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은 명절이 더 외롭다. 갈곳도 마땅히 없거나 찾아주는 사람도 없거나, 이 모든 번거로움이 귀찮기도 하려니와 비용이 든다는 것도 불편하다. 쌍문동 형님이나 유여사나 나나, 다 같다. 왜 이렇게 오래나는지가 불평의 요인도 되고있다. 적당한 시기에 상쾌한 모습으로 돌아가면 모두가 해피할텐데, 그게 왜 안되는지 하나님만 아신다. 이건 하나님 소관이니 누가 마음대로 할수있는게 아니다. 누군 스스로 식사량을 조절해서라도 가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나는, 조금만 덜 먹으려고 하는데도 그마저도 쉽지가 않았다. 음식이 입에서 싫어지게 되지않는 한은 어렵다. 이것 또한 도전일까? 내일이 추석이고, 오늘은 그 전날이다. 모든 아낙네들이 가장 분주한 날중에 한날이다. 나는, 명절을 접었다. 아니, 원래도 명절이 있엇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약소한대로, 아이들에게 한끼 대접한다는 기분으로 맛없는 음식을 차려놓고 아이들을 초청하곤 했는데, 그나마 그만 두려고 정했다. 맛없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그러면 순서는 당연한것 아닌가 싶다. 사실 이제는 아무 영향력도 없는 신세다. 아니, 한번도 영향력 같은것은 없었다. 연화리에서는 조금이나마 발언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연화리를 떠나온 후로는 그냥 길을 떠도는 불량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초라한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아닌 고백을 안할수가 없다. 이젠 그 연화리도 마음속에만 있다. 간밤 꿈엔 작은 고모님을 뵈었다. 내 머리를 예쁘게 파마해 주셨는데,,, 한쪽 머리끝을 두세게 컬이 나오게 말았는데, 빗질을 하는 순간 아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양이 되었다. 고모님도 나도 지금처럼 늙은 모습이 아니었다는게 더 좋앗던 같기도 했다,,,. 세월은 내가 원하던 아니던 흐른다. 어떤 방향일지 모른다는게 더 희망적인 것일수도 있다. 어쩌면 신앙이란게 네 힘으로,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란 선택의 기로 같은 것일수도 있다. 하나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그대로의 하나님 보다는, 내가 원하는 내 하나님을 스스로 창조해서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 온전히 만물의 주인이 되신 나의 하나님을 나는 변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일이다. 먼지에 불과하고, 먼지로 돌아갈 하찮은 존제인 인간인 주제에, 구르는 재주하나 없이 엎드려 구부린채로 숨도 제데로 못쉬고 산주제에 말이다. 교만이 꼭 잘난 사람들 몫만이 아니더라. 허영심은, 탐욕은 못가진 자들이 더 집착하는 것 같더라. 자유는 여전히 멀리만 있더라. 손을 아무리 휘저어 신호를 보내도 응답은 없다. 지처서 스스로 멈출때까지 말이다. 명절은 사람을 더 외롭게 하는것 같다. 갈곳도 없고, 찾아올 사람은 더욱 없고, 이런 모든것들은 또 불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