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짐승에게 말할 때의 의미는 언제나 한 가지다. 예컨대 개에게 “손”이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앞발을 내 손에 올려”라는 뜻이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말은 상대방이 누구냐, 장소가 어디냐 등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시험을 망친 아들에게 아버지가 “멍청이”라고 한다면 경멸의 뜻일 가능성이 크다. 조용한 바(bar)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한 쪽 여자가 상대방 남자에게 “멍청이”라고 한다면 그건 애교나 유혹의 표현일 수 있다. 물론 술값을 누가 내느냐의 문제 때문에 진짜로 경멸해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사람이 하는 말은 확정적이지 않다. 때와 장소, 상대방, 분위기 등에 따라 사람의 같은 언어도 얼마든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개나 소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면, 영화의 의미 역시 한 가지일 수 없다. 아니 의미가 한 가지로 수렴되도록 영화를 만들면 안 된다. 관람자들마다 경험과 생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랑의 힘을 믿으며 사는 관람자와 배신당하는 삶에 익숙한 관람자에게 와 닿는 대사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는 사랑에 익숙한 사람도 필요하고 배신을 경계하며 사는 사람도 필요하다.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통일된 결론을 강요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
변명이 길었다. 나는 “Me before you"가 좀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로 이번 영화는 존엄사에 대한 것이기는 하나, 내가 생각하는 존엄사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존엄사는 생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생에 대한 강한 긍정이다. 사고로, 또는 오랜 병으로 인해 생기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죽고 싶은 상황이 생길 수 있는데, 그 죽음에 대한 결심을 본인에게 맡기자는 것이 존엄사의 취지다. 하지만 존엄사의 더 큰 취지는,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 죽음을 덤덤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살아 있을 때 정말 열심히 잘 살자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젊은 사람이다. 의식도 뚜렷하다. 단지 몸이 불편할 뿐이다. 이 남자가 견딜 수 없는 건 불구가 되어 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동정을 받는 존재로 전락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이다. 그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죽고 싶어 한다. 물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하지만 존엄사라는 이름으로 젊은 그의 자살이 미화되는 것은 불편하다. 그건 존엄사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불구가 된 사람은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 가치 없는 존재는 열심히 살 필요 없고 그냥 죽어도 되나? 아니 가치는 도대체 누가 정하는가? 이게 많이 불편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거대한 성(城)을 가진 부잣집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한참 잘 나갈 때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잘생긴 젊은이다. 사고 이전의 그는 기업 통폐합을 주도해서 많은 노동자가 해고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는 남자 주인공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M&A에 의해 해고된 노동자다) 그럼에도 그는 사고 이전에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생각하고 사고 이후에는 남의 동정이나 받으며 살아가는,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다. 도대체 그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이 자식에게 가난한 삶을 물려주기 싫어서, 내 월급으로는 자식에게 제대로 된 사교육을 시키지 못할 것 같아서,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함으로써 비인간적(?)으로 살 것 같아서 아예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OECD 최저 출산율에 대한 신문기사들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 그런데, 대학을 못 가면 정말 쓸모가 없는 존재인가? 가난하면 비참한가? (멀리서 찾아와 얘기를 들어주고 슬픔을 위로해주는 여주인공의 동생처럼, 언니가 번 돈을 쓰기만 하는 미혼모 여동생은 민폐 캐릭터일 뿐인가?) 그런 가치관이 있다면 그건 우울증과 자살률이 높아져 가는 극심한 자본주의 사회에 어느덧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미국, 유럽, 남미, 아프리카 등 국가와 사회마다 가난한 사람의 쓸모 있음과 없음에 대한 가치 판단의 정도는 천차만별이겠지만, 한국은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요즘은 멍청이 같이 생각이 옆길로 자주 샌다. 아무튼, 출산 회피를 구태여 옹호할 필요가 없듯 자살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의 주인공은 왜 불구가 된 자신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사회적인 분위기가 실제 그렇거나, 사회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스스로 믿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은 자살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고 사회가 변화할 때마다 자살률은 달라진다고 보았다. 뒤르켐에 의하면 자살은 사회적 현상이다. 영화 속 주인공의 자살은 사회적 가치판단에 의한 자기 삶의 가치 절하, 또는 사회적이고 자본주의적 타살을 개인이 무기력하게 받아들인 것으로밖에 생각이 되질 않는다.
하지만, 또는 그래서, 만일 이 영화가 영국 사회의 냉혹한 자본주의와 계급문제를 지적한 것이라면 괜찮은 영화일 수도 있다. 남자 주인공과 사귀던 여자 친구는 주인공이 불구가 되자 다른 남자를 선택해 결혼했다. 주인공의 전 여친은 “전 남친은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불구가 된 후 자신을 밀어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게 될 새 남자는 멍청이”라고 자신의 마음을 가정교사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전 여친이 선택한 남자는 하필 또 다른 성(城)을 가진 귀족 혈통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역시 돈과 계급이었던 것이다. 부자인 남자 주인공 역시 불구가 된 후 자살을 결심할 무렵 가난한 여자 주인공을 만났고 그녀에 의해 삶의 행복을 찾았지만, 자살-안락사-에 대한 결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전 여친의 선택,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선택은 이제는 사랑이 돈과 계급을 뛰어넘기가 매우 어려워진 시대임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을 말하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꽤 괜찮은 영화일 수 있다.
그래도 관객에게 훈훈한 판타지를 제공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죽기 직전 그녀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돈을 남겼다. 자신에게 돈보다 더 큰 행복을 주어서 고맙다는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는 황당무계한) 미사여구와 함께.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주곡이 아닐 수 없다. 내 운명이 타인의 선의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게 신데렐라 스토리의 짜증나는 점이다.
이 세상에 기적이 있다면 그건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고,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구원해 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라고 나는 믿는다. 라캉도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데 그에 관한 책을 안 읽어서 잘은 모르겠다. 어쨌든 타인에 의해 제공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건 우연이다. 죽는 순간까지 내 돈을 챙겨주는 타인이 현실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좋을 수도 있었던 영화는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하지 못했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동시에 존엄사에도 관심이 많은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추신)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의 영화평도 궁금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 다른 견해를 진지하게 경청해 주고 존중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생기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