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20대 후반쯤 되었을 때인가. 미국에서 공부랍시고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넉넉지 못한 경제 사정으로 인하여 난 집세와 식비를 동시에 비교적 싼값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숙사 생활을 꽤 오래 해야만 했다. 그 기숙사는 주로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다른 기숙사에 비해 비용이 여러 가지로 덜 들었기에 나같이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적격이었다.
어느 눈 오는 날이었다고 생각한다. 식사시간이 되어 나는 기숙사 카페테리아에 내려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 때보다 좀 이른 식사였는지, 식당에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미국 학생들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때문에 기분에 들 떠 캠퍼스 전체의 분위기가 술렁거리고 있었지만, 우리같이 가난한 유학생들은 그저 기숙사 식당에서 모처럼 주는 고기 한 덩어리 먹으려고 그곳으로 가 타국생활의 설움을 달래며 자족(自足)하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힘들고 외롭던 시절이었다.
그 때 식당 문이 열리며 키가 아주 큰 여학생이 한 명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 생김새나 옷차림으로 보아 미국인 같지는 않았고 유럽 쪽 학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여학생을 보는 순간 초라한 옷차림을 하고 고기 덩이를 우적우적 씹고 있던 나의 눈은 글자 그대로 번쩍 뜨여짐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비교하라고 한다면 불란서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와 흡사한 얼굴에, 녹색과 청색이 교묘하게 조화된 화려한 스카프를 걸치고, 보라색 테의 안경을 쓴…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한 번 볼까말까한 미인이었다. 고기를 씹고 있던 내 게걸스런 입놀림이 순간 멈추어졌다. 첫 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그 날 저녁 이후, 내 방 천장과 내 책 페이지 페이지마다 그녀의 얼굴이 인쇄되기 시작했다. 공부도 할 수 없었고, 밥맛도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소위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녀와 단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해도 좋으니 그저 같이 있어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가정법 문장만이 내 뇌리 속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상사병 증세'를 제일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나와 같은 방을 쓰던 (역시) 불란서 룸메이트였다.
어느 날 밤, 난 맥주 반병에 이성(?)을 잃고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부끄러운(?) 비밀을 내 룸메이트에게 고백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난 룸메이트의 충고는 간단했다 : '해 봐, 안 해보고 잃어버리느니, 해보고 차이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니?' 쉽게 말해 '못 먹어도 고' 전법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그 충고에 큰 용기를 얻는 나는 변변치 못한 영어로 '당신을 한 번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식사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리라 생각합니다'라는 유치찬란하고 지극히 고전적인(?) 데이트 신청 쪽지를 내 친구를 통해 그녀에게 전했다. 난 거절의 답장, 혹은 무언(無言)의 무시가 올 것이라 99% 예상하고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라? 반응이 단 1시간만에 전화로 왔다. 'OK!' 뿐만 아니라, '너의 초청에 감사한다'는 부록까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날 저녁 세상이 참으로 내 것처럼 느껴졌고, 그녀와의 데이트를 어떻게 하면 멋지게 장식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첫 데이트 날짜는 일주일 후 토요일 저녁으로 정해졌다. 난 우선 멋진 식당에서 저녁을 한 후, 맨 마지막 영화를 보는 것으로 첫 데이트를 끝낼 계획을 세웠다 (너무 진도가 한꺼번에 나가면 무슨 일이든 깨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운명의 토요일이 왔다. 난 갖은 멋이란 멋은 다 부리고, 없는 돈에 향수까지 몸에 뿌리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녀를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만나자 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여 가뜩이나 큰 키의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코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가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 날처럼(좀 더 나다운 언어로 표현하자면 '첫눈에 뻑이 간 날처럼')' 그 날도 주먹만한 눈송이가 회색 빛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양 몹시 퍼부어 대고 있었다. 첫 데이트 날 날씨치고는 최고(?)였다 (역시 나 다운 언어로 말하자면 '날씨까지 짱이었다'). 난 일 미터 정도 쌓여있는 엄청난 폭설 (내가 살았던 일리노이 주의 적설량은 유명하다) 속을 그녀와 헤치며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길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지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내 손을 잡았다. '찌르륵… 푸드득 (전기 올라 감전되는 소리)!'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저 '그 여인'이 내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이 나의 관심사의 전부였고…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미소 띈 얼굴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또 한가지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고 느낀 사실은 그녀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되어 알량한 영어를 하는 나보다도 한 수 아래의 언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난 이것을 극장으로 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사실 첫 데이트 전, 나는 그녀와 함께 볼 영화까지 정해 놓고 그 영화를 미리 세 번이나 봐 둔 터였다. 때문에 그 영화를 거의 외우다 시피 하던 참에 그녀가 그 영화를 잘 이해 못하는 부분에 가서는 아주 '잘 난 듯이' 설명까지 해 주며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 애쓰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와 나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악수를 청하면서 '오늘 만남에 응해 줘서 너무 고마웠습니다'라고 깍듯이 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 악수에 응하기는 하면서도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불쾌한 표정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유를 안 것은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 다음날 나는 또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만남의 끈을 이어보려고 했으나 그녀의 대답은 얼음장같은 'No!'의 연속이었다. 너무 이상했다. 첫 만남에서 그토록 좋은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 왜 저렇게 '얼음 공주'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3주정도 수 없는 'No!'의 연속을 견디다 못해 마음을 먹고 그녀의 방 앞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몇 시간 기다린 끝에 그녀의 모습이 복도 저쪽 끝에서 나타났다. 역시 냉담한 표정이었다. 난 그야말로 차일 때 차이더라도 그 이유나 알아보려고 그녀에게 그와 같은 냉담한 반응의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 '첫 만남을 마치고 악수를 청하시다니요? 결국 제가 매력없는 여자란 말 아니에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나라에서는 첫 만남에서 서로가 마음에 들면 키스를 하죠.'
그녀의 방문이 쾅하고 닫히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하면 안될까요'할 수도 없고… 결국 '키스 못해 차인 남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캐나다에 여행을 갔다가 어느 눈이 몹시 오던 날, 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차가 전복되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눈 오던 날 내 영혼을 잠시 훔쳐 갔던 여인이, 역시 눈 오던 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왠지 더 비애감을 느끼게 했다.
먼 산을 보니 눈이 덮여있다. 어제 저녁 몇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내린 눈이리라. 새해가 하얀 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시작되어 나도 '하얗고 빈' 마음으로 이 새해를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눈 속에서 눈과 함께 세상을 떠난 한 불란서 여인을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