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였는지는 모르겠다. 이제와서, 나는 내가 참 쓸대없는데 성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으르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폄하는 사실이다. 이런 내가 참 쓸대없는 일에는 성실했다. 예배시간에 늦지 않는다는 것을 포함해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까지, 어리섞고 우둔할 정도였다. 어쩌면 이 작은 내 성실이 아이들에게 교훈으로 남겨지길 바랐을지도. 이거야말로 큰 착각 아닐까. 아픈날도 있었고, 짜증나는 날도 있었다. 섭섭한 날은 없었을까. 큰아이가 태어난날 이후로 나의 시계바늘은 아이들에게 맞추어졌다. 다른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하다가도, 집에 막 도착해서 엉덩이를 미처 내려놓기 전에도, 어린이 집으로 학교로 부르면 달려갔다. 이것이 내 인생이라고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불평하지 않았다. 아니, 이런일이 아니면 내가 뭘 할수있느냐고 당연하게 감사하게 생각했다. 이제와서야 대충 해도 되었다는 생각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예배시간? 늦을수도 있다! 약속시간? 약속은 깨어지라고 있는거다. 애들에게도 '나 볼일이 있어 오늘 니네집 못간다'고 할수 있어야 했다. 아니, 다반사로 그랬어야 한다. 그걸 못한것은 소심해서다. 민폐끼치는 사람만은 안돼야 한다는 것도 있다. 크거나 작거나,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서로에게 민폐 대상이다. 이제와서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에 씁쓸함이 배어와선가 보다. 내 수고와 노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음이 아쉼고 안타가운 것인가 보다. 아들에게서 생활비를 받았으니까 공짜는 아니었다. 돈을 주고 받았으니까 샘은 확실히 했다는, 그러니 할말도 없긴하다. 그럼에도 내 마음은 그게 다가 아닌것이 왜 일까. 마음을 다해서? 그 알량한 성실 때문에? 이제는 작별을 할때가 가까웠나보다. 언젠가 꿈에서, 아이들과 멀뚱거렸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렇게 멀어질수도 있는게 아닐까 싶다. 소꼽놀이는 소꼽놀이다. 끝날때가 반듯이 오게 되어있다.
시간이 되면 성경을 읽으려고 했는데 서둘러 다시 소설책을 빌려왔다. 40년이 넘는 동안 교인으로 살아왔으면서도 믿음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자라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비난하는데도 나는 자랄 생각이 없는지, 능력밖인지 모르겠다. 소설이 더 좋다. 그것도 판타지 말이다. 무협판타지가 더 좋은데( 물리지도 않나보다) 찾지 못해서 유럽 판타지를 읽는 중이다. 말도 안되는 얘기들이다. 잔혹하고 도의적이지도않고 정의도 없다. 폭력과 탐욕이 가득한 얘기들을 나는 왜 탐하고 있는 것일까. 비 현실적이어서 그 비현실이 나를 매혹시키고 있는 것일까. 아니, 나는 독서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냥 시간을 때우고 있는 것이다. 무한히 펼쳐저 있는 나의 이 광활하기까지한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소비하기 위해서 택한게 판타지 읽기다. 그리고 이게 가장 저렴하니까. 취미 생활을 하려면 어느정도 투자가 필요하다. 뭔가를 배우려고 해도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책 읽기는 어떤 것도 필요없다. 도서관은 무료이며 또 다들 친절하다. 노인네 취미를 응원해주고 있다. 그러면 된것 아닌가. 걸어서 가니 운동도 되고, 넘치는 시간이 잘 가고 있으니 이만한게 어디가서 찾겠는가. 이번생은 이렇게 마무리 하면 될것 같다. 그런데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른다. 너무 오래 있지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