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방렴 멸치
남상진
때로는 구부러진 그의 등에다
시위를 걸고 싶을 때가 있다
도시의 한복판에서
눈동자는 표적을 잃은 지 오래
골목은 출구도 없는 방안을 따라 이어졌다
누구처럼 막막한 놈들과 마주쳤을 때
한 번쯤 발사할 수 있는
먹물 한 줌 담아내지 못한 학벌
출구를 봉쇄당했을 때
무딘 주둥이를 얼마나 들이박았을까
붉게 물든 주둥이가 무색하게
몸뚱이는 이미 통발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달빛과 등대가 높은 곳에서
밤마다 눈빛을 주고받을 때에도
현수막을 흔들고 스크럼으로 맞섰을 뿐
올곧았던 대나무가
통발의 앞잡이가 될 줄 몰랐다
파도가 석화처럼 날을 세우고
통발에 웅크린 별들이
반짝 비늘로 스러지던 보름 밤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었을까
정리해고 통지를 받은 김씨가
한 평 방 안에서
벽을 향해 누운 등에다 시위를 걸고 있다
----남상진, {현관문은 블랙홀이다}에서
지난 18세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개입은 자본주의 발전을 약화시킨다는 생각에 동의를 했고, 따라서 작은 국가와 작은 정부를 실천해왔다. 하지만, 그러나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치안만을 담당해왔던 정부는 곧 새로운 문제에 봉착해왔는데, 그것은 빈부의 격차와 계급갈등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작은 국가와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경찰국가를 포기하고, 복지국가, 즉, 거대국가와 거대정부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국가가 부의 재분배를 통하여 모든 국민들의 경제활동과 문화활동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부의 대물림을 뿌리뽑고 완전고용정책을 실시하는 것과 함께,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비버러지의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을 살펴보면 경찰국가의 그것도 아니고, 복지국가의 그것도 아니다. 정부가 국민의 경제활동에 적극 개입한다는 점에서는 복지국가의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도 같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정경유착에 의한 친재벌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 복지국가는 재벌들의 부의 대물림을 원천봉쇄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부의 대물림은 신분의 이동과 부의 순환을 막는 동맥경화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속세와 증여세를 50% 내지 60%을 물리는 법적 장치는 이 동맥경화증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부는 이러한 법적 장치를 완비하고 있으면서도 내부거래와 일감몰아주기, 전환사채의 발행과 계열사간의 인수합병, 그리고, 고객예탁금과 국민연금을 통한 경영권 방어와 그 불법상속을 지원해줌으로써 오히려, 거꾸로 ‘부의 대물림’을 완성해주었던 것이다.
도대체 어느 정부에서 고객예탁금과 국민연금으로 특정기업의 경영권 방어와 부의 대물림을 완성해주는 나라가 있으며, 도대체 어느 정부에서 수많은 벤처기업들을 다 죽여가며 소수의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을 도와준 예가 있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사기꾼들의 국가이며, 이 사기꾼들에 의한 천민자본주의의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그룹, 현대그룹, SK그룹, LG그룹, 롯데그룹의 총수들을 하루바삐 구속하여 200년 징역형으로 다스리고, 그 그룹들의 운명을 자유시장경제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우리 재벌들은 따지고 보면 대한민국의 국민도 아니고, 소수의 치외법권지역의 외국인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조기유학을 보내고, 그들의 식당이나 그들만의 모임도 상류사회의 맴버쉽 카드를 지닌 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으며, 전국민의 정서와 전국민과 함께 하는 재벌들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재벌들의 부의 대물림은 정경유착에 의한 특혜이며, 이 대동맥경화증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게 된 것이다.
남상진 시인의 [죽방렴멸치]는 최악의 생존위기에 몰린 해고노동자의 절규이며, 이 해고노동자를 죽방렴멸치의 그것으로 치환시킨 대단히 아름답고 탁월한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적 화자인 김씨는 정리해고 통지를 받았고, 그는 죽방렴멸치처럼 등이 굽었다. 김씨는 그의 등에다가 시위를 걸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먹물 한 줌 담아내지 못한 학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때에 등이 굽었다는 것은 한 평생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는 것을 말하고, “때로는 구부러진 그의 등에다”가 시위를 걸고 싶었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일회용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악덕 사주에게 그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는 것을 말한다. 자유로운 삶의 터전을 잃고 죽방렴에 갇힌 멸치가 그 “무딘 주둥이”로 수없이 통발의 벽을 들이받아 보았지만, 그러나 그 어떠한 효과도 거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달빛은 정치권력이 되고, 등대는 사법권력이 된다. “달빛과 등대가 높은 곳에서/ 밤마다 눈빛을 주고받을 때”라는 시구는 정경유착을 암시하고, “현수막을 흔들고 스크럼으로 맞섰을 뿐”이라는 시구는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시위를 암시한다.
하지만, 그러나 “올곧았던 대나무가/ 통발의 앞잡이가 될 줄을 몰랐다”라는 시구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조의 간부가 오히려, 거꾸로 통발, 즉, 악덕 사주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올곧았던 대나무가/ 통발의 앞잡이가 될 줄 몰랐다.” 이때의 “올곧았던 대나무”는 노조의 간부를 뜻하고, 또한, 이때의 “통발”은 정리해고를 단행한 악덕 사주를 뜻한다.
“통발에 웅크린 별”, “반짝 비늘로 스러지던 보름 밤/ 생의 마침표를 찍고” 싶은 별, 아아, 최악의 생존의 위기에 몰려 있는 이 죽방렴멸치의 고독과 절망을 그 어느 누가 알 수가 있단 말인가? 아아, 최후의 시간이며, 정경유착에 의한 억압의 장소는그 어떠한 구원의 손길마저도 닿을 수가 없는 지옥의 그것과도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터처럼 소중하고, 일터처럼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일터에는 좌우의 이념도 없고, 일터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일터를 잃었거나 일터를 빼앗아간다면, 그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미치광이가 되고, 비록, 그것을 실천할 수는 없지만, 피눈물을 쏟으면서까지도 상대방의 목을 비틀고 무서운 잔혹극을 다 연출해내고 싶어한다. 한이 맺히면 등이 굽고, 그 무서운 복수의 염원 때문에,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화살을 쏘아대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통발에 웅크린 별”, “생의 마침표를” 찍은 별----. 남상진 시인의 [죽방렴멸치]는 대단히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시이며, 서사적인 구조에다가 극적인 효과까지 가미한 최고의 명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제식민 잔재 중 가장 사악하고 가장 악랄한 것은 주입식 암기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다. 주입식 암기교육은 세계적인 천재의 생산은 커녕, 우리 아이들을 모조리 수장水葬시키는 암적인 종양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나의 목숨, 명예 등, 그 모든 것을 다 걸고 말한다.
“주입식 암기교육을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으로 바꾸지 않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라고----.
아아, 죽방렴멸치의 운명에 지나지 않는 우리 한국인들의 운명이여!