경은 신록처럼 싱그럽다. 더욱이 그 여자가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쌀밥같이…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얼마나 건강하고 순박한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의 미숙한 산문적 표현을 벗겨낼 필요가 있긴 하지만.
이 시의 종결부에는 서정적 자아의 그 여자에 대한
그리움이 집약되어 있다. "우리 동네 바로 윗 동네 가운데 고샅 첫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의 선명한 그리움은 실감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그런데 "꽃 같은 열아홉 살"이라는 직유는 대중가요의 표현처럼 징그럽게 느껴지고,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내린다는 구절은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표현이라는 지적을 벗어나기 어렵다.
가늘디가는 버드나무 실가지라면 몰라도 살구나무 실가지는 생각할 수 없지 않겠는가.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시는 지나치게 기교적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의 기교에 속아 시가 무게를 잃고 가벼워지고 만 것에 대하여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예컨대, 겨울의 눈 내리는 밤에
"가만히,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이라든가,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이라는 마지막 결구의 기교가 이 시 전체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김용택의 '그 여자네 집'은 상당히 많은 부분의 결점을 지녔으면서도
산업화 이전의 고향― 농촌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서정시로 반복적인 운율의 효과에 힘입어
호소력이 강하다. 좀더 신경을 써서 계절의 시상 전개를 자연스럽게 가다듬고 과장된 몸짓을 절제하여서
절반 정도의 길이로 줄인다면 이 시는 훨씬 감칠맛 나는 빼어난 작품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